박 희 권.. < 전사(戰士)의 고백(告白) > (1) 살기 좋은 집 "어이! 기석이, 좀 도와줘야 것구먼 젓소가 새끼를 나려구 혀서. .." 국민학교조차 허리어림에 끊겨 국문에 간신히 다다른 배움과 어깨너 머로 익힌 집터와 묘자리 잡는 법이 지식의 고작인 원모였다. 동네 어 르신들이 서 지관(地官)이라 칭하는 풍수쟁이의 세째 아들로 태어나 한 때는 아버지의 업을 물려받아 지관으로 나서려고도 하였다. 하지만 시 골 구석구석까지 찾아 드는 첨단문명의 발걸음들에 채여버린 지관이란 직업으로 살이를 이어가기에는 충분치 못했기에, 조그만 목장을 하시던 작은 아버님 댁의 목부로 들어왔다. 들어온지 12년째가 되는 원모는 나 와 동배였던 터에, 1년에 한 두번 내려가는 시골이지만, 가기만 하면 더없이 반겨 주었다. "아저씨허구 숙모는 장에 나가셔서 말이지..." "알았어. 지금 나갈께." 뒷 마당의 우물을 돌아 비탈진 경사를 오르니 19대째 내려오는 조선 기와들이 내려다 보인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명지대학에서 사진까지 찍어간 적이 있었던 보기에 위용있는 옛 집이었으나, 사람 살기에는 고 달픈 관계로 어느덧 세월속의 그림이 되어 갈 모양이다. 새 봄이 돌아 오면 이전에 있던 축사 자리에 새 집을 짓고, 사람들은 현대식 가옥에 서 살게 될 것 같다. 빈대떡같은 쇠똥더미들과 겨울철 햇살에 녹아진 눈자취가 드문드문 보이는 언덕위의 운동장에 접어 들었다. 겨울철에도 스러지지않는 수 풀들이 여기저기에서 두 어 뼘만큼 자라있었고, 나무판에 철조망이 엮 어진 경계선 바로 옆에 커다란 얼룩소가 서 있었다. 얼룩소의 엉덩이 쪽에는 까만 털이 보드라와 보이는 막대같은 것이 두 개 삐져나와 보였 다. 어떤 동물이건 새끼낳는 광경이 처음인 나에게, 얼떨떨한 신선함이 자신감을 보태주며 다가오는 듯 했다. "축사에서 낳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낳고 있는 거야?" "보통은 아녀. 허지만, 지금 옮기기는 힘들구먼. 그냥 여기서 낳야 혀." "이게 송아지 다리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그냥 다리쥐고 댕기면 되는디, 두 다리쥐고 댕기자니 음수가 새서 상당히 미끄럽구먼... 여기 목 장갑끼구 하나씩 댕기면 되것어." 눈이 녹아 질퍽한 땅위에 미끄러질 듯이 힘을 주며, 원모의 구령에 맞추어 당겼다. "음머어! 음머어! 음머어!" 표정으로 산모의 고통을 표현하지 못하는 엄마소의 유일한 호소가 이 어져 갈 때였다. "음머어! 음머어!" 애쓰는 엄마 소의 호소덕분인지 엎어놓은 사발같은 것을 시작으로 어 리둥절한 눈동자 두 개가 박혀있는 머리통이 미끌어져 나왔다. 아직도 깊숙이 박혀있는 송아지의 몸통을 당기며 엄마 소 밖으로 처음으로 드 러낸 아기 소의 눈동자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 았다. -저 물기어린 하얀 것들은 뭘까? 앞 발로 누르는 것인가 보다. 저 쪽에 보이는 초록색 바탕에 삐죽삐죽한 것은 또 뭐지? 그냥 보는 것일까? 아닐꺼야. 씹어서 새기면 도움이 되는 걸꺼야. 앗! 씹는 것 사이에 둥그렇게 덩어리져 있는 것은 엄마 배속에서 본 것도 같은데... 어떻게 사용하는 것 일까? 알겠다. 얼굴로 비비는 것인가 보다. 얼굴로 비비는 것 뒤에, 이리저리 연결되어 얽혀져 있는 길쭉길쭉한 것이 보이네. 왜 저 곳에다 연결해 놓았을까? 배고플때 빨면 뭐가 나오는 것인가 보다. 하지만, 찔리면 아프겠는 데... 어쨋든 겁난다.- 어리뚱하게 껌뻑이는 송아지의 눈동자에는 신세계에 대한 신비와 낯 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어우러져 보이는 듯 했다. 앞으로 이 아기 젖소에게 다가올 어렵다면 어렵다 할 수 있는 세상살이가 떠오르자, 웬 지 모르게 어설픈 안타까움도 스물거렸다. 힘껏 잡아당겨진 아기 젖소는 쑥 빠져나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쳐졌 다. "쿵!" 인간의 갓난아이 같으면 울부짖어도 한참을 울부짖었을 충격을 땅바 닥의 낯선 감촉 정도로 받아들이는 듯 하다. 이제 막 태어나와 축축하 게 젖어진 갓난젖소의 몸통에서는 아지랭이 같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 랐다. 송아지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은 원모와 나 뿐만이 아니었다. 운 동장에서 어슬렁 거리던 대부분의 젖소들이 어느새 다가와 할타주며 도 리질 해주고 있었다. 젖소들도 탄생의 축복을 나눌 줄 안다는 것이 신 기하게 여겨지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하얀 뭉게 구름, 일렁이는 파도의 옆 모습같은 초록색 봉우리들, 알록달록한 젖소들의 등, 그리고 아기 소의 아지랭이 는, 상상속에서만 존재할 것이라 여겼던 목장의 낭만 그대로를 맛보여 주고 있었다. 어린시절 색종이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날카롭게 다가오 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은은하게 번져오는 정(情)같은 아름다움이, 이 울지도 않고 벌써부터 일어서려고 비척거리는 아기소의 전신에서 피어 오르고 있었다. 점심을 끝내고 한가해진 겨울낮 이불속에서 창호지문에 매달린 둥그 런 쇠문고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기소의 까만 눈동자가 아른거렸고 가물거리는 의식이 아지랭이처럼 스러지고 있었다. -무선 전화기를 들고 낭랑한 목소리를 들었다. 용태였다. "부다베스트에서 황 변리사한테 연락이 왔어." 무겁게 깔리는 목소리는 나 자신이었다. "어떻게 되었니?" 숨을 고르던 목소리가 또박또박 말이 되어갔다. "우리가 신청한 주대천(주파수 대역 천이장치)가 국제특허를 받아냈 어." `주파수 대역 천이 장치`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대역을 들을 수 있는 영역으로 천이해 주기도 하고, 반대로 들을 수 있는 영역을 듣 지 못하는 주파수 대역으로 바꾸어 정보를 저장해 놓을 수 있는 장치였 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주파수 대역은 대략 20에서 20000헤르즈(HZ) 정도다. 우리가 듣고 있는 쥐나 새들의 지저귐은 사실상 그들의 저음부 일 뿐이고, 그들의 고음부는 인간의 가청주파수인 20000헤르즈를 웃돌 기 때문에 우리는 들을 수 없다. 개나 소등의 가축들이 만들어낸 음파 들도 우리의 주파수대역에서 상당한 부분이 벗어난다. 지구가 돌아가는 거대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유도 이런 까닭이다. '주대천'의 응용 범위는 대단히 넓을 것이다. 기차나 비행기의 소음 을 포함한 여러 잡음제거에 기여할 수도 있겠고, 이제 까지는 들을 수 없었던 음향들을 합성해 음악의 한 분야를 개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동물들과의 언어 소통마저 가능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고 여겨진 다. 하지만 대화하던 동물들을 잡아 먹어야 한다는 점을 되집어 보니, 이 대목은 좀 어색하다. 신기술의 개발은 긍정적인 면에 못지않게 부정적인 부산물들을 수반 해 왔다는 데에 사고가 뻗치자, 어쩐지 마냥 기뻐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좁은 머리로나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용태와 함께 기뻐 하기로 했다. "내일이 할아버님 제사니까, 마치고 올라갈께. 연구실에서 보자. 안 녀엉~" "때르릉! 때르릉! 때르릉!" 이건 좀 이상했다. 용태와 전화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때르릉`이라 니... 이 시골구석에서 통화대기 신청을 했을리도 없고,,, 게다가 어깨 어림이 붙잡혀져 흔들리고도 있었다. 아마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낮잠이 주는 입안의 텁텁함을 다시며 눈을 뜨자, 80을 바라보는 할머 니의 주름진 목소리가 재촉했다. "기석아! 그만 어여 일어나! 서울서 전화왔어." 조선 기와집 안에는 무선 전화기는 없었다. 비칠비칠 일어나 옆 방의 버튼식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귓 속에서 느껴지는 싹싹한 부드러움이 낮잠이 주는 텁텁함을 씻어 주는 듯 했다. 은주였다. 수출 경쟁의 최전선에서 청춘을 바치겠다는 고교시절의 순진한 꿈을 대학 시절의 은근한 자부로 연결짓는데 성공은 하였다. 이웃들에 이바 지한다는 공대인의 사명을 위해, 눈자위에 핏발을 세운 적도 없지 않은 대학시절이었다. 그러나, 스물 아홉살에 과부된 어머니와, 시도 때도 없이 쓰러지던 만성빈혈의 여동생, 세월따라 누적되는 빚더미, 이런 것들 사이로 이어 지는 생계를 위해서, 무엇보다 우선, 나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끝도없 는 과외질과 강사질을 해야만 했다. 한가할 수 없는 대학시절이었지만, 그 시절의 낭만 또한 바쁜 와중에 서도 챙겼다. 비록 중고차이긴 했어도 그 시절에는 흔치 않던 자가용족 이기도 했으니까... 자가용은, 정확히 황색 스텔라는, 몰래바이트(전 대통령 시절의 금지된 과외)의 행마(行馬)에서 시시때때로 이어지는 나 라시(불법 유임 승차)까지 생계의 도구로써, 분위기 좋은 연인들의 공 간에서부터 운우지정을 나누는 러브호텔까지 이어지는 낭만의 도구로 써, 제 구실을 충분히 해냈고, 잊을 수 없는 황색 스텔라였다. 아무리 어려운 순간일지라도 낭만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고 여겨진다. 대학시절을 생존과 학문 그리고 여자들에 짓눌려 보내고 졸업을 앞 둘 즈음,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덜나기 딱 좋은 50만원 짜리 봉급쟁이 질이었다. 턱 없이 오르는 물가와 아찔하게 치솟는 집 값은, 고교시절의 꿈이나 공대인의 사명 따위는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할 정 도로 나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18평짜리 전세 아파트에서 연명하는 세 식구였지만, 월 50만원으론 여동생 시집보낼 자신이 없었다. 대학시절 내내 단 하루의 일요일도 허락하지 않았던 과외질로 간신히 마무리한 빚더미를, 다시 이고지고 살기는 더더욱 싫었다. 신(新)기술개발로 무역장벽의 굴삭기들이 되고자 청춘을 같이 했던 동료들에게는 몹시 미안했지만, 나는 돈 많이 주는 다국적 기업으로 갔 다. 석유찾아 세계를 떠돌다가 월남 참전당시 실종되었던 아버지를 만 났고, 작지 않은 테러 주식회사의 우두머리라면 우두머리랄 수 있는 아 버지와의 어쩔 수 없는 인연이 나를 엘리트 전사(戰士)로 만들어 놓았 다. 게다가, 소속했던 다국적 기업의 엔지니어로 종사하던 중, 이라크 영내의 주요벙커 시설물을 설치했던 것이 모사드와 CIA의 관심을, 아니 관심이상을 사게 되었다. 이미 엘리트 전사로서의 교육까지 마쳤던 나 는 그들에게 지극한 대접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시작되고 사막의 폭풍작전이 일때까지, 5개월 여동안 모사드 아 카데미와 헤르질리아의 군부대에서 사람잡는 여러가지를 또 익히게 되 었다. 당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모사드와 CIA로서는 그들의 비장의 수 법들을 전수하는 데에 아낄 겨를이 없었고, 마지막 훈련장이던 헤르질 리아의 군부대에서 `섬타임 점 섬타임 샷(SOMETIMES JUMP SOMETIMES SHOT)'이란 해괴한 총쏘기를 끝낼 즈음, 테러와 대(對) 테러의 전문가 로서의 자격증(주:이런 세계에서는 인정(認定:ROCOGNITION)이란 단어대 신 자격증(資格證:CERTIFICATE OF PROFETIONAL QUALIFICATION)이란 어 휘로 찬사를 대신한다.)을 받았다. 그리고,쑥스럽지만, 모사드와 CIA 양 사(社)에서 동시에 자격증을 받은 사람은, 정말인지 모르겠지만, ` 나` 한 명밖에 없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 결과로, 같이 훈련 받던 이 스라엘 최고의 살인마들인 메트사의 키돈 대원 여섯 명과, 미군 최 정 예라는 101공수사단에서 차출된 고릴라떼들과 함께, 나는 후세인의 비 밀벙커속에, 나에게 찬사를 보냈던 사람들과 돈에 의해서, 떠밀려 들어 가야만 했다. 그곳의 지하터널을 휩쓸며 후세인을 찾다가 찾지는 못했 지만, 내가 설치했던 장비들을 포함해서,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시설물 들을 쓰레기로 만들어 놓고 나왔다. 이라크 전(戰)이 끝나고 다국적 기업의 엔지니어로서 무사(無事)하기 에 껄끄러워진 나는 이듬해 안전한 서울로의 귀향명령을 받았다. 되돌 아 온 나에게는, 세검정의 예쁜 2층짜리 빌라가 생겼고 세 가지 구별되 는 '나'가 존재하게 되었다.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무스대신 스트롱 제리를 묻칠때도 있다.) 선 고운 마이를 입는다. 주로 아래 위 단색으로 입는다. 검정색, 곤색, 회 색, 아이보리도 있다. 단색이 아닌 경우는 연초록 체크마이에 검정색 바지다. 와이셔츠는 목카라가 좁은 어두운 계통, 검정색, 곤색, 남색, 남보라색등의 실크만을 고수한다. 신발은 굽 낮은 검은 쎄무 단화를 신 는다. 이 때의 나는 오렌지이며, 대하는 사람들은 많은 여인들(대부분 아름다운 여인들이다. 20대초반의 여대생들이나, 모델, 스튜어디스, 연 예인도 없진 않다.)이며, 그들과 재미있게 논다. 하지만, 이때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나를 부러워하거나 욕하지 않는다. 나는 착 한 오렌지고, 언제나 신사이며 깔끔하다. 여인과 즐기되 탐하지 않으 며, 여인을 아끼되 욕심부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여인들은 부르면 나온다. 두 번째의 나는 소개하기 힘들다. 이해시킬 자신이 별로 없고 황당한 거짓말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소설처럼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면 만족하겠다. 메마른 감촉의 검정색 점프복을 입을 때는, 중동지 역이나 제 3세계의 어느 하늘에서 스카이 다이버가 될 경우다. `원 투 드리 포`를 헤아린 후에 등 쪽의 자동 우산이 펴지지 않으면, 난 앞 쪽 의 보조 낙하산을 까게 된다. 하지만 아직 손수 까 본적은 없다. 덜컥 제껴지는 어깨의 진동이 잡히면 잠시 펼쳐진 우산을 올려본다. `시거- 훨윈드(CIGAR-WHIRLWIND), 우리말로 담배-회오리로 해석 되어지나 보 다. 바람없는 맑은 하늘에서 유영하는 스카이 다이버들처럼 기상 봐 가 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깜깜한 하늘아래에서 이상기류에 대한 예보 없이 떨어지다 보면, 시거-훨윈드를 걱정하게 된다. 낙하산이 펼쳐지면 서 이상기류에 얽히면 낙하산 줄에 목이 날아가는 경우가 없진 않다고 한다. 깨끗한 목에 안도가 되면, 옆 구리에 걸린 우지 자동 소총을 내 려 보기도 한다. 착지후에, 공수된 박격포 우지가 어깨에 메어질 때가 간혹 있는데, 이 때의 `나` 또는 `우리`는 `사신(死神)'이다. 물론 두 번째의 `나`도 이런 무지막지한 출장만 나가는 것은 아니다. 착한 순경 아저씨처럼 어린아이를 찾으러 다닐 때도 있고, 강탈당한 돈이나 패물 들을 찾아다 주기도 한다. 하지만, 착한 경찰 아저씨보다는 나쁜 도둑 이나, 강도가 될 때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럴 때의 `나`의 모습 은 가지각색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두드러지지 않는 무난한 샐러리맨같 은 모습이지만, 약간 특별한 상황이 오면, 우리 어머니도 `나`를 보고 나를 알아볼 수 없다. 영화속의 킬러나 첩보원들이 조그만 슈트케이스 에서 여러가지를 끄집어 내어 변장을 하는 모습들을 종종 본다. 머리를 염색하고, 혹은 염색 대신 가발을 하고, 눈동자의 색깔을 바꾸기 위해 색깔있는 렌즈를 바꿔끼고, 얼굴을 색색이 칠하고 주름을 만들고, 안경 을 끼었다 벗었다 한다. 뭐 그정도의 변장이면 대부분의 낯익지 않은 사람들을 속일 수가 있다. 70년대의 첩보전에는 통할 만한 분장술이고 실제로 통하기도 했던 변장술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80년대 정보 화 사회이후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일에 종사하며 맞딱드리는 얼굴 들은 서로가 잘 아는 경우가 보통이고, 이런 변장술로 그 바닥에서 밥 먹는 사람들을 속이지는 못한다. 90년대의 분장은 변장이 아니고, 변신 이다. 말 그대로 몸 전체가 변해야 속일 수 있다. 눈동자 색깔 뿐만이 아니라 둥그런 눈을 째진 눈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고, 홀쭉한 볼따귀 를 두리뭉실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해야하며, 나이나 성별은 물론 체격이 나 신장이 눈에 띄게 커졌다 줄어졌다해야 하고, 얼굴 색등은 칠로 바 꾸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변해야 한다. 안면,나이, 성별, 체격이나 신 장을 바꾸는 것은 몇 가지 비품들(모발,접착제,특별히 고안된 의류나 신발등등)이 필요하고 착용 후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격렬한 춤을 자연스럽게 출 수 있다면 합격이다. 얼굴색은 조잡한 크레용 분칠대신 곰팡이를 이용해서 바꾼다. 체질에 맞는 적당한 곰팡 이를 희석시켜 혈액에 투여하고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 번 문지르면 한 두 시간동안 문질러진 부위의 색이 바뀐다. 곰팡이 종류에 따라 붉은 계통이나, 창백해 보이는 허연 계통으로 변해질 수도 있으며, 흙빛도 가능하다. 이런 곰팡이류의 혈액투여는 피부 알레르기를 응용한 것이 다. 이런 변신술이 필요할 때는 드물지만, 단 한 번의 필요를 위해서라 도 두번째의 `나`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다. 가끔씩 나 스스로가 질문을 던질 때가있다. 무엇때문에 두 번째의 `나`를 존속시키느냐고... 그럴 가치가 있느냐고... 대답하기 어렵고 하기 싫은 대답이지만 억지로 끄 집어 낸다면, 서양에는 로빈 훗이있고, 중국에는 소림사가 있으며, 일 본에는 미야모또 무사시의 전설이 있다. 하지만 조선땅에는 그들의 전 설에 자지러지는 독자들만 있다. 그래서 두 번째 `나`는 이 업을 포기 할 수가 없다. 피스톨 우지부터 박격포 우지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인간은 장담하지만, 이 땅에는 `나`하나다. 7-8장의 위조 패스포 트를 갖고 야마가따 사이찌란 가공의 인물이 될 수 있는 인간도 역시 ` 나`외엔 없을 것이며, 모사드에서 궁금해하고 CIA에서 사고 싶어 하는 마술같은 추적과 변신과 증발 또한 내가 이 업을 포기하면 사라져 버린 다. 이 땅에 누구에게도 지지않는 전설을 만들고 싶다. 근거없는 전설 은 전설이 될 수 없기에, 두 번째 `나`는 전쟁놀이가 있다면 마다할 수 없고, 끝까지 살아남아 `최후의 전사`가 되어 보려 한다. 세 번째 `나`를 소개하겠다. 뒷 머리에 착 달라붙은 감지 않은 머리 털은 윗 머리로 삐치고 더벅머리 스타일의 앞 머리카락도 자유분방하 다. 얼굴 생김새와 분위기는 머리털 다듬기가 반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여자들은 거의 없지만, 아는 남자는 별로없다. 알고도 지저분한 남자 가 세 번째의 `나`다. 허름한 잠바에 구겨진 셔츠, 일년내내 바뀌지않 는 헐렁한 국방색 체크바지, 너덜거리며 헤진 구겨진 갈색 아저씨 구 두,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나`중에서 가장 깔끔해 보이는 도수없는 금 테안경. 세 번째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어린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안방 아낙네들을 상대로 주머니 돈을 터는 `수학 과외 선생님`이다. 이 세 번째의 `나`역시 첫 번째 두 번째 `나`와 마찬가지로 되고싶어 된 `나`는 아니다. 첫 번째의 `나`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대학 시절 사랑했던 두 여인을 하늘의 이간질로 잃고 만 `허탈과 인생무상`때문이었고, `허탈과 인생무상`의 분풀이로 시작된 두 번째의 `나` 또한, `자포자기`의 산물이었다. 대학입학과 동 시에 시작된 세 번째의 `나`인 과외 선생 역시 `가난`이 만들어 준 것 이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저렇게 둘러대다 보니, `핑계 없는 무덤이 없 다`는 속담도 생각나고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라는 어구도 떠오른다. 되고 싶지 않았던 `나`라는 점에서 다른 `나`와 다를 것이 없는 `과외 선생`이지만, 고마웠던 `나`라는 점에서 다른 `나`와 구별 된다. 공대를 사랑했던 고교시절의 순수, 악전고투 하던 대학시절이었지만 언제나 은은히 간직하고 있던 공대인으로서의 자부 , 이런 것들이 지금 도 꿈속에서나마 주대천(주파수 대역 천이장치)이란 세계특허를 만들곤 한다. 돌이켜 보아도 나 자신 공대를 가장 좋아했고, 박봉에 쪼들리면 서도 첨단 기술의 최전선에서 이웃을 위해 봉사하겠다라는 공인(工人) 의 정신을 최고의 멋으로 지금까지 여기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돈에 팔려 지구촌 곳곳을 시꺼먼 천연가스나 찾으며 헤메 다닐때는, 대열에 서 이탈된 부품조각같은 소외감이 우리곤 했다. 세상에는 잘 깍여진 조각같은 명예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공대인에게는 그런 명예가 따라 붙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을 흘리고, 땀 방울이 맺은 열매는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지곤 한다. 그래도 슬쩍 한 번 웃어 주곤 남들이 보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또 땀을 흘린다. 그리고 박봉(博 俸)을 세며 만족한다. 그런 공인(工人)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읍습한 생존에 시달리며 생계의 수단에 허덕이던 가족들을 볼 때 되고 싶은 마음은 내가 가야할 현실에 가려져야 했다. 어떤 이는 날 보고 나약했었다고 조소할 지도 모른다. 내가 겪은 가난이 무어 그 리 대단하길래 그렇게 감동스러우리만치 사랑했던 공인의 길에서 벗어 낫느냐고 비웃을 지도 모른다. 맞다. 내가 겪은 가난이란 것은 별건 아 니었다. 나는 밥을 굶어본 적도 별로 없었다. 다만 국민학교 시절 다른 아이의 도시락 반찬에 계란부침된 쏘세지가 있는 것이 부러워서 어머니 에게 나도 쏘세지를 넣어달라고 한 적이 있을 뿐이고, 어머니는 매일은 넣어줄 수 없고, 금요일만 넣어 주겠다고 했으며, 금요일은 나도 쏘세 지 반찬을 싸 올 수 있다고 앞 뒤 내짝에게 자랑한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어쨋건, 대학시절 몰래바이트에서 부터 이어진 괴외선생이란 인연은 나에게는 고마운 것이었고, 쏘세지 반찬 때문이어서인지 어쩐지, 지금 도 내가 과외선생이란 것이, 맥이 빠질 때가 없진 않지만, 누구에게도 미안하지는 않다. "은주구나! 여행은 잘 갔다 왔니? 쿨럭!" 잠이 아직 덜깬 컬컬한 목소리가 좋지않게 느껴졌는지, 은주가 상냥 하게 물었다. "네. 잘 다녀왔어요. 아직도 목 아프세요? 그렇게 담배 좀 줄이시라 니까..." 이라크 전 이후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 난다.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민선생님 소개로 처음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잔뜩 돋은 여드름의 여고 1년생이 웃으며 반겼었다. 지금 은 여드름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겨울방학만 지나면 곧 고삼이 되어 입시준비에 연연하게 될 실질적인 여고 3년생이었다. "TV과외 좀 풀어놓고, 잘 안되면 답안지 보고 연구해 보고, 그래도 안되는 것만 체크해 놔. 모레 네시에 갈께. 그리고, 담배는 줄일께." "네. 헤헤." 영어를 가르치던 민 선생님으로부터 소개받은 은주네 집은 방배동에 서 서울 고등학교로 빠지는 도로 주변에 위치한 D빌라 104호 였다. 예 쁘게 지어진 빌라에는 커다랗고 깨끗한 거실 유리창 밖으로 잔디가 깔 려진 아담한 정원도 있었다. 두 시간짜리 수업사이에 갖는 담배 한 개 피의 망중한을 주로 이 정원을 바라보며 보낸다. 정면으로 모양새 좋은 향나무가 보이고 그 왼쪽으로 연못을 앞에 두었으면 더욱 운치있어 보 일듯한 단풍나무가 있다. 높고 튼튼해 보이는 붉은 담장의 모서리에는 감나무가 개나리들을 주위에 거느리고 서 있다. 주위의 담장 때문에 양분을 공급받지 못해서 감이 열리지 않는다며 안타깝게 설명해 주시던 은주의 어머니는 E대 생태학 교수님 되신다. 웃으실 때면 20대의 미모를 고스란히 보이시는 교수님은 Y대 의대 교수 님을 지아비로 모시고 있다. 간신히 30대를 졸업하신 은주 어머니는 엄 숙한 교수님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소녀같은 순진무구함을 흔하게 노 출시키는 분이었다. 2년 동안의 인연에서 발견한 교수님의 천진함은, 희노애락의 변화가 어김없이 드러나는 예쁜 얼굴에서도 발견되었고, 중 학교 1학년의 막내딸 윤주와의 토닥임에서도 잘 나타났으며, 부군이신 의대 교수님의 호출에 착한 어린이 목청뽑아 대답하듯 `네`하시며 다가 가시는 다정함에서도 잘 표현되었다. 여인다운 교수님을 아내로 둔 의대 교수님은 후리후리하신 건장함을 지닌 분으로 교수님 답지않게 갱영화를 자주 보셨다. 때릴 것 같은 씩 씩한 목소리와 동시에 지어지는 개구장이 같은 희죽임은 이상하게 어울 리곤 했다. 시원시원해 보이는 성격의 그 분은 딸 둘을 자녀로 두고 있 었다. 인연의 시작이 되었던 맏딸 은주는 이미 잘록해진 허리와 성숙한 앞 가슴이 부풀어 오른 속눈썹이 길고 눈이 큰 여학생이었다. 내 앞에서는 갸날프고 얌전한 목소리를 들려 주었으나, 교수님들 앞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동생 윤주를 가르칠 적에 문 밖에서 들려오는 남자다 운 여자 목소리의 주인공은 은주일 수 밖에 없었다. 흡연과 여러 학생 들을 지도하며 기진맥진 해진 편도선을 부드러운 눈으로 걱정해 주는 것도 은주였다. 그런 은주에게 이제껏 보아 왔던 어떤 학생들보다 정성 을 기울였던 것은 아마도 편애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윤주는 5년 터울의 언니와 두 분 교수님들 사이에서 자라 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웠다. 깜찍하고 어여쁘고 새침한 이 집 안의 막내딸은 은주를 가르치던 중 덤태기로 맡게 되었다. 20분 정도 가르치다 보면 시계로 눈이 가 있는 이 아가씨는 노래와 그림에는 소질 을 보였으나 수학을 괴로와 했다.애들같은 농담으로는 웃길 수 없는 나 이에 비해 성숙한 윤주였으나, 집에서 자신이 제일 많이 먹는다고 자랑 하는 어린애다움도 있었다. 재미없는 수학과 지루한 산수임에도 불구하 고, 열심히 따라주는 두 자매는 나로 하여금 노란 신호등에서 성급한 악세레다를 밟게 하곤 했으나, 빡빡한 스케줄과 빈틈없이 막히는 교통 체증은 미안한 초인종을 누르게 할 때가 많았다. 그에 못지 않게 나에게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어떤 부 부들보다도 잘 어울리는 두 교수님들이었다. 자신의 길을 꾸준하고 성 실하게 밟아 가시는 두 분은 그렇지 못한 나에게 언제나 동경이 되었 고, 조각난 자부에 대한 질책이 되곤 했다. 그러한 질책때문인지는 몰 라도,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아 쌈지돈에 가려져 있던, 전자공학도로서 의 구겨진 책임감이나마 펴 보일 기회를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칙칙하던 일상(日常)의 따위들을 비집고 터진 사건의 발단은, 아이들 겨울 방학이 시작된지 한 달 쯤 지난 1월 중순 어림의 살기 좋은 집의 윤주였다. "딩동! 딩동!" "누구세요?" 보통 은주의 목소리가 반겨 주었으나 오늘은 윤주였다. "수학 선생님이야." 현관으로 들어서 보니 거실쪽에 못 보던 것이 켜져 있었다. "왠 컴퓨터예요?" 소파에 앉아 계시던 은주 어머니에게 묻자 예의 팍 지어지는 웃음과 함께 어색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6년전에 구입한 IBM이었는데, 그 동안 쓰지 않다가 윤주 때문에 꺼 내 놓았어요. 유니콘의 만리안이라는 곳에서 아이들 교육 정보를 연결 해 준다기에..." "만리안의 교육 정보요? 기종은 XT예요? AT예요?" "XT였는데 오늘 AT로 바꿨어요. 안에다 부품 몇 개 갈아주고 30만원 받아가더라고요." "하드는 몇 메가예요?" "처음 살 때 20메가 였어요." 대충 얼버무리고 은주부터 가르쳤다. "선생님도 컴퓨터 잘 치신다고 하셨죠?" 언젠가 대학시절의 유닉스(대학내의 대형 컴퓨터)를 치면서 동기들과 장난했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반 PC(퍼스널 컴퓨 터)들과는 별로 인연이 없었다. 회사에서도 최소한 중형 이상급을 다루 었기 때문에 일반 PC에 자신을 내세울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으로서의 미련한 체면과 졸업한 곳에 대한 얼룩진 책임 감 같은 것이 발을 빼게 하지 못했다. "언제 시간나면 몇 가지 가르쳐 줄께. 숙제 다 했지." 고개를 지수그리고 살짝 옆 눈으로 훔치며 애교를 부리는 지연이었 다. "아뇨 다하지 못했어요?" "어째서?" "엄마가 만리안에 연결하시다 잘 안되니까 저 보고 같이 하자고 해 서..." "연결 하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숙제를 못해?" 억울하다는 듯이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는 은주였다. "한참 걸렸어요. 어떤 아저씨가 오셔서 AT로 바꿔놓고 가신다음, 설 명서 보고 엄마랑 같이 연결해 보니 잘 안되더라고요. 컴퓨터 바꾼 곳 에 연락하니까 어떤 언니가 왔는데..." "그런데?" "그 언니도 잘 못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연락했더니 어떤 아저 씨가 오셔서 설명서 보시면서 연결해 주셨어요." 갸웃거리던 나는 자신없이 말했다. "5분이면 할 수 있을텐데..." 얌전히 배우던 은주를 마치고 까불던 윤주를 끝냈다. 다음 집으로 향하는 막히는 차속에서 이런 저런 것들이 떠올랐다. 아 이들이 갖고 있는 선생님에 대한 신뢰며, 은근한 자부와 적지 않은 도 움을 주었던 학과를 배신해 가고 있는 나 자신이며, 박봉에 애쓰고 있 는 전 공대인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될 지도 모르는 PC에 대한 좁은 지 식등은 한 가지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은주와 윤주에게 컴퓨터를 가르 치기로 했다. 퍼스널 컴퓨터에 어색했던 나는, 386시장이 이미 수그러들고, 486이 작업실에 이미 설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AT(286)를 한 대 구입했 다. 은주와 윤주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PC에 대한 습득이 필 요했기 때문이었다. 온갖 전자 제품들이 쌓여있는 S전자 대리점을 찾았 을 때, 대리점 직원이 컴퓨터에 대해 아는체를 하며 떠 벌려 주었지만, 그가 아는 지식이란 것은 자사 제품의 설치와 도스의 몇 가지 명령어가 고작이란 것이 간간이 얼버무리는 그의 어투에서 느껴졌다. PC에 대해 자신 없는 나였지만, 다행히, 나는 PC를 가장 빠르고 정확 하게 배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설명서를 보고 전원하나 코드 하나를 스스로 꼽아가며 설치해 보고(고장이 나도 좋다. 산 직후에는 얼마든지 에프터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니까.) 기계에 대한 자신감을 배우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시작하고 빠져들면 두 어 달이면 일반인에게 컴퓨터가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혜택(대부분의 응용 소프트 웨어를 설치하고 사용할 수 있는 만족감)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굳이 AT를 구입한 이유는 나쁜 컴퓨터일 수록 하드웨어적이나 소프트 웨워적인 면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PC를 배운다는 것은 안되는 것을 되게하는 수법에의 탐험이었다. 3-4일의 몰 두 후에, 이전부터 들락거리던 천리안이란 통신망의 채팅실을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공개방보다, 키워드를 알아야 들어가는 비공개가 더 많았다. 조그마하게 일기 시작한 장난기와 AT분석의 기념으로 채팅실의 키워드 방 몇개를 뚫고 들어갔다. 내 장난에 열 받은 어떤 사내가 게시 판에 내 욕을 써 놓은 것이 약간의 인연이 있던 컴퓨터 문단 담당자에 게 보인 탓으로, 나는 경고장을 받기도 했다. 불쌍한 천리안에는 그것 하나 깔끔하게 해결 할 만한 인물이 없었나 보다. 어쨋든, 나는 몇 일 동안의 AT에 관한 참고 서적과 실습을 바탕으로 PC의 습득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과외가 없는 한가한 날에 살기 좋은 집을 찾아 갔다. 은주와 윤주를 위해 사운드 카드를 선물로 준비했다. 사운드 카드가 끼워지고 소프트 웨어를 복사하고 수행을 해보니 먹통 이었다. 뒷 뚜껑을 제끼고, 인터페이스에 꽂힌 사운드 카드를 도로 뽑 았다. 인터페이스에 꽂힌 여러 카드를 살펴보니 , MFM방식에 FDC(플로 피 디스크 컨트롤러:플로피 디스크를 꽂는 부위를 마더 보드와 연결해 주는 카드)와 HDC(하드 디스크 컨트롤러:하드 디스크와 마더 보드를 연 결해 주는 카드)가 따로 따로 꽂혀 있었다. 이런 경우는 사실 위험한 상태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켜 놓은 상태에서 인터페이스에 꽂힌 카 드가 흔들린다거나, 약간의 전압 불균일(220볼트와 110볼트를 동시 사 용하는 집에서는 전압이 일정하게 110볼트를 유지하지 못 하는 경우가 십중 팔구다.)에도 마더보드 전체가, 다시 말해서, 컴퓨터 자체가 못 쓰게 되어 버릴 수 있다. MFM방식에서 플로피와 하드를 마더보드에 연 결할 때는 HFDC단일 카드를 꽂아야 안전하다. 사운드 카드가 먹통이 된 것은 인터럽트 라인끼리의 충돌로 인한 과 부하 때문인 것으로 여겨졌고, 이런 경우에는 COM1-4포트를 재조정해 주면 되는데, 간단한 스위치 동작으로 바꿀 수 있는 경우가 있지만, 모 뎀카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카드는 내장되어 있는 고유의 점퍼(플라스틱 또는 고무로 쌓여진 전원 연결용 덮개)들을 바꿔끼며 인터럽트 라인 번 호를 서로가 잘 피해 가게 조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것을 정확히 조정한다는 것은 사실 일반인들은 어렵다. 만일 누군가가 컴퓨터를 구 입하고자 컴전문점을 찾는다면, 이 부분의 에프터를 확실히 해 줄 수 있는 에프터 요원이 있는 곳을 찾았으면 한다. 아마 용산 컴퓨터 랜드 에도 서 너 곳 이상은 찾기 어려우리라 짐작되지만, 그런 곳을 찾으라 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곳에는 진짜 컴전문가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 다. 따라서, 그런 곳을 수시로 드나들다 보면, 컴퓨터에 대한 많은 것 을 비교적 정확하고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살기 좋은 집의 AT컴퓨터를 다 뜯어내고, 새로 조립하며 은주에게 컴 퓨터 구조와 간단한 몇몇 가지의 소프트웨어를 다룰 수 있게 해주었고, 윤주에게는 몇 가지 오락과 그림 그리는 법과 만리안의 학습물 수신작 업 정도를 도와 주웠다. 그녀들은 사운드 카드에서 흘러나오는 가락에 실려진 노래로 나에게 보답해 주었다. 그녀들의 노랫가락은 과외선생으 로서의 보람이 되어 귀로 마음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2) 반포의 아가씨들... 한 주일에 사흘 정도의 저녁 시간을 수학으로 머리를 식히며 어린 학 생들과 노닥거릴 수 있는 즐거움은, 두 가지 연유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수학이란 학문이 갖고 있는 퀴즈적인 숨바꼭질인데, 나는 제 자들에게 문제를 풀어주며 가장 빠른 해법을 생각해 본다. 학문으로서 의 수학에는 물론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지만, 입시에는 도움이 되 는 경우가 있다. 물론 모든 문제에서 그러한 해법들이 발견 되지는 않 지만 때때로 나만의 교묘한 해법을 찾아날 때의 희열을 즐기곤 한다. 예를 들면, 다섯 쌍의 부부를 서로가 한 쌍도 짝이 맞지 않도록 파트 너를 정하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나? 라는 문제가 있다고 해보자. 수형 도를 그려도 어렵고, 순열이나 조합 따위를 떠올려도 쉽게 해결되지 않 는다. 이런 경우 간단하고 빠른 해법을 찾아날 때의 야릇한 쾌감이 일 때면, 유치한 만족감처럼 보여질 지 몰라도, 배우는 아이와 함께 기뻐 하곤 한다. 그리고, 발견된 특이한 기법을 입시생에게 설명해 준다. 한 쌍의 부부를 짝이 맞지 않도록 파트너를 정하는 방법은 없다. 고 로 0가지다. 두 쌍의 부부를 짝이 맞지 않도록 파트너를 정하는 방법은 한 가지다. 여기까지는 국민학생도 알 수 있다. 그 다음 세 쌍은, 한 쌍과 두 쌍에서 얻은 결과를 더해서 두 쌍이 의미하는 2를 곱해주면 된 다. 즉, (0+1)2=2가 된다. 네 쌍은, 두 쌍과 세 쌍의 결과를 더해서, 역시 네 쌍의 바로 앞 쌍, 즉, 세 쌍이 의미하는 3을 곱해주면 된다. (1+2)3=9 다섯 쌍의 경우도 구하는 방법이 동일하다. 세 쌍과 네 쌍의 결과를 더해서(2+9), 다섯 쌍의 바로 앞 쌍, 즉 네 쌍이 의미하는 4를 곱해 주 면 결과<(2+9)4=44>가 나온다. 여섯 쌍, 일곱 쌍, 백 쌍... 얼마든지 이어진다. 이런 해법이 아니라면, 10쌍 정도만 되어도, 초고교급 수학 실력을 갖춘 학생일지라도 제대로 해결 하려면 30분 이상의 복잡한 계산을 거 쳐야 가능한 문제다. 어찌해서 이런 해법이 나오는지에 대한 설명은 상 대가 1-3등급의 고교 3년생 정도 되어야 이해시키기가 가능하다. 따라 서, 평범한 제자에게 학문으로서의 도움을 주는 해법은 못 된다. 하지 만, 나올 수 있는 수학문제고, 알아두면 입시에는 도움이 될 지도 모르 는 해법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방법은 나외에도 다른 사람이 혹시 찾 아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껏 나에게 배운 학생들외에 이 방법 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난적이 없고 어떤 문제집의 해답집에서도 본 적 이 없다. 과외에서 얻어지는 두 번째의 즐거움은, 흔하게 접하는 것은 아니지 만, 제자들이 고마움을 표시할 때 느껴진다.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감사는, 말도 아니고, 선물도 아니지만, 그냥 와 닿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그들의 감사라고 확신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나는 착한 과외 선생이니까...` 과외질의 즐거움으로 한 사흘을 보내면, 한 주일의 나머지 하루 이틀 은 푸르죽죽한 해결사로서의 `나`의 업무로 보낸다. 두 어달에 한 번정 도 외지에서 날아오는 출장 명령이 떨어질 경우를 제외한다면,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정해진 일과는 없다. 그러나,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주위에는 나와 함께 팀웍을 이루는 동료들이 보통 여덟 명에서 열명 정도 있다. 그들 중 네 명은 레귤러고, 네 명은 아웃 사이더들이다. 서 른 살의 나는 어리지만, 미안하게도, 그들은 나에 의해서 움직여 진다. 정확히 설명 하자면, 네 명의 레귤러에게만 지시를 한다. 레귤러 네명 모두 내국인이 아니고 이방인 들이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의 호출에 두 시간안에 나와 접촉할 수 있는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두 명의 시니어 레귤러가 나에게 연락할 수 있고, 두 명의 주니어가 시 니어와 아웃 사이더를 연결한다. 아웃 사이더들은 고정 멤버가 아니고 수시로 바뀌며, 레귤러와 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 이 어디에 소속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보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 네 명의 아웃 사이더들 중 서양 남 녀 한쌍은 중동의 본사에서 고용해 서 보내주고, 내국인 남 녀 한쌍(혹은 두쌍) 정도가 아웃 사이더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되는데, 이들을 채용하고 관리하며 잔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두 명의 주니어가 맡고 있다. 내 동료들이 국내에서 해결사 노릇을 할 건덕지는 없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네 명의 레귤러가 국내에 머무는 이유는 나 때문이다. 나는 회 사의 차기 보스로서의 대우를 받고 있다. 아버지가 보스인 까닭인지, 나는 아버지를 제외한 레귤러들에 의해 차기 보스로 지명 되었다. 얼핏 들으면, 무슨 재벌 회사의 후계자처럼 좋은 팔자 타고 났다고 부러워 할 수도 있겠지만, 모르는 소리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차기 보스 대우 를 받은 사람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두 보스가 되기전에 세상에서 사라지거나 포기했다. 대부분의 일반 기업이나 조직들이 두뇌 플레이에 의해 움직여 지는 까닭에, 밉살스럽지 않은 잔머리를 잘 굴리다 보면, 꼭대기까지 올라가 서 호령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정당한 머리 다툼이고 혈연으로 물려 받은 자리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존경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총알 로 밥 먹을 때도 있는 테러 회사에서는, 혈연이나 안전지대에서 굴리는 머리만으로 떠오른 우두머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테러 집단의 차기 보스 대접이라는 것은, 무게 나가는 청탁을 선별해 서 비중있는 현장 출장을 책임지게 하는 것과 두 명의 노련한 시니어 레귤러를 붙여주는 것인데, 반길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괴롭기 그지 없는 것일 때가 많다. 비중있는 출장은, 대부분의 경우, 출장에 실린 무게만큼이나 다녀오 기 힘들어 지는 여정이다. 훗날이 애매해지는 곳에 가서 그곳 사람들이 대단히 싫어 하는 짓을 해야하고, 나올 때는 살살 도망나와야 하는 것 이 보통이다. 지저분한 귀로에서 달라 붙는 만만치 않은 모기들을 털고 출장을 끝내면, 현장에서 건진 실적만이 오로지가 되는 쌀쌀맞은 평가 로 마무리 지어 진다. 임무의 발자취들이 두드려 쌓아 놓은 실적의 가 치가 현재의 보스의 업적에 도달할 때까지 ,어려운 출장은 이어진다. 지구상에서 뻑쩍지근한 강도질을 조용하게 수행해낼 수 있는 테러 회사 라면, 그 회사의 우두머리는 반드시 이런 출장들을 겪어야만 하고 무사 해야 한다. 일반 기업의 조직원들은 머리나 근육으로 노동을 팔고 보수 를 받지만, 테러 회사의 종업원들은 목숨을 담보로 안전(安全)을 팔며 돈을 버는 경우가 없지 않다. 오래오래 버티며 살아 남는 기술을 제대 로 축척한 종업원들이라면, 혈연, 지연, 돈등을 무시하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생명을 저당잡힐 만한 전사의 발자취가 있는 회사를 찾아 온다. 그들이 다녀와야야 할 험로를 이미 거쳐온 전사의 경험 아 래 아니고서는, 아슬한 위험과 굵직한 돈의 흥정은 잘 이루어지지도 않 는다. 두 명의 시니어는 이곳에서 나에 의해 움직여 지고 있지만, 나의 과 외 선생 같은 사람들이다. 베셀은 이집트 출신으로 불어, 영어, 러시아 어, 히브리어까지, 구사할 수 있는 영리하고 침착한 40대다. 파아잘은 사막의 베두윈 족 출신인데, 인정 받는 저격수로서 말이 없는 대신에 웃음만 헤프다. 후세인 벙커 침투당시에는 내 백(back)을 맡아주기도 했었다. 두 시니어 모두 아버지와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 다. 월남에서 포로가 되었던 아버지는 당시 월맹의 군사고문으로 와 있 던 북한의 남 정우와 인연이 닿아, 사회주의로의 귀순영웅 대접을 받으 며, 월남전의 경험위에 북한의 특수 8군단의 전술을 추가했다. 그 후, 중동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등지에서, 북한의 테러 수출 업무를 현장 담당했다. 각 지역의 훈련소에서 많은 테러 단체들의 요원을 훈련시켰 고, 그 와중에 베셀과 파아잘을 만났다. 그 후 고르바쵸프 저격미수건 으로 북한과 인연이 멀어진 아버지는, 친분이 두터운 동료들과 함께, 80년대에 들어서며 동 서간의 해빙 무드에 흩어지고 있던 몇몇 테러단 체들을 흡수했다. 베셀과 파아잘은 아버지의 중동 진출에 많은 기여를 했고 경험도 많은 터라, 나는 그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고 여러 가지를 배우는 입장이다. 하지만, 내가 상전인 것은 사실이다. 나는 베셀과 파아잘이, 번갈아 가며 따끈따끈하게 가져 오는 세계 이 곳 저곳의 정치 경제적 불협화음과 이에 대한 분석을 읽는다. 여러 자 료를 읽고 나면, 베셀과 파아잘에게 내가 관심있는 자료에 대한 추가 정보를 가능할 때까지 요구한다. 그 다음에는, 어느 곳에 누구에게, 물 리적이나 인간적인 강제력이 사용될 수 있을지를 혼자서 찾아보고, 그 들에게 작업경로를 지시하며 얻어지는 가치등에 대한 결과를 설명한다. 물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단지 미래를 대비하는 훈련의 일 종인 `학습`일 뿐이다. 두 시니어는 내 해답에 동그라미를 보태주기도 하고, 엑스를 치기도 한다. 나는 아직 보스가 아니고, 그들은 나의 과 외선생이니까... 내가 무엇을 어떻게 공부 하는지 이 나라를 배경으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한씨는 많은 외국 생활을 했고, 여러나라의 많은 인사와 안면이 넓 으며, 통치권의 인사들과도 인간적인 유대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낙하산 인사라도, 외무부 장관이 될 자격 이 있다고 통치권에서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 홍씨는 총각 시절부터 외무부에서 뼈가 굵어 지고 살이 붙은 사람이 다. 그는 많은 나라의 대사를 역임했고, 전(全) 전대통령 랑군 테러에 서 살아 돌아온 몇 안되는 인사중의 한 명이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의 아파트(주:러시아의 우리나라 대사관이 아파트였음)에서 대사임무를 수 행하고 나서 외무부 차관이 되었다.- 위의 자료에 내가 관심을 가졌다고 치자, 그리고 지금부터 가상의 스 토리를 이야기 하겠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위 자료를 바탕으로 이 야기를 하면서 알 만한 사람을 내가 거론하더라도, 아래에서 거론 될 사건에서의 역할은 실제가 아니다. 단지 지어낸 이야기임을 밝혀둔다. 이 예속에서 나의 위치는 북한의 대남 공작원 정도로 맞추겠다. 공작 목표는, 외무부 장관이나 차관중 한 명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 록, 남한의 통치권에 접근해 있는 한 로비스트를 키워주는 것으로 하고 줄거리를 잡겠다. 나는 베셀과 파아잘에게 추가 정보를 요구했고 관심있는 정보를 뽑아 냈다. -외무부 장관 한씨와 차관 홍씨 모두가, 좋은 말로 하면 소신을 굽히 지 않는 형이고, 나쁜 말로 표현하면 고집이 세다. 낙하산 인사인 탓에 장관 한씨는, 외무부에서 뼈가 굵고 살이 붙은 홍씨에 비해 외교적인 실무에 다소 경험이 떨어지고 나이도 홍차관 보 다 아래다. 그러나, 외무부 밖의 대외적인 고려에 있어 통치권의 인정 을 받은 듯 하다. 차관 홍씨의 외무부내에서의 위상이 장관 한씨의 위 상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는 관계로, 차관 홍씨와의 정책 현안에 대 한 이견이 부담스러울 때가 한 장관에게 종종 있었다. 차관 홍씨의 외무부내에서의 업무 능력은 안정적이라고 평가받고 있 으며, 세간에 청렴하다고 매스콤에서 입질을 한 적이 있다. 고지식하리 만치 사생활이 깔끔하며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다. 홍씨의 딸이 말단 판 사 김군과 약혼을 했다가 파혼을 한 적이 있다. 파혼은, 사위될 판사와 판사의 친구들이 과분한 함을 지고와 지나친 요란함을 떨다가, 차관 홍 씨의 고지식한 청렴성에 부딪쳐 발발했다.- 포섭 대상은 장관 한씨다. 이유는 홍씨보다는 한씨가 유연성이 있다 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해도 고집스러운 청렴함 에서는 공무를 빼돌리기 어렵다는 점이 홍씨를 포기한 이유다. 이제부 터 나는 공작지시를 내린다. 이미, 장관 한씨와 통치권의 귀에 싫증나게 들어간 차관 홍씨의 청렴 성을 다시 장관 주위에서 부각 시킴으로써, 장관 한씨로 하여금 그렇지 않아도 부담스러운 차관 홍씨를 더욱 부담스럽게 만든다. 그 결과로 차관의 위상에 더욱 왜소해진 장관 한씨는 장관의 권위를 찾고자 차관 홍씨와의 이견에 더욱 공격적이 되어가고, 고지식한 차관 은 별로 양보하지 않는다. 차관에 비해 통치권과 가까운 장관은 통치권 에 차관의 불편함을 토로하기 시작한다. 남한의 통치권에 접근해 있는 북쪽이 이용할 수 있는 로비스트가 장 관 한씨에게 접근한다. 외무부내에서 장관 한씨의 독주하고 싶은 심정 에 긍정을 표하고, 차관 한씨의 청렴을 장관 한씨를 밟고 올라서려는 위선정도로 슬그머니 매도도 해준다. 그리고 조그마한 꼬투리로 도움을 암시한다. 로비스트의 로비는 차관 한씨의 사위가 될 뻔한 말단 판사 김군에서 시작한다. 사용가능한 압력으로, 김 군을 구석진 지방판사로 전출시켜 버린다. 주위에 입방아를 돌릴만한 귀를 찾아 다니며, 지방으로 날려간 말단판사 김 군과 차관 한씨와의 관계를 가벼운 농담조로 흘린다. 통치권에도 청렴을 시기하는 사람이 없진 않겠고, 통치권과 가까운 한 장관의 불편한 토로는 적당한 핑계로 차관을 경질시켜 버릴 수도 있 을 것 같으며, 나의 학습은 끝났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애국자라고 자처할 자신은 없지만, 매국노 는 아니라고 장담한다. 중동의 본사 역시, 남 북한이 개입된 청부에 관 해서는 불문율처럼 피해간다. 앞에서, 떠든 예제를 베셀이나 파아잘이 본다면 보나마나 엑스를 주고 말겠지만, 예제를 통해 내가 주절거리고 싶었던 것은, `시기하는 자는 영웅이 될 수 없고, 지나치게 깨끗한 물 에는 고기가 모여들지 않는다.`였다. 이런 저런 정보들의 분석과 두 시니어들과의 토론으로 일주일의 하루 를 보낸다. 팀웍을 다지는 모의훈련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실시될 때와 현장 출창이 떨어질 때를 제외하면, 이제 나는 자유다. 혼자남은 나는 습관대로 오전에 잠을 자고, 오후에 추억을 찾아 떠돌며, 해가 완전히 떨어질 적엔 새벽까지 오렌지가 된다. 저물어 가는 1월의 끄트머리에서 시름 거리는 빗줄기들이, 손바닥에 쓸려지는 어린아이의 장난감들 처럼 앞 유리의 윈도우 브러쉬에 밀려지 고 있었다. 검정색 에스페로가 인하대 정문을 거치자, 오른쪽으로 하늘 색의 대한항공 여객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여객기 뒤편의 건물의 5층에 는 항공 운항과 과사무실이 있을 것이고, 아마도 인상이 뾰족한 엄조교 와 아르바이트 과순이가 한 둘 정도 있을 것 같았다. 건물 옆의 주차 공간에 차를 세우고 안개처럼 뿌우연 겨울비 속에서 한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검정색 가죽잠바 위에서 동그랗게 말려지며 흘러 내리는 빗 방울들이 곤색 바지와 검은 쎄무단화까지 축축함을 이어주고 있었으나, 시선은 보잉 747에 매여져 굳어지고 있었다. 흐릿한 물연기 속에서도 깨끗한 고유의 빛깔을 늠름하게 보여주고 있는 창공의 여객선 이었지만, 마음 속으로 젖어드는 보잉 747은 우아한 하늘색 마차가 아니었고, 우울한 악마의 눈물속에 잠겨있는 녹슨 배였다. 대학 시절 사랑을 함께 했던 여인들이 있었다. 두 여인 중 영숙은 선 배의 아내가 되었고, 현주는 그녀가 기도하던 천주님에게 빼앗겼다. 이 제는 만져볼 수 없는 그녀들이지만, 그녀들과 나눈 사랑은 가슴속에서 화석처럼 쌓여져 마음으로 굳어져 버렸고, 그 마음은 외로움에 지지 않 는 힘줄이 되었다. 영숙과 다하지 못했던 사랑은 하늘의 이간질 탓으로 돌리면 변명이 될 수 있는 것이겠지만, 현주는 무정(無情)한 오해로 잃고 말았다. 스 물 네 살 시절의 스물 두살 아내였던 현주에게, 나는 한(恨)이 된 지난 날의 빚을 갚을 길이 없다. 그저 그녀의 흔적을 더듬어 보면서 우울한 시간을 적실 따름이었다. 저 녹슨 배안에서 현주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그려 진다. -커튼이 쳐져있는 갤리(비행기 안의 주방)안에서 돌아가는 오븐에 고 기를 굽고, 서비스 할 와인을 차갑게 하고, 음료수를 준비한다. 탑 시 니어 언니의 매서운 텃세에 움찔거리다 쥬스를 쏟고, 음식이 준비된 밀 카트(음식 운반 수레)속에서, 떨어뜨린 와인 오프너를 찾아 허둥거린 다. 매끈한 종아리 위의 여리여리한 몸으로 가득 채워진 카트를 밀고, 깔 끔한 미소를 승객들에게 선사하며, 자신의 서비스 코스를 한 차례돌아 허리를 편다. 검정 구두는 편안한 균형이 잡히고, 목에 붙은 리본이 샤 넬라인의 제복 위에서 붉고 푸르고 하얀 나비가 되었다. 천사의 날개처 럼...- "질퍽!" "질퍽, 질퍽!" 질퍽 거리는 물길을 밟는 소리에 머리속에 그리던 그림이 깨졌다. 엄 조교와 과순이로 보여지는 젊은 여자 둘이 우산을 나란히 하고 건물 쪽 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항공운항과 과사무실의 문이 닫혀진 모양이 다. 3층의 커다란 거울 앞에서 머리를 털고 젖어 있는 옷들을 매만졌다. 5층의 잠겨진 항공운항과 과사무실의 손잡이를 살폈다. 파이프 렌치는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꺽쇠를 꺼내 구멍의 밋밋한 윗 부분 에 찔러놓고, 이쑤시개 굵기의 굵은 철사에 오돌도돌한 홈들이 불규칙 한 이빨처럼 붙어 있는 쏘시개들 몇 개를 꺼내, 열쇠 구멍에 어울릴 만 한 것을 골라냈다. 조그만 모터와 밧데리가 내장된 손잡이 부위의 암나 사에 쏘시개를 돌려 넣고, 오른 손으로 스위치를 눌렀다. "스르륵, 스르륵," 시계 바늘 돌아가는 정도의 소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철컥, 철컥... 쩔그럭, 틱!" 왼손으로 사무실의 손잡이를 몇 번 돌리자, 열쇠 구멍에 맞춰져 돌아 가던 쏘시개가 손 안에 반가운 감촉을 선사해 주었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다시 잠그고, 사무실을 돌아 보았다. 캐비넷과 책상 서랍 몇 개가 더 잠겨져 있었지만, 열어 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몇 권의 졸업앨범들과 재학생 주소록을 뒤적이면서, 몇몇 알던 얼굴들 도 사진으로 만났지만, 그들보다는 현주들이 관심이었다. 현주들이 나 올 때는 그녀들의 얼굴을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집중을 했고, 인적 사 항들을 메모했다. A, B, C반의 모든 현주들(89학번의 D반에도 있었 다.), 31명의 주소와 전화번호, 본적, 가족사항, 주민등록번호, 학번등 을 주머니 안에 접어 넣었다. 92학번 A반의 현주가 현주처럼 돋보였고, 같은 학번 B반의 현주도 비슷했다. 두 현주의 성은 달랐다. 시간이 허락하는 날이면, 나는 주머니 속의 현주들을 하나하나 헤메 게 될 것이고, 그녀들 중 현주다운 현주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후 에, 우연한 기회가 닿아서 몇몇 현주들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나를 만났다는 것을 눈치챌 기회가 온다면, 나를 용서하기 바란다. 그녀들이 만나게 될 나는 착한 학생이나, 항공사 직원일 수도 있고, 그녀들이 살 고 있는 아파트의 수위일 수도 있으며, 실속없는 제비일 수도 있겠다. 나는 스쳐지나 가는 많은 인간들중에 한 사람정도로 그녀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겠지만, 그 와중에, 나에게 그녀들의 산타크로스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성실하게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어쨋든, 나는 현주다운 현주를 찾아 보겠다. 젖은 몸을 푸근한 식사로 말리기 위해, 인하대 후문의 `릴케`라는 까 페로 들어갔다. 3층의 유리창 가에서는 아직도 주룩거리는 빗줄기들이 부딪치고 있었다. `노이즈`의 가락들이 분위기와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앞 쪽의 테이블에서 까불거리는 두 아가씨들의 작지 않은 말소리들이 흥미있게 파고들어 왔다. "과사무실에 있던 남자가 누군데 그렇게 딱딱거리니?" "글쎄! 교수같지는 않던데, 조교쯤 되겠지. 뭐!" 두런 거리는 입방아 쪽을 돌아보니, 손등에 반창고를 붙인 아가씨가 이야기 하는 모습이 들어온다. "언제 봤다고 보자마자 반말을 찍찍해대구, 당나귀 같이 생겨 가지구 서..." 긴 머리의 입술도 움직였다. "나한테도 그러던데... 나이가 좀 들어 보이니까, 이해해야지. 근데 너 손 덴데는 다 났니?" "응! 거의 다 났어. 이것 때문에 면접할 때, 얼마나 조마조마했다 구..." "에이 그 정도 가지구..." "그래두, 치마 입고 면접 받는 것도, 종아리에 흉터있나 보기 위해서 라던데..." 그녀들의 오가는 말 속에서, 3월이면 항공 운항과 93학번이 될 신입 생들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어리어리한 말투와 빗나가지 않은 차림새가 순수하고 귀여웠다. 오렌지 나라의 기사보다는 착한 오빠 정도로 남아 야 할 만남이라고 여겨졌다. 슬그머니 다가온 청바지 차림의 웨이터가 주문한 식사를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튀겨진 고깃덩이 에서 하얀 김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고기를 썰고 씹으며, 그녀들과 접촉할 방법으로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긴 머리의 말소리를 시작으로 기회가 잡히고 있는 듯 했다. "겨울에 왠 비니? 청승맞게..." 유리창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긴 머리의 눈동자에 잠시나마 눈을 맞추 는데 성공했다. 조금씩 힐끔거리는 긴 머리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맞 받으며, 간간히 기분 좋은 웃음도 선사했다. 고기를 씹을 때는, 한 입 에 커다랗게 넣고 우걱거리며 정력적인 양 볼의 움직임으로 계속 시선 을 유도했다. 그리고, 간단한 미소와 함께 태연하게 말을 붙였다. 존대 말로... "항공운항과 신입생들이신가 봐요?" "......" 잠시 대답에 머뭇거리던 두 아가씨에게 무시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 해, 연속헤서 질문을 던졌다. "엄조교가 좀 딱딱하긴 해도, 보기와 다르게 인정은 많아요. 성실하 고... 근데, 항공 운항과 신입생 맞죠?" `엄조교` 운운하는 것에 낯 가리던 벽이 무너졌는지, 긴 머리가 냉큼 대답했다. "네. 맞는데요. 그런데, 엄조교가 누구예요?" "아까, 아가씨가 당나귀처럼 생겼다던..." 긴 머리가, 약간 억울해진 어조로, 반창고에게 눈길을 던지며 은근슬 쩍 물었다. "내가 그랬니?" 긴 머리의 시선이 보채는 억울함을 모른체하며, 반창고도 대화에 참 여했다. "과사무실에서 사무 보시던 남자분이 엄조교님이세요?" `엄 조교`인지 `임 조교`인지 헷 갈리기도 하고 관심도 없었지만, 중 요한 것은 지금은 아는체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두 아가씨 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일테고... 긴 머리의 이름은 희성이었고, 반창고의 이름은 교임이었다. 둘 다 집이 서울이어서, 검정 에스페로에는 세 사람이 타고 올 수 있었다. 서 울로 올라오는 경인 고속도로상에서 희성에게 전화번호를 묻자, 맞춰 보라는 희성과 숫자 맞추기를 했다. "이제 마지막 자리만 남았네. 마지막 숫자를 생각해." "생각 했어요." "그 숫자에 둘을 더해." "더했어요." "셋을 또 더해." "더했어요." " 다섯을 또 더해." "더했어요." "십 삼을 빼." "뺐어요." "남은 수가 얼마지?" "삼이요." "그럼 전화번호 끝자리 숫자는 육이네." 전화번호의 마지막자리까지 모두 맞추자, 희성과 교임이 탄성을 지르 며 물어왔다. "앗! 맞아요." "어머! 어떻게 맞추는 거예요? 속임수죠? 제 것도 맞춰 보세요." 이번에는 교임의 전화번호 맞추기였다. "첫 자리를 생각해." "생각했어요." "하나를 더해." "더했어요." "셋을 빼." "뺏어요." "십 칠을을 더해." "잠깐! 볼펜 좀 꺼내고요. 더했어요." "구를 빼." "뺏어요." "하나를 또 더해." "더했어요." "남은 수가 얼마지?" "십 사요." "전화 번호 첫 자리는 칠이네." "어머! 맞아요." 아둔한 딸네미들을 자식으로 둔 부모를 걱정하며 희성과 교임의 전화 번호들을 암기했다. 현주들 사이를 헤집자면, 도움이 될 만한 인연이 고 암기였다. 주소가 바뀐 여덟 명의 현주들은, 주민등록 번호와 본적지 조회와 간 단한 사기등으로 연락처를 다시 적었다. 시집 간 열 명의 현주들은 이 미 믿음직한 보호자들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어 제외했다. 세 현주들이 놀고 있었고, 두 현주들이 전공과 무관한 일에 종사중이었으며, 여덟 명의 현주들이 항공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재학중인 현주들이 일곱으 로 꽤 많았다. 92학번에, 오, 김, 이, 최 현주가 있었고, 93학번에, 윤, 김, 박 현주들이 있었다. 현주들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들을 수집하는데, 아웃 사이더들이 도움 을 주었고, 자료가 보여주는 그녀들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나의 주관적 인 것이었다. 나는 현주다운 현주를 찾고 있을 뿐이었다. 찾아서, 무 엇을 어떻게 하려는지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여러 현주들의 처한 상황들이 수집 되어 지다 보면, 흔하지는 않았지 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현주들이 없진 않았고, 가끔씩 도와주게도 되었다. 산타크로스가 되었던 것은 내가 착해서도 아니었고, 남 일에 끼어들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지난 날의 현주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라고 변명한다면, 나 자신이 너무 치사하게만 느껴진다. 따라서, 그것 도 이유가 될 수 없는 것 같다. 그녀들의 프라이 버시에 대한 침해가 미안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잠시 다시 생각해 보면, 남의 프 라이 버시를 침해했다고 해서 가슴 아파 하는 선량한 사람과, 나와는 거리가 한참이다. 따라서, 프라이 버시 운운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 았다. 그래서, 그냥, `그녀들이 예뻐서...`에 갖다 붙이니, 마음이 편 해졌다. 그녀들과의 관계에 있어, 내가 노출된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들킨 경우도 없진 않았다. 내가 현주들을 도운 것들은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었고, 사실, 불필요 했던 것들도 적지 않았다. 또, 사람을 돕다 보면,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다행스러운 것은 현주들에게 는 피해를 입힌 적이 없었다고 여겨진다. 대신, 그녀의 동료나 친구들 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힌 적이 왕왕 있었다. 그들에게는 정말 미 안하다. 그녀들의 너짢은 기분을 약간이나마 덜어 주기 위한 시도로, 공개해도 될 만한 경험을 들어 보겠다. -외국 항공사에 근무하던 30살 짜리 노처녀 현주는 홍콩에 거주하면 서, 독일인과 사랑에 빠졌었다. 34살 짜리 독일인 역시 홍콩에 거주 하 면서, 가방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현주양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성실한 교육열이 자랑인 그의 집안을 살펴 보니, 큰 형이 소설 가였고, 둘 째가 변호사였으며, 그가 막내였다. 현주양의 어려움은, 막 내의 부모님들이었다. 서구인 답지 않게 완고했던 서양 시댁 사람들이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명동에 있는 모 호텔에서 현주양의 친지들(주로 시골 어른들)과 약혼식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희희낙락했다. 여기서, 내가 개입했던 부분은, 그의 소설가 형이었고, 노처녀 현주 양을 따라다니던 안동 권(權)이라는 성(姓)씨 였다. 그녀의 자료를 접 했을 때, 족보 따지는 독일인의 전통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갸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관심을 갖고 골몰할 수 있었고, 현주양의 집안 쪽을 두루두루 살펴 보던 중, 도와 줄 꼬투리를 건질 수 있었다. 현주 양의 족보, 그러니까, 안동 권씨의 지류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신라시대의 왕족이 된다는 것을 나는 찾고야 말았고, 간접적인 경로로, 독일인 소 설가에게 짤막한 독일어와 몇 가지 자료를 슬며시 흘려 넣을 수 있었 다. `안동 권(權)씨는 코리아의 옛 왕국, 고대 신라의 로열 패밀리`라 는...- 지어낸 이야기 같겠지만, 실화다. 마티아스라는 이름의 독일인 남편 과 안동 권(權)이란 성을 갖고 있는 한국인 부인은, 세계에서 가장 아 름다운 섬 중의 하나인 모리셔스 섬으로 신혼 여행을 다녀왔고, 유부녀 가 된 이 여인은 지금도 홍콩의 영국 CPA 항공(CATHAY PACIFIC AIR)에 근무하고 있다. 단, 지금은 비행기를 타지는 않는다. 교육을 맡는 사무 장으로 출세했기 때문이다. 이런 류(類)의 일들을 나나 내 동료들이 장난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긴급한 출장이 없을 시라도, 열 명의 동료와 나는 언제라도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매끄러운 팀웍을 점검해 두어야 하고, 이런 점검이 우리들의 모의 훈련이며, 이 모의 훈련을 이곳의 책임자인 내가 `현주 찾기`에 가끔 적용시키고 있을 뿐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실행되는 모의 훈련이 두, 어 차례 흘러 갔을 때까지, 나는 내가 촛점을 기울일 만한 현주를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새로운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현주는 있었다. 이제 신입생 때를 벗은 항공운항과의 93학번 박 현주였다. 재수를 경 험했고 반포의 아파트에 산다는 점과,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또 다른 항공운항과 친구, 정은이가 살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짧은 치 마가 잘 어울린다는 점이 지난날의 현주와 비슷했다. 그녀에게 처음 접근하기 위해, 약간의 출혈을 했었다. 오토바이를 몰면서, 그녀 앞에서 자빠지며, 복사뼈 부위의 살갖을 조금 긁힌 적이 있었다.. 물론, 내가 넘어진 이유가 그녀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였다고,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압구정 현대 백화점 맞은 편의 `자자`라는 커피 전문점은 압구정의 정통파 노는 물이 흐르는 길목은 아니었지만, 백화점 맞은 편이란 위치 가 한 몫을 해서인지, 서빙하는 아가씨들과 꼬여드는 남녀들의 꼬고앉 은 자세들에서, 그럭 저럭한 개성들이 감지되고 있었다. 입구에, 청바 지 하나와 짧은 치마 둘이 나타나자, 그저 그렇던 물은 순식간에 좋은 물로 바뀌어 졌다. "오빠! 미안!, 오래 기다렸어?" 밥풀떼기 선그라스로 눈을 가린 치마는 옆 자리로 앉았고, 맞은 편으 로 앉는 치마는 정은이었다. 들어와서도 바쁜 청바지, 성미는 손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반포에서 여기 오는데도, 사십분이 걸리지 뭐야!" 말로만 미안해 하고 있는 현주를, 예의 바르고 약삭빠른 정은이가 도 왔다. "저 때문에 늦었어요. 저희 집에서 같이 나오는데, 어머니가 은행에 심부름을 시켜서..." 잔잔하게 담배 피던 내 모습이 그녀들에게 부담으로 남지 않도록, 나 도 웃으며, 그녀들 편이 되었다. "막히는 길에 삼십 분 늦는거야 기본이잖아. 신경 쓰지 마. 씁쓸한 그림들로 맛 없던 커피였는데, 그래도 너 네들을 보니까, 물 맛이 달콤 해진다. 짭짭! 아 맛있다." "깔깔! 나두 마셔 봐야지." "호호호! 왠 물 맛! 오빠! 나 눈 어때?" 염색대신 미장원의 손질로 머리 색깔에 노리끼리한 개성까지 넣고 다 니는 현주가, 선그라스를 내리며 얼굴을 들이 밀었다.. 기본으로 넘어 가 주면 되는 쌍꺼플 수술이었다. "부기가 깔끔하게 빠졌네. 이쁜데..." 현주를 처음 만났을 당시, 오토바이에서 자빠진 채로, 허탈하게 웃으 며 그녀에게 건넨 첫 마디가, `쌍꺼플 없는 미인을 만나서 반갑군요. '였다. 그녀를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녀가 함께 가자고 해서 따라간 곳 이 `자자` 뒤 쪽의 `민 승철 정형외과`였다. 나는 병원 복도에서 여성 지를 읽었고, 읽기를 끝낸 내가 해야 할 일은 부축이었다. 반창고와 선 그라스에 두 눈이 겹겹이 가려진 말릴 수 없는 아가씨를... "정말 이뻐?" "정말 이뻐." "진짜?" "진짜루 예뻐. 여자들 째진 곳은 다 예쁘잖아..." "킥킥킥! 뭐라구요!" "이런! 다른데는 안 예뻐?" "거기만 예쁘면 다 예쁜거야. 넘어 가자." 째진 곳에 대한 다짐을 해 주자, 얼굴 뜯어 먹고 사는 스무살 아가씨 들 이어서인지, 이번에는, 날렵한 콧날들에 시비를 걸고 있었다. "나 코도 해야할까 봐. 정은아! 성미 어디서 했다고 했지." "잘 기억안나? 성미 오네. 물어 봐." 때마침 화장실에서 돌아온 성미가 끼어들었다. "뭘 물어 본다구?" "너 코 어디서 했어?" 현주의 궁금증에 똘똘말린 코 끝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성미가 대답 했다. "울 엄마 친구 소개로 했어. 신사동에 있는... 근데 왜?" "나도 할까해서..." 청바지의 성미도 두 치마들과 항공 운항과 동기였지만, 현주의 고등 학교 후배였다. 그래서인지, 치마들에게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도 모을려구?" "아니. 난 약간 매부리기가 있잖니. 그거나 좀 어떻게 해 볼려구." "그럼 거기서 하지 마. 나 한 곳은, 코 끝에 동그랗게 살 모아주는 것만 잘하지, 딴 건 잘 못한데..." 세 아가씨들 중 가장 날씬한 콧날의 주인인 정은이도, 얼굴에 남들 대 본 칼 못 댄 것이 부끄러운지, 뒤졌다고 여겨지는지, 거침없이 동참 하고 나왔다. "난! 어딜 만지면 좋겠니? 약간 더 세울까? 오빠! 전 어딜 고치면 좋 겠어요?" 성형 외과 의사에게 돈 못 갖다 주는 것이 고민인 세 아가씨들에게 서, 두꺼운 담배똥 부러워하는 소년원 아이들이 떠올랐지만, 나도 만난 지 얼마 안되는 처지 인지라, 눈치를 보아야 했다. "요새, 안면 마취가 유행이니?" 슬쩍 던진 질문에 현주가 웅얼거렸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두, 남들 튀는데 못 튀면, 초라해 보이는 것 같아서..." "음냐... 그러니까, 얼굴에 남들보다 덜 썼으면 심사가 뒤틀려지는 거네." 눈만 굴리고 있던 정은이가 아픈데를 찔렸는지, 재빠르게 나섰다. "마자요! 바로 그거예요." "그래... 돈 많은 우리 아빠! 알고 보니 X도 없다던데... 아버지가 벌어 주는 돈, 써야지..." 욕 같기도하고 편 같기도 한 말로 대충 얼버무릴 때였다. "삐삐! 삐삐!" 이번엔 삐삐였다. 최첨단 날라리들 답게, 세 아가씨들 모두 삐삐를 달고 다녔다. 그녀들의 삐삐에는 잘 나가는 카페와 나이트들의 전화번 호 정도 쯤은 메모리 되어 있었고, 자신들 전용의 집 전화에는 자동 응 답기도 설치 되어 있었다. 자동 응답기는, 그녀들이 없기만 하면, 언제 나 친절하게 그녀들의 삐삐 번호를 앵무새보다 정확한 발음으로 들려 주었다. "언니! `사가(강남의 나이트 이름)`에서 삐삐왔어. 재만이 오빠한테 온 모양인데, 동전 있어?" `나이트`라는 영어에 어울릴 만한 국어 단어 찾기가 매우 어렵다. 고우 고우(GO GO)스텝이 판을치던 아주 옛날 옛적에는 고고장이라고 불렀다. 고고장을 꼬꼬장으로 경음화 시켜 부르다가, 유래된 은어가 ` 닭장`이었다. 그러나, 고우고우(GO GO)스텝이 유행의 뒷 전으로 팽개쳐 지고, 디스코(DISCO)라는 좀 더 자유분방해진 스텝이 한동안 세상을 주 름잡는 동안, 수많은 `디스코 텍`이 생겨났다. 대학의 춤써클(UCDC, UCD, URCD)등이 로버트 춤과 허슬을 선 보이자, 종로( ABC, 미스터 리, 마부, 뉴욕뉴욕, 등등)와 무교동(코파카파나, 파레스, 123, 다운타운, 등등) 그리고 영동(바나나, 월드컵, 머치모아, 스튜디오 80, 등등)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디스코 텍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이 당시의 디 스코 텍은 가격이 저렴해서, 천원 이천원 기껏해야 삼천원이면, 하루 종일 놀 수 있었다. 이 당시의 디스코 텍에는 거울이 많았다. 허슬이란 휘어지는 동작이 많은 춤이 유행이었는데, 이 춤은 거울보며 혼자추며 연마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이 허슬시대의 날라리 들이야말로 가장 건전한 날라리들이었다. 매케한 연기속의 디스코 텍 안이었지만, 허슬자체가 주는 격렬, 유연, 흥건한 땀은 좋은 몸을 가꾸 기에도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로운 젊음에 쌓이던 찌부드드한 낭만의 화려운 분출이 되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은 숙련(熟練)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당시의 날라리들 세 계에서 떠오르는 별은, 허슬의 고수였다. 비싸야 삼천원인 저렴한 비용 덕에 돈이 행세하기도 힘들었고, 어두운 조명아래 잘 드러나지 않는 외 모나 학벌도 뒷전이었다. 그래서, 열심히들 돌렸다. 이 당시의 디스코 텍에는 부킹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남녀간의 만남은 디스코 타임 사이사이에서 잠깐씩 주어지는 부르스 타임에서야 가능했다. 휘두르고 돌리는 허슬의 율동으로 점찍어둔 여인에게 신호를 보내고, 부르스 타 임이 돌아왔을 때, 여인의 눈치를 본다. 디스코 타임에서의 율동이 여 인을 만족시켰다면, 그녀는 스테이지에서 잠시 머뭇거리며 기회를 주었 을 것이고, 다듬어 지지 않은 발악으로 그녀에게 비쳐졌다면, 여인은 쌀쌀맞게 스테이지를 벗어 낫을 것이다. 허슬이후, 브레이크 댄스의 열풍이 돌자, 노는 바닥의 물결은 이태원 과 강남으로 밀려갔다. 가격이 저렴하던 종로나 무교동의 디스코업계에 찬바람이 몰아쳤고, 이국의 향락과 어울어진 이태원과 강남의 비싼 디 스코 텍들이 떼 돈을 벌었다. 콧대 높아진 디스코 텍은 이제부터는 디 스코 텍이 아닌 나이트였다. 이것이 내가 생각해 본 `한국 나이트`의 탄생이다. 물론 이전에도 `나이트`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의미 하는 `한국 나이트`는 이전에 불리던 `나이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 다. 내가 되 돌아본 `한국 나이트`의 시작은 다수의 가난한 날라리들의 눈물에서 비롯된다. `한국 나이트`는, 가난하지만 잘 놀고 싶은 다수의 날라리들을 외면했고, 대신에 부자 집 날라리들을 손짓했으며, 편한 것 좋아하는 귀한 집 자식들에게 부킹이라는 고가품을 팔기 시작했다. 부 킹의 등장으로 나이트돌이들은 더 이상 춤을 숙련시킬 필요가 없어졌 고, 따라서, 이제 부터 나이트는 춤을 추는 장소가 아닌 부킹을 하는 장소로 전락했다. 초기의 부킹은, 비싼 양주와 안주들이 많이 쌓여 있는 테이블의 남자 들을 여자들 테이블에 앉혀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태원마 저 고가(高價)의 술값을 감당 못하고, 그 권위를 강남과 호텔 나이트 (유니콘, 니꼴, 바바렐라(지금의 사가), 포인테, 레인 앤 폴리스트, 휘 바 등등...)로 빼앗겼다. 이 때부터 웨이터가 여자들을 잡아 끄는 요즈 음의 부킹이란 것이 히트를 쳤다. `돈` 따라 다니는 여자들의 부킹은 웨이트의 줏가도 치솟게 했고, 몇 명의 스타급 웨이터(사가의 돼지엄 마, 나티나의 마영달, 공공칠, 등등..)들을 탄생시키도 했다. 웨이터 는, 대부분의 경우, 나이트에 놀러 오는 아가씨들로 부킹을 충당하지 만, 때에 따라서는 비방(秘方)도 있다. 어려울 때마다,봉이 되어 주던 손님의 난처한 요구에 부응할 아가씨를 긴급하게 모셔와야 할 때가 없 진 않다. 이 긴급한 수송을 대비해, 웨이터들은, 그들이 일 끝나고 접 촉할 수 있는 아가씨들(술집 종원원, 매춘부, 집 없는 아가씨 등등)과 연계를 맺고, 그녀들을 나이트 온 손님으로 포장시켜서, 침대까지 이어 지는 테이블에 앉혀 주기도 한다. 웨이터는 팁을 벌고, 아가씨는 물주 를 물고, 남자는 X병을 얻는 거래다. 어쨋거나, `한국 나이트`는 너무 비싼 놀이터가 되어 버렸다. 이 `비 싼 나이트`가 아니었다면, `오렌지` 설화도 배아프게 이어지지는 않았 을 것이다. `오렌지`라는 외래어에 어울리는 국어단어 찾기도 어렵다. 찾을 필요 도 없고... `오렌지`라는 단어는 외래어 지만, 뜻은 국어니까, `오렌지 `는 한국 고유어가 되어 버리고 있다. 우선, 오렌지에 대해 들은 것을 대충 열거해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 어울릴 것을 요구할 때, 오렌지 쥬스를 시켜 보낸다는 데서 유래 했다 고 하기도 하고, 여자가 승락할 때 오렌지 쥬스를 시키는 데서 유래 되 었다고도 한다. 여기까지는 낭만도 있고 나쁘지 않다. 따라서 이런 것 들이 `오렌지`의 욕이 될 수는 없겠다. 아마도 `오렌지`가 욕이 되는 이유는 `오렌지`의 자격 조건에 있지 않나 싶다. 차는 그랜저 이상, 일주일 용돈 백만원 이상...등등으로 번지는 까다 로운 조건들이 눈쌀을 찌푸리게 하고, 배아프게 할 것이다. 이런 이유 들로 `오렌지`를 욕할 수는 있겠지만, 대놓고 욕해서는 안된다. 속으로 욕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들 또는 그들의 부모가 나쁜 짓을 해서, 돈 을 벌었을 수도 있겠지만, 떳떳하게 땀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땀을 오렌지가 누리고 있다면, 욕이 나와도 퍼 부어서는 안 된다. 그들 은 누릴 자격이 있는 부분을 누리고 있을 뿐이고, 빨리 망하겠다고 서 두르는 것 뿐인데, 그들과 인연이 없는 사람이 밖에서 `이놈 저놈`할 짓이 아니다. 함부로 해대는 가치 없는 욕은, `하는 놈이나 듣는 놈이 나`가 될 때가 많다. 이제 오렌지가 `진짜로` 욕 먹어야 하는 이유를 들어 보려 한다. 지면이나, 화면, 그리고, 주위의 입들을 통해, 오렌지를 향해 퍼붓는 대다수 사람들의 욕들을 접했다. 하지만, 오렌지를 떳떳하게 욕할 수 있는 이유를 제대로 찾아보고, 정직하고 옳바르게 던졌다고 여겨지는 욕을, 접해 본 기억이, 아쉽지만, 없다. 어지럽게 피었다가 의미없이 사라지는 아궁이의 연기는 시큰둥한 재 채기로 요란만 떨게 하고는 침보다 지저분한 그을음을 얼굴위에 남겨 줄 뿐이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이유들보다는 불꽃같이 따끔한 이유가 필요하고, 그을음같은 욕지거리들 보다는 보약같은 해결책을 찾아야 한 다고 여겨진다. 씨앗 같은 이유와 낫 같은 해결책을 누군가가 간단하게 찾아내었다 면,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명석한 사람일 것이다. 나도 이유와 해결책 을 근접하게나마 찾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 스스로가 명석하다고 자 화자찬 해버린 꼴이 되었는데, 그건 아니다. 나는 명석해서 찾았다기보 다는 실제로 이 땅에서 오렌지라고 부르는 사람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 고 있어서 해답에 접근할 수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정보의 구체성을 단편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언젠가, 부모 몰래 유학 중 귀국해서 교통 사고를 내고 사고 친, 귀한 집 자제들이 있었다. 매스콤에 오르내리고, 고생하다 풀려난 그들을 아는 사람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들 중 붙잡히지 않은 한 명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름의 끝자가 `협`으로 끝나니까, 편의상 `협`이라고 하겠다. 난 협은 물론, 협이란 사람의 누나, 형,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엊그저께 협의 누나 가 제왕절개해서 낳은 협의 조카(딸이었다.)까지 알고 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누가 나에게 오렌지에 대해서 갖고 있는 모든 정보 중 가장 중요한 정보를 꼽아 보라면, 나는 주저없이 `왜 그 들이 오렌지가 되었느냐?`에 관계된 정보를 꼽는다. 얼핏 생각하면, 오 렌지에 대한 어줍잖은 동정이요, 시시콜콜한 주둥아리의 현학적인 낭만 정도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아니다. `왜 그들이 오렌지가 되었느냐?`에 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은 그들의 족보 뿐만 아니라, 그들 개개의 특수 성까지 가까이에서 세세히 살펴야 하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 다. 그러나, 그 대답은 간단히 두 글자로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방황 하는 오렌지들의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답은 `무능`이다. 그들 은 하나같이 무능해서 자신은 물론 가족과 사회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 었고, 집안에서조차, 귀로는 욕을 먹고, 입으로는 눈치 밥을 먹어야 했 다. `오렌지`가 오렌지가 된 이유인 `무능`때문에 그들은 욕을 먹고 있고, 먹어야 한다. 또 그 진절머리나고 거머리같은 무능 때문에 오렌 지의 부모들이 자식인 오렌지를 욕하고, 다른 사람들로 부터 마땅한 욕 을 먹고 있다. 그들의 무능을 조기 치료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욕 먹는 오렌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얼마전 이상하게 생긴 도피성 유학생이 자신의 부모 에게 칼 질을 한 적이 있다. 많은 매스콤들이 그 아이의 난폭성을 부각 시키고 있다. 입질로 밥 먹다 보면, 입 놀릴 때는 많고, 시간은 없고 그럴 것이다, 재미도 없진 않을 게고... 하지만, 하고 있는 일은 제대로 하는 것이 좋다. 내가 접한 매스콤에서 말하고 쓰기를, 한상이란 아이가 `돈 때문에` 부모를 영화에서 힌트를 얻어서 `칼`로 찔러 죽였다.고 했다. 그 외에 구질구질하게 따라 붙는 것들은, 대학에 떨어져서 도피유학 어쩌고 해 가며, 한상이란 아이는 오렌지니 죽어 마땅하다.등이었다. 대부분 지당하고 옳으신 말씀들이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틀렸고, 중 요한 핵심이 빠져 있다. 한상인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인 것이 아니고, `자신의 무능`때문에 부모를 죽였다. 그리고 한상의 부모는 칼에 맞았 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자식을 칼로 만들었기 때문에` 죽었다. 그리고, 가장 우려되는 점은, 자식한테 칼 맞을 수도 있는 사람이 세상 에 널렸다는 점이다. 다만, 여건이 받쳐주지 않아서 안 맞고 있다고 여 겨진다. 부모가 자식 칼 맞는데 필요한 여건들을 들어보면, 많은 재산, 인격 적 모멸, 학대, 변태,등등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첫째는 자신의 자식의 무능이요, 둘 째는 막다른 길로 모는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린 무능한 자식이, 자신의 살 길은 오로지 부모를 죽 이는 길 뿐이다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상이는 부모를 죽인 것이다. 도박 빚을 갚기위해서도 아니었고, 유흥에 빠져들고 싶어서도 아니었 다.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모든 부모들에게, 자식을 무능하게 만들어 막다른 길로 모는 일이야말로, 바로 자식에게 칼 맞을 일이라는 것을 한상이가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왜 오렌지가 되느냐?`에 대한 해답을 `무능`이라고 했다. 이제부터 핵심을 이야기를 하겠다. 무능의 조기치료에 관한 치료법이다. 간단하 고 수수하게 느껴질 지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내가 생각해 본 최선의 치료법이다. 더 쉽고 확실한 치료법이 없다고는 장담 못 하겠고, 누군 가 찾아 내기를 부탁한다. `무능`이란 난치병에 대한 치료가 `학문`으로 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 겠지만,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경우가 문제인데, 돈 있는 사 람은 돈 가지고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사실 이런 경우 돈은 무능의 치료에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별 도움은 되지 못 한다. `학문`으로 안되는 `무능`은 `훈련`으로 고쳐야 할 것 같다. 의 사는 물론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어야 하고 엄해야 하며, 필요에 따라 집안이 망한 흉내도 내야 한다. 어떻게 그런 짓까지 해야 하느냐고 주 저한다면, `한상`이를 생각하면 된다. 자식을 무능하게 만들 권리는 부 모에게도 없다. `훈련`이란 말을 썼는데, 무엇에 대한 훈련인지를 일일이 들기는 어 렵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개성이 다르다. 그리고, 이 `훈련`을 실 행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포기도 반드시 따른다. 훈련의 역점은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이가 비데오를 좋아하면, 비데오 방 종업원으로 취직시키는 것, 당구를 좋아하면 당구 장의 종업원으로 취직 시키는 것, 컴에 빠져 있으면 용산 전자랜드의 종업원으로 밀어 주는 것, 이런 것들이 훈련이며, 가족이 반드시 지켜 야 할 것 두 가지는, 첫째는, 그들에게 그들이 버는 돈 이외에 땡전 한 잎이라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둘 째는, 그들에게 그들이 무슨 일 을 하고 있던, 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단할 수 있는 용기를 실행해 보았고, 인내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훈 련을 묵묵히 견딘 사람이라면, 대학을 거치지 않아도 욕 먹는 오렌지는 되지 않을 것이고, 인생에서 실패하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며, 실패한 다 하더라도 오뚜기처럼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처해진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재빠르게 적응하면서 오뚜기처럼 끝까지 일어 섰는데도 모든 일 에 실패 했다면, 그는 가장 큰 것을 성공한 것이다. 인생 그 자체를... "나 동전 없는데, 오빠 동전 있어?" "한 닢이면 되니?" 자자 입구의 공중전화 속으로 빨려들어 갈 동전을 성미에게 건네 주 었다. 성미에게 삐삐를 친 재만은 30살짜리 나이트 DJ였다. 물론 성미 가 재만이의 나이를 알진 못 한다. 성미에게 재만이가 있듯이, 현주에 게는 성군이가 있고, 정은이에게는 병준이가 있다. 성군이나 병준이 역 시 DJ다. 보통 잘 나가는 나이트 DJ들은 한 업소에서만 일을 하지 않는 다. 한 업소에서 한 타임 틀어주고, 다른 업소로 이동해 간다. 경력에 따라 보수가 다른데, 초보자는 월 60정도 받고 이른 시간을 담당하고, 밤 열시 이후 등장하는 연륜이 제법인 DJ들은 평균 105만원 정도 받는 다. 하지만, 나이트의 특성상, 물 빠지면 한동안 문을 닫아야 하고, 딱 지떼면, 또 영업 못하고,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 하기때문에, 정기적인 수입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성군은 인천 체고에서 배구를 하다 무릎이 안좋아서, DJ가 되었다. 70년생으로 가장 어리고, 사가, 단센에서 일을 한다. 경력이 짧지만, 허여멀건 외모와 순박한 함박웃음으로 인기가 있 다. 병준은 국민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가장 인정 받는 DJ로 사 가, 젬마, 나티나, 단센에서 일을 하고, 음악을 잘 튼다. 재만 역시 잘 나가는 DJ이지만 병준에 비해 한 수 아래 대접을 받는다. 사가, 젬마, 단센에서 일을 한다. 보통 손님이 없고, 자신들의 타임에서 봉사를 다 하고 나면, DJ들은 물좋은 아가씨들의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 나, 스테이지가 비면 춤을 추기도 하며, 소속된 나이트의 판촉을 도울 때도 있다. 셋 다 외모가 출중하고, 미남계에 능한 관계로, 강남 나이 트 DJ 업계에서 이들 트로이카를 93년도에 따라 잡을 DJ는 없을 것으로 본다. 현주와 성군, 정은과 병준, 성미와 재만, 이들은 상당히 가까운 사이 들이다. 속된 말이지만, 즐기고 맞먹기 위한 연인사이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세 아가씨들은, 내가 세 DJ들을 그녀들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한다. 다만, 세 DJ 중 비 교적 순진한 성군이 나를 보면, 외면하지 못하고 다가와서 인사하는 것 에 호기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사가로 가야 겠네." 전화 걸고 돌아와 앉는 성미에게 말을 건네자, 정은이가 내 말을 이 었다. "화요일엔 젬마를 갔으니까, 오늘은 사가에 가요." 말을 끝내고, 내 옆자리의 현주를 힐끔거리는 정은이었다. 아마도 현 주의 눈치를 보고 있는 듯 했다. 내가 처음 한 두번 그녀들과 나이트에 갔을 때는, 나는 그녀들에게 ` 적당한 쪼다`로서 였다. 최첨단 날라리 아가씨들과 잘 나가는 DJ그룹이 서로를 즐길 때와 장소는, 나이트 영업이 끝나고 그들과 인연 있는 가 라오케 같은 곳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DJ들의 일이 끝날 때까지, 보통 나이트에서 뭉기적 거리며 기다린다. 하지만, 비싼 나이트는 아가씨들 의 주머니로 자주 올 곳이 못 되고, 따라서, 그녀들의 테이블을 책임져 줄 봉을 억지로 찾지는 않겠지만, 마다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어 렵지 않게 그녀들을 위한 `오렌지 나라의 기사`가 되었다. 나이트가 끝 나고 내가 그녀들의 부담으로 남겨질 기미가 감지된다 싶을 때면, 나는 솔선해서 그녀들의 집 앞까지 태워다 주며 그녀들의 염치(廉恥)를 세워 준다. 그녀들도 자신들의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는 척하며, 나의 자존심 을 동정해 주는 간교 하지만은 않은 여심(女心)을 남긴다. 물론, 내 차 가 떠난 것이 확인되면, 즉시 빠져 나와 택시를 잡고 DJ들이 기다리고 있는 2차로 향한다. 이런 정도의 여심(女心) 때문에, 숨어서 살피거나, 다른 사람으로 하 여금 살피게 한다거나, 하는 식의 뒷 조사는 하지 않았다. 여타의 사내 들도 마찬가지 겠지만, 나 역시 여인에게 사내로서 부끄러운 짓을 하기 싫어 한다. 귀찮아서도 아니고 어려워서도 아니라, 하기 싫어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의 여심(女心)을 모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들을 몇 번 만나는 동안, 어떤 류(類)의 아가씨들인지 그녀들 자신 들을 통해 직접 보고 들으려 했고, 그녀들도 자신을 별로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이제 스무살들이다. 자존심과 쑥스러움으로 거짓말 은 할 수 있되, 사람을 속이려는 사악함이나, 속일 수 있는 연륜은 없 다. 게다가, 성군, 병준, 재만을 포함해서 내가 알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녀들 주위에 널부러져 있는 상황이다 보니, 나는 저절로 그 녀들을 제대로 알고 말았다. 세 DJ들의 노는 경로에 나는 이미 빠삭했 고, 그들과 나와의 인간 관계에는 이미 전적(戰積)도 있었다. 물 좋은 참신한 영계들이 나이트 무대에 오를 때면, 잘 빠지고 능력 있는 DJ들은 접근을 한다. 그 곳을 찾는 스무살 아가씨들에게, DJ들과 의 관계가 지속적인 선망이 될 수는 없겠지만, 나이트 조명 아래에서의 DJ들은 스타처럼 보여 지기도 한다. 더우기 미래가 먼 한때의 젊음인지 라, 그녀들은 DJ들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짜릿함을 만끽하다 보면, 스 타의 연인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착각에, 몸뚱아리 전체에 헛 바람을 실 어 날려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성군, 병준, 재만등은, 나이트 조 명아래에서는, 확실한 바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그물에 걸린 몇몇 아 가씨들의 `오렌지 기사`였었고, 성실히 나의 역할을 수행했다. 나는, 그녀들이 좋아하는 DJ들의 음악을 들으며 흔들 수 있는 공간을 그녀들에게 제공했고, 그녀들의 부킹을 방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도 왔다. 보기에 괜찮은 사내들이 놀고 있는 테이블이 보이면, 웨이터를 시켜서 그녀들을 그리로 보냈고, 그녀들이, 부킹 갔다 온 테이블에 앉 은 사내들의 신상명세를 뽑아대며 재잘거릴 때면, 나는 귀기울이며 들 어 주었다. 그녀들이, 다녀온 다른 테이블의 사내에게 호감을 표시하 는 기미가 엿 보이면, 나는 사내를 불러 주었고, 욕을 할 때면 같이 씹 어 주며 예리한 뒷다마로 그녀들을 자지러지게 해주었다. 분명한 것은, 나는 언제나 그녀들 편이었고, 그녀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인 심좋은 `오렌지 기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들이었다. 몇 번 그런 일들이 반복이 되고 나면, 그녀들이 나이트에 찾아온 주 목적, 즉, DJ들 혹은 다른 오렌지 들과의 2차는 계속 불발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DJ들이나 사 귀던 오렌지들 대신 기사에게 2차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녀들의 충성 스런 기사인 나로서는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것들이 `오렌지 기사`로서의 `나`와 DJ 혹은 다른 오렌지들과의 전적(戰積)이었다. 병준과 재만은 판을 돌리다가도 나를 볼때면, 인사를 외면하지는 못 하지만, 낯색이 굳어지고 음악까지 신경질을 부린다. 하지만, 성군은 나를 보면 웃기도 하고 양주도 한 병 슬그머니 갖다 주며, 지난날의 어색함을 눈웃음과 한 잔으로 가린다. 아직 순수한 면 이 남아 있어서인지, 깔끔한 전적(戰積)에 경의를 표할 줄 아는 신사 (紳士)이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영리해서 인지... "사가는 싫어. 그냥 젬마에나 가." 가장 먼저 기사의 약효에 차도를 보이고 있는 현주였다. 은근슬쩍 그 녀를 건드려 보았다. "사가에서 너가 안보이면, 2차에서 성군이 노래에 빵빠레가 뜨질 않 을텐데..." 슬그머니 헤집은 2차와 성군이가 현주를 자극했는지, 약간 치켜 올려 진 눈꼬리를 보여주고 나서, 정은이와 성은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꼬리에 압력을 잔뜩 실어 동의를 구했다. "오빤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성군이하고 나하고 별 사이 아니지?" 현주의 말꼬리를 정은이와 성미가 재빨리 알아 들었나 보다. "응! 그냥 몇 번 우연히 자리나 같이 한 정도지." "맞아!" 정은이와 성미의 동의에 자신이 붙었는지, 이번에는 아예 그녀들에게 떠 넘겼다. "오빠하고 젬마에서나 놀다가 집에 갈래. 이제 2차는 안 갈꺼야. 얘 네들이 병준이 하고 재만이 하고 친해서 2차에 몇 번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성군이 몇 번 만났어. 그게 다야." 진위(眞爲)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패기만만한 스무살 아가씨의 천방지축 속에서, 나는 언짢은 여심에 부끄러워 하는 여인의 옆 모습을 보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현주의 여인으로 서의 발뺌이 `오렌지 기사`로서의 보람으로 다가 오기 시작했다. "그럼 오늘도 성군이 없는 젬마에서나 놀아야 겠네." "응! 그리구, 나 내일 아침 일찍 학교에 좀 데려다 줄래? 레포트 써 야 할 것이 있어서..." "하하하! 내가 데려다 줄 것 같니?" "오빤 우리의 기사니까... 검정 에스페로의 흑기사..." (3) 잔인한 군대 파아잘의 손에서 건네 받은 딱딱한 표지로 쌓인 우편물을, 책상밑에 놓여져 있는 백과 사전 크기의 트럭위에 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헤트라 이트에 녹색 신호가 켜졌다. 안전 표시등이었다. 이 트럭 모형의 전자 감응기는 두 가지 혜택을 주고 있다. 나외에 다른 사람이 이전에 우편 물을 개봉했었다면, 황색 표시등이 들어온다. 또, 모사드에서 고안되고 그들의 테러 행위에 가끔 이용되었던, 편지의 개봉과 동시에 폭발하게 되는 편지 폭탄의 가능성이 트럭위에서 인식되면, 빵빵거리는 크락션 소리와 함께 적색 표시등이 켜지게 된다. 중동의 본사에서 지난 4, 5월 내내 날라온 전문들은, 해체된 구 유고 연방내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내전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 이었다. 세르비아계, 회교계, 크로아티아계로 삼분되어 치고 박고 있는 보스 니아 공화국의 내전은, 민족, 종교간의 갈등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내전의 발발은, 공식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빈약하지 만, 그리스 정교도와 로마 카돌릭에 뿌리가 깊은 세르비아인들의 `인종 청소`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내전 이전의 보스니아 공화국에는 전체인구의 44퍼센트에 달하는 회 교도들이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들과 함께 뒤섞여 살고 있었다. 내전 이 발발하면서 회교도들은 세르비아계의 무력에 의해 강제 이주되었고, 세르비아계는 세계의 공분을 사기 시작했다. 내전 발발후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 공화국의 70퍼센트에 달하는 지 역을 점령했고, 크로아티아계가 20퍼센트, 나머지에서 회교계가 버티고 있다. 세르비아계의 월등한 무력은 이웃 세르비아 공화국의 대통령 슬 로보단 밀로세비치와 무관하지 않다. 구 유고연방의 최대민족인 세르비 아계를 묶어 대 세르비아를 건설하려는 만족주의적 야심을 갖고 있는 밀로세비치는 보스니아내의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와 밀월 관계를 갖고, 무기와 연료를 공급해 주고 있었다. 유엔 본부 2층에는 안전 보장 이사회의 본회의장이 있다. 회의장 중 앙에는 대형 회의용 탁자가 있는데, 이 탁자가 말굽모양으로 생겨서 이 곳을 `말굽 회의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보다. 하지만, 그보다는, 유 엔에서 가장 바쁘고 붐비는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지역은, 대개 군화발에 짓밟혀지고 있는 곳이란 점이 말굽의 이미지를 더욱 또 렷하게 형상화 시켜 주는 것 같다. 보스니아에도 수없이 말굽이 찍히고 있었다. 보스니아 영공내의 비행 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난민들에게 구호물자 의 수송이 이어졌고, 세르비아계에 대한 지원을 중지 시킬 목적으로 신 유고연방에 대한 경제 제제 조치가 내려졌다. 유엔 평화 유지군이 파견 되었고, 사이러스 밴스 유엔 특사와 오웬 EC(유럽 공동체)특사가 마련 한 밴스-오엔 평화안이 제의 되었다. 그러나, 내전은 전혀 수그러 들지 않고 있다. 세르비아계에 의해 봉쇄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탈출하려다 총탄에 맞아 서로 부둥켜 안고 숨진 모습으로 발견된 비극의 `사라예보 의 연인들`은 세게인의 슬픔을 자아냈고, 구호물자 공수를 해대던 유엔 소속 수송기가 사라예보 공항 활주로에서 총격을 받았다. 경제 제재 조 치 시행 1년만에 신유고 연방으로 하여금, 8400퍼센트라는 세계 시장 사상 최악의 인플레를 겪게 했고, 1억 디나르화를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2달러로 잡았지만, 세르비아계의 포사격은 미사일도 되었다. 평화 유지 를 위해 파견된 유엔군은 구호물자에 탄약상자나 실어 나르다가 들켜 체면만 깍였고, 세르비아계에 영토의 양보를 요구하며 다민족 중앙정부 하에 10개의 자치주를 두고자 한, 벤스-오웬의 평화안은 세르비아 주민 들의 국민투표에서 여지없이 무시되었다.(국민투표 참가자 1백 27만중 1백 6만(96퍼센트)이 반대했다.) 수 만명의 회교계 여인들이 세르비아 점령지역에서 감금되어 성폭행 당했고, 시장바닥까지 날아온 포탄에 의해 어린아이들의 머리가 깨졌으 며, 수십만이 죽었다. 그래도 세르비아계, 회교계, 크로아티계는 해결 책은 오로지 `무력`뿐이라며 치고 박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이 우왕 좌왕하며 공습이니, 지상군 파견이니 으름짱을 놓다가, 세르비아계가 점령지역 한 두 곳에서 철수한다고 성 명만 발표하며 체면을 세워주면, 슬그머니 머뭇거리고, 다시 또 포격이 이어지고, 백악관 성명이 나오고 들어가고... 난민들은 맞아죽고 아사 하고 시름한다. 이런 것이 보스니아 내전이다. 서방이 이라크 전때 보여준 단결력은 보스니아에서는 찾아보기 어렵 다. 미국내에서 강경대응으로 무력 도발자들을 응징하자는 뼈대있는 입 들이 설칠 때도 있지만, 클린턴 특유의 우유부단은 세계의 경찰로서는 어림없는 배짱으로 보여진다. 이라크 전은 공중전이 효과를 볼 수 있는 사막전이었고, 보스니아 내 전은 그럴리가 별로인 산악전이다. 미군은 월남에서 월등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와 정글전에 패배했다. 세르비아계의 민족주의와 산 악전도 미국으로서 결코 만만하지 만은 않을 것 같다. 종이 호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다지 위력적인 호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 베트남전에서 보여준 미군이 아닐까 싶다. 이라크 전에서 체면을 만회 했다고는 하나, 정확하게 말해서, 이라크 전 역시, 미국이 승리한 전쟁 이라고 장담 하기에는 무리가 없진 않을 것 같다. 2차대전 이후, 전쟁 다운 전쟁의 지상전에 있어서, 미국이 군소리 없이 승리한 예를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기억하고 있기로는 패배한 전쟁과 얼버무린 전 쟁들이 주로 였다. 전쟁이라는 것은 지상전이고, 아직까지는 보병이 고 지에 올라가서 깃발을 꽂아야 내땅이 된다. 지상전에 자신없는 군대는 강한 군대일 수가 없다. 세계에서 가장 현대화 된 군대는 물론 미군이 겠지만, 솔직히 미군을 푹신하게 신뢰하기는 어렵다. 잔 돈 몇 푼에 팔 린 헐렐레한 직업군인들이 산악이나 정글에서 사상이나 종교로 정신적 인 무장을 완비한 군대를 이길 수는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군대 를 알만한 사람들이라면, 정글전의 최강을 꼽을 때 베트콩을 꼽을 것이 고, 사막전의 강자로는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떠올릴 것이며, 산악전 에서는 보스니아군을 생각해 볼 것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미군도 세계 최강으로 자부할 수 있는 영역이 없진 않다. 공중전에서 최강이고, 영 화속에서도 미군은 항상 최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여타 지역의 전 쟁에서는, 매서운 독수리로 구름위에서 때때로 주름잡을 수는 있을지라 도, 지상을 평정하며 포효하는 확실한 호랑이는 되기 어려우리라고 여 겨진다. 미국도 그 점을 전혀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 사료된다. 보스니아 내전에 서방이 개입하기에 껄끄러운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걸프전은 서방의 이권과 직결되는 전쟁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서둘러 개입들을 했다. 반면에 보스니아 내전은 인권만이 관련 지어지는 전쟁 이다. 서방과 무관한 사람들만이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전쟁에 개입한 다고 해서 얻어지는 이익이란 거의 없다. 그래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멀리서 보고 눈만 돌려지면 잊혀지고 마는 동정심으로 별 부담 없는 잔 돈 몇 푼 던져줄 뿐이다. 자신들의 이익과 위협이 무관한 곳에 그들이 나설 이유는 없을게다. 이것이 세상 돌아가는 현실이 아닐까 싶다. 실리가 아닌 인정(人情)과 의리(義理)에 좇아 민의(民意)가 모아지고 그에 따라 통치권에서 정의(正義)가 수행되는 민족이나 국가는, 현실에 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런 세상이 여기에 있노라고 단 한 번 만이라도 보여 준다면, 어느 누가 그런 세상의 종이 될 것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현재까지 명멸했던 강국들 중에 이런 역할에 어울리는 인간성을 보여 준 국가나 민족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 강국이 되어 보지 못한, 그러 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는 국가나 민족중에는 없다고 장담 못 하겠다. 6월 1일, 회교계 6만여 주민이 갇혀 있는 보스니아의 고라제시에 세 르비아계의 전면공격이 시작 되었다. 민간가옥이나 호텔이 무차별 포격 되었고,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 속에는 열 여덟명의 으깨진 어린아이들 시체도 있었다. 그들 위에서 오열하는 어머니의 눈물은 견디기 고통스 러운 분노였고, 분노는 핏물이 되어 찡어진 자식의 살속으로 파고들어 차가워졌다. 고라제시 전체가 전장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6월 2일, 회교국 51개국가로 구성된 이슬람교 회의 기구(OIC)가 소집 되었다. 하미드 알가비드 OIC사무총장과 시디크 칸주 파키스탄 외교담 당 국무장관이 주축이 되어, `행동공약`을 발표했고 `특별공약`을 다짐 했다. 회교권 국가에서 1만 8천명 규모의 병력을 보스니아에 파병시키 겠다는 `행동공약`은 공표될 수 있었지만, 공표될 수 없는 `특별공약` 은 복수를 다짐하는 7개 이슬람교 회원국의 밀약이었다.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잔인한 군대`를 사기로 했다. 딱딱한 표지안에는, 서울에서 디트로이트까지 직행하는 놀스웨스트 항공권 세 장, 소집과 여정에 관한 백색 암호문 넉 장, 그리고 노란 바 탕의 출장 명령서가 들어 있었다. 파아잘과 베셀, 두 시니어 레귤러까 지 포함된 무거운 출장이었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다섯 명의 제자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여보세요?" "은주구나? 수학 선생님이야. 잘 있었어?" "네. 안녕하세요." 은주는 가장 오랫동안 가르친 제자였고, 나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제 자이기도 하다. 내가 사용하는 모든 컴퓨터 통신망의 아이디를 들락거 릴 수 있는 유일한 아가씨이기도 하다. "응. 은주가 집에 있는 줄 알았으면 오늘 은주집에나 놀러 갈 껄..." "치! 입에 침 발랐어요. 맨날 맛있는 거 사준다구 거짓말만 하구..." "다음에 꼭 사줄께. 윤주도 집에 있니?" "네. 2층에 있어요. 근데, 무슨 일로 전화거셨어요?" "그것이..." "또, 편도선?" "응. 어쨋든 이번 주에는 수업 못하고, 다음 주말에나 할 수 있겠 다." "숙제는요?" "발전문제까지 포함해서 A마이너스(참고서 이름) 미적분 풀어 놔. 거 기서 질문 받고 테스트 할 꺼야." "윤주는요?" "최고 수학하고 하이레벧 1 2 포함해서, 함수 풀어 놓으라고 해. 역 시, 질문받고 테스트 한다고 하구." "네." 은주 윤주외에 균오 승일 혜연 나머지 세 제자에게도 비슷한 전화를 걸었다. 균오는 현대 고등학교 3학년이다. 관찰력과 성실성에서 남다른 면모를 갖고 있는 균오지만, 공부에는 그다지 재질을 보이지 못 하는 관계로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수업을 하지만 성적은 신통치가 않다. 가 끔씩 균오가 던지는 질문에는 공부말고 다른 길로 인생을 개척해 보고 자하는 의도가 언뜻언뜻 비칠 때가 종종있다. 승일은 구정 고등학교 2 학년으로 고지식한 면이 돋보이는 학생이다. 아직은 확실하게 결심한 단계는 아니지만 의사가 되고 싶은 심정을 내비치곤 한다. 성적은 우수 한 편으로 대부분의 과목에서 `수`를 받고 있는데, 수학이 `우`다. 그 래서 그런지, 수학에 히스테리컬한 면을 가끔씩 노출시킨다. 수학시험 을 앞 둔 날에는 아침 밥을 제대로 못 먹는다고 승일의 어머니가 귀뜸 해 준 적이 있다. 혜연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르친다. 혜연은 언북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서울 과학고에서도 여학생들 중에선 늘 일등이다. 2학년이지만, 수학은 이미 전 과정을 끝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혜연을 만나는 이유는 그녀에게 물리를 도와주 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고등학교와는 달리 과학고에서는 PCCR 이라고 하는 두꺼운 원서까지 동원해서 물리를 공부시키는데, 그곳에는 내가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문제들이 약간 있다. 은주와 혜연 중학생 윤주는 일주일에 한 번 수업하는 관계로 한주일 정도의 출장에 무리가 없는 반면에, 균오와 성일은 부담이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나는 착한 과외 선생이라 수업을 빼먹지는 않는다. 내가 빠진 한 주일 혹은 열흘 정도의 기간에는 나의 육촌동생 서웅이가 대신 가르친다. 육촌동생 서웅이는 전자공학과 후배이기도 하다. 디트로이트에서 놀스웨스트 항공 소속의 프로펠라 20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로우녹(ROANOKE)에 도착했다. 베셀 파아잘과 함께 도착한 쉐라톤 호텔에서 밤을 보냈고, 호텔 맞은 편 오른쪽에 위치한 `가부키 레스토 랑`이란 일식집에서, 칼잽이들이 철판 위 아래로 휘 돌리는 칼재주들을 구경하며 점심을 먹었다. `가부키 레스토랑`이란 일식집에는 아주 얌전하고 공손한 지배인이 한 명있다. 우리가 `아론`이라고 부르는 이 지배인이 이곳에서 하는 일 은 새로온 웨이트리스들에게 예절을 가르치고 식당 문을 열기 전에 테 이블 셋 업을 지시하는 것등이다. 이 식당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단정한 금발머리의 푸른 눈 아론은, 앞으로 한주일 정도는 `가부키 레스토랑` 에서 테이블 식탁보의 무늬가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시 를 내리지 않아도 되겠다. 아론은, 다가올 한주일 동안은, 파아잘 베셀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저격수다. 그가 저격수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을 들려준 적이 있다. "전투에 경험을 쌓은 군인들 이라면 한 두번쯤은 망원렌즈에 비친 이 제 곧 죽어야할 상대의 얼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두번 의 경험에 그칠 그들에게는, 죽음의 공포를 전혀 모르는 렌즈속의 얼굴 에서 양심을 떠올리는 불행한 여유가 없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사람 을 눈으로 죽이다보면, 공포를 의식하지 못하는 렌즈속의 얼굴들은 절 망적인 얼굴로 보여지게 된다. 대부분 그 시점에서부터 줏어들은 저격 수의 의지력에나마 기대어 보려고 허우적 거린다. 격발과 동시에 빗나 갔으면 하는 후회가 냉정을 몰아 세우고 양심을 찌른다. 임무에 따른 살인이란 변명으로 뒤틀리는 양심을 진정시키기도 어렵다. 이것이 보통 저격수들이다. 그들은 결코 영원한 저격수는 될 수 없다. 적당한 선에 서 발을 빼야 한다. 진정한 저격수는 자기 합리화를 시도도 하지 않는 다. 양심을 생각하는 대신 지옥에 갈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며 그곳에 가서도 역시 저격수가 될 것을 다짐하는 것이 영원한 저격수라고 할 수 있다." 레이녹에서 차로 두시간 거리에는 플로이드 카운티(FLOYD COUNTY)라 는 산골짜기 마을이 있다. 카운티(COUNTY)란 시로 승격되지 못한 행정 구획들 몇 개가 군집을 이룬 한국의 군(郡)에 가까운 형태를 말한다. 우리는 산골짜기로 이어지는 비포장된 비탈길을 따라 블루리지 마운틴 (BLUE RIDGE MOUNTINE)을 올랐다. 애팔래치아 산맥 최 남단에 위치한 블루 리지 마운틴은 존 뎀버의 노 래에도 나온다. 버지니아의 웨스트 사이드에 위치한 이 첩첩산중에는 트레일러를 개조해서 만든 집이 한 채 있다. 버지니아 산골 깊숙한 곳 에 양철 쪼가리로 만들어진 집이지만, 몇 가지 첨단 시설이 구비되어 있는 집이다. 자동 경보 장치와 경보 카메라가 설치 되어있고, 워크 스 테이션급의 컴퓨터도 있다. 이 집에는 여덟명의 사내들이 생업에 종사 하고 있다. 이들이 이곳에서 하는 사업은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산삼을 캐는 일이고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들중 한 명은 4대째 이곳에 서 산삼을 캐는 가업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나머지 일곱명은 그가 고용 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심마니들이지만, 역시 나의 동료들이다. 이들이 블루 리지 마운틴에서 산삼을 캐고 있는 덕에 나도 산삼을 꽤 나 얻어 먹었다. 새까만 흙이 더덕더덕 달라 붙은 엄지 발고락 굵기의 산삼을 식빵 봉지로 한가득 채워서 선사받은 적이 있다. 버지니아 산삼 이 효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산삼의 한 가지 효과는 뚜렷하게 경험했다. 산삼을 달여 먹은 날은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 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것외에 산삼이 장담하는 효과들에 대해서 는 산삼을 수십뿌리 먹어본 경험으로도 반신반의하고 있다. 그들이 들려준 바로는 산삼 주위에는 백사, 흑사, 홍사등의 독사가 많다고 했다. 꼿꼿하게 머리 세운 독사가 풀 잎처럼 보일 때가 많아서 산삼을 발견했을 때는 너무 들뜨지 말고 주위를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이 양철 집에 설치되어 있는 컴퓨터에는 이들이 산삼을 캐었던 지역이 나, 아니면 발견 하고도 나중을 위해 일부러 캐지 않은 산삼의 위치등 이 입력되어 있다. 몰래 한 번 들여다 보았다가 죠지 웨이즈에게 매우 혼 난 적이 있다. 웨이즈는 이 별장의 주인이다. 별거한 아내의 이름이 낸시라서 우리는 그를 레이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버지니아 산삼이라 도 한 번 왕창 자시고 싶다면, 버지니아의 산 골짜기 도시 플로이드 카 운티에 들러서, 산삼캐는 트레일러 집을 가르쳐 달라고 하고, 죠지 웨 이즈에게 부탁하면 매우 싼 가격에 충분한 산삼을 구입할 수 있다. 주 고객은 중국인들이 대부분 이지만, 웨이즈를 찾는 한국인이나 미국인들 도 없진 않다. 트레일러 집을 다녀가는 미국인들은 산삼을 달여 먹는 대신 가루로 만들어 차에 타먹는다고 한다. 웨이즈가 산삼을 믹서로 갈아서 동양에서 온 사내들에게 한 잔씩 대 접했다. 웨이즈는 중무기 사수다. 야전 박격포로 많은 사람들을 살상하는 학 살자다. 우리는 그가 듣고 있는 곳에서 학살(SLAUGHTER)이란 단어를 아 예 쓰지 않는다. 여러가지 화기 제어 기술이 뛰어나다. 그는 18살에 월 남전에 참전했고, 30대에 상사가 되었으며 이스라엘과 서독의 특수부대 를 모방해서 창설 되었던 델타포스에서 제대했다. 하지만, 그의 학살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는 언젠가 어째서 아직도 사람을 죽이느냐는 나의 질문에 대답해준 적이 있었다. "나는 동부에서 태어 났지만, 악한을 잠재우는 서부의 사나이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살인에 괴로워 하지 않아." 내가 다시 악한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묻자, 서부의 사나이는 흔들리 지 않는 음성으로 대답해 주었지만 그의 얼굴에 잠깐동안 지어진 미소 에서 곤혹이 머물었던 흔적을 한나절 내내 지우지 못했었다.. "내가 탄착을 관측했을 때,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악한이야." 심마니 헥토르는 뉴욕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파나마계 미국인 이었다. 노동과 격투로 단련된 흔적들을 곳곳에 드러내 보이고 있는 그의 육체 는 총을 사용하지 않고도 70명 이상을 살해한 파멸의 증표라고 할 수 있겠다. 석궁과 칼은 물론, 그가 스스로 고안해 낸 갖가지 쇳조각들은 그가 살아온 삼십여 년의 거울이다. 그의 가운데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 역시, 장식용이라기 보다는 살상용이다. 그는 나에게 맨손으로 사람의 목을 부러뜨리는 법을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오른쪽 턱 밑으로 감긴 왼손을 오른쪽 상방으로, 후두부에서 왼쪽 귀에 걸은 오른손을 왼쪽하방으로, 젖은 수선을 잡아 채듯이 두 번 ` 뱅! 뱅!..." 심마니 데오도르는 속사권총과 이동 사격의 명인이다. 헥토르의 칼날 과 데오도르의 소음권총에서 발사되는 덤덤탄(몸에 박히면 산탄처럼 확 산되어 살상력이 배가 된다.)이 한 조가 되어 펼쳐지는 침투공격은, 적 진 깊숙한 곳에서 갑작스럽게 대면하게 되는 적 앞에서도, 소음을 발생 시키지 않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조용한 죽음들만 쌓여갈 뿐이 다. 파라오의 후손인 데오도르는, ELP게릴라 시절 북한에서 훈련 받아 서인지는 몰라도, 동양의 여인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나에 게 신통치 못한 발음이지만 조선말로 한 여인을 소개시켜 달라고 만날 때마다 조른다. "아적도 `서녕` 어디메 사는지 몰라? 찾아서 내래 산삼준다고 해..." `서녕`은 한국의 어느 양궁선수의 이름인가 보다. 심마니 살레는 PFLP게릴라 시절 특수 공격대에서 병기계를 맡았었다. 각종 중화기에 능숙하고 그가 모르는 병기 모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7형제 중에 막내인 그는, 그의 나머지 여섯 형제 모두를 게릴라전에서 잃고 떠돌이가 되었다. 그는 그의 대부분의 형제들을 자 랑스럽게 여겼지만, 그의 맏형만은 늘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의 맏형 역시 PFLP게릴라 였는데, 이스라엘 북부 마아로트(MAALOT)촌의 한 학교에서 백 여명의 어린아이들을 인질로 삼고 팔레스타인 동지들의 석 방을 요구하다가, 이스라엘 특공대의 기습으로 교전중 수류탄에 맞아 사망했다. 어째서 맏형이 수치스러우냐는 내 질문에 얼굴이 조금 붉어진 그가 대답해 주었다. "어떠한 이유로든,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는 행위는 전사(戰士)로서 할 짓이 절대 못되고, 그를 자랑으로 여기던 사람들에게 끔직한 수치만 을 남겨주지. 형이 남긴 얼룩을 지우기 위해, 우리 형제 모두는 진짜 전사가 되고자 했어. 그러다가 나만 남은거야..." 각이진 붉은 얼굴로 인디언 혈통임을 주장하기도 하는 심마니 피어네 스는 빠른 눈과 날렵하고 소리나지 않는 움직임으로 척후에 능하다. 고 고학을 전공하면서 세계의 구석진 곳곳을 수 없이 돌아다닌 덕에 여러 지역의 풍물과 풍습에 익숙하며 반자동 카빈소총에 절대적인 솜씨를 갖 고 있다. 하지만, 산삼을 매우 좋아하는 덕에 심마니로서의 자질은 형 편없다. "신은 오늘도 나에게 산삼을 보여주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올 때마다 모두에게 던지는 말이지만, 우리 모두는 그가 가장 많은 산삼을 캐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있다. 캐면 그자리에서 먹 는다는 것도... 심마니 챠오룽은 러시아인 어머니와 중국계 아버지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구소련의 스페르나츠에서 한 시절을 보낸적이 있다. 병기광인 그는 모든 중무기에 헌신적인 애착과 욕심을 보인다. CIA에 포섭될 때 도 자신의 개인병기고를 허락해 줄 것을 포섭조건에 포함시킬 정도였 다.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 자신도 CIA에서 요구한 자료 들에 게으른 성의와 잠적으로 대응했다. 어떤 중화기가 가장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눈을 빛내며 자신이 개조한 캘리버 50을 자랑했었다. "이것은 개틀링식 중화기 모델로 구형이긴 하지만, 신형보다 화력에 있어 월등하지. 단점이라면 수냉식이라 이동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는 데, 내가 공냉식으로 바꾸면서 그 부분에 대한 난점들을 개선했어. 또 여기 양쪽으로 접혀 있는 날개를 펼치면 총알받이가 되어서 엄폐할 필 요도 없어. 최고지?" 심마니 엘 아스카는 이집트 출신이지만 회교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 엘 아스카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명한 이슬람교 사원에서 따 온 것이다. 이집트의 정보 부대 소속으로 있으면서 무선 통신 부분에 발군의 재질을 보인 적이 있었다. 각종 도청장비에 숙달되어 있고, 전 화선 바이패스 기법(전화도중 추적하거나 따돌리는 기법)에도 능통해 있다. 각종 정보 수집에 큰 도움이 되었고 사격도 제법 숙달 되어 있 다. 이 보물 단지가 우리 회사에 흘러 들어온 것은 그의 우스운 분노 때문이었다. 정보 부대 요원으로 군 생활을 마감했을 때, 그에게는 생 활 수단이 절실히 필요했었다. 그 때문에 ECC(이집트 통신 위원회) 면 허를 취득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그 는 통신 전문학교를 찾아 수업을 들었지만, 교사들보다 월등한 그의 실 제 경험들은 교사들을 창피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그 덕에 교사들의 시 샘섞인 무시와 학문적인 자만같은 조롱을 되받아야 했다. 어쨋든 교실 에서의 형식적인 수업은 그 자체가 그에게는 모욕이었고, 이 희한한 학 생은 재미없고 지루한 강의에 더 버티지를 못하고 ECC면허를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어째서 회교도도 아니면서 이슬람교 사원에서 이름을 따다 지었 느냐고 묻자, 그는 불만에 가득찬 어조로 대답했다. "지난 십 여년동안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무선 장비들을 실제적 으로 다루어 왔지만, ECC면허를 따지 못했지. 면허를 주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거든... 내이름도 마찬가지야. 비록 내 이름이지만, 내가 지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심마니 다얀은 팔레스타인인이었다. 10살 때 돌을 들어 이스라엘 군 인에게 던진 이후부터 그의 손에서 총기류와 화약은 끊임없이 다루어 졌다. 대형 폭탄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폭발물이란 단어를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치고 그 내부구조를 다얀이 모르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다얀의 가치는 폭발물 제조및 설치 뿐만이 아니라, 열 살 이후부터 쌓여진 게릴라 전사로서의 그의 경험에 있다. 그가 들려준 게 릴라 전사는 나에게도 감명 깊은 것이었다. "게릴라는 야간 전사다. 그는 야간 작전에 필요한 여러 자질을 갖추 고 있다. 그는 교활하며, 전장의 언덕과 골짜기를 누비고 다녀도 존재 를 노출시키지 않는 조심성을 지니고 있다. 기습의 공포를 적들에게 이 용할 줄 알고 있으며, 동료들 앞에서는 나약함을 보이지 않는다. 귀순 한 포로에게는 친구처럼 너그럽고 부상병에게는 아버지처럼 부드럽지 만, 폭풍처럼 적을 습격해서 심판 받아야 할 이를 가차없이 처단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대담무 쌍하지만 작전의 위험과 가능성을 정확하게 판단할 줄 알고, 환경에 대 한 적응능력이 있으며,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이 약삭 빠르다. 굶주림과 갈증, 의복과 은신처의 부족, 자연 치유력 하나로 버텨야만 하는 부상과 질병, 극도의 피로가 몰려올 때 지금까지 걸어온 길 보다 더욱 먼 거리를 가야만 하는 절망... 이 모든 것들을 입가에 띄우는 씁 쓸한 미소 정도로 극복한다. 정신적으로 언제나 강하며 따라줄 수 있는 육체의 단련 역시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가 전사(戰士)다." 버지니아의 산골짜기에서도 해는 서쪽 봉우리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 붉은 노을이 어린아이의 낼름거리는 혓 바닥처럼 흔들거리며 바람같은 구름사이로 휘파람을 그려주고 있는 듯 했다. 블루 마운틴 골짜기의 인적없는 어느 절벽아래에 열 두 명의 사내들 이 도착했다. 블루 마운틴의 대부분의 흙은 검고 곱고 부드럽지만, 이 절벽아래의 흙만은 예외다. 투명하고 굵고 거칠다. 조심스럽게 흙들을 살피다 보면 어린아이 새끼 손가락 굵기의 육각형 수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 회사의 기초기지가 마련되어 있다. 내가 포함된 열 두명의 전사들은, 블루 리지산중의 깊숙한 절벽아래 에서, 각종 화기및 장비들과 더불어 자신들의 감각을 정비했다. 삼각측 정으로 거리와 높이를 재어 보았고, 몇 장의 표적지에 서 너개의 구멍 을 뚫어 주면서 사격을 했으며, 스코프와 탄도 그래프로 탄착 지점을 재조정했다. 만지작 거리던 화기들에 새로 기름을 먹여주고 필수장비와 부대장비들을 챙겨보며 목록도 만들어 갔다.. 나이론 방수우의는 맨 밑 으로, 그 위에 그물침대, 침대를 덮는 막사지붕으로 이용될 나이론은 그 위에, 나이론의 네 귀퉁이를 묶어 작은 야영텐트를 만들어줄 수 있 는 노끈 뭉치는 가솔린 통과 함께 오른쪽 주머니에... 아프리카 지역 출장시에는 반드시 챙겨야 할, 풍토병과 말라리에 대비한 키니네는, 보 스니아에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페니실린, 아스피린, 설사약, 항독제 등은 나침판과 함께 왼쪽 주머니에... 물론 이런 장비들을 보스니아로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이용할 화기들과 장비들을 점검해서 사용 되어질 것들의 목록만을 작성 할 뿐이다. 이 목록들은 우리가 잠자리에 들기전에 중동 본사로 팩스될 것이고, 회사와 보스니아 회교계의 긴급한 협조로 사라예보 인근의 베 이스 캠프에 목록대로 마련되어 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로우녹 에어포트에서 오후 6시 55분 발 놀스 웨스트 항공으로 저녁 9시에 디트로이트에 도착했다. 디트로이트에서 저녁 9시 40분에 암스테르담행에 올랐고, 하늘에서 놀스 웨스트가 서비스한 쇠고기 튀김 을 먹었으며, 네덜란드 시간으로 오전 11시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암스테르담에서 오후 2시 45분에 유로피안 캐리어(KLM)를 이용해 로마 로 날았다. 이태리 시간 오후 5시 5분에 로마에 착륙한 열 두명의 사내 들은 `아프로 다이테` 대중탕에서 X랄 사이에 잔뜩 낀 때를 왕복 운동 으로 밀어냈고, 하루를 쉬며 여독을 풀었다. 다음날 오후 4시 50분에 하루에 한 번 밖에 없는 리미니(RIMINI)행 에비아 노바(ABIA NOBA:이태 리 항공사 이름)를 탔고, 오후 6시 15분에 리미니 공항에 내렸다. 리미 니에서 7마일 떨어진 산마리노까지는 택시로 10분 정도 걸렸고, 맨 몸 으로 도착한 산마리노에서 곧바로 바이킹 밀수 라인에 몸을 재워, 아드 리아해를 가로 질렀다. 달마티아 제도 끄트머리의 두브로브니크에서 우 리는 마침내 보스니아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제 곧 사라예보 인근의 어느지역에 마련된 베이스 캠프에서 육백만불 짜리 청부가 시작되겠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철도와 도보로 베오르가드에 스며든 열 두명의 군 대가, 회교계 자선 단체가 준비한 식량을 적십자 마크가 찍힌 여섯대의 트럭에 나누어 싣고, 사라예보와 공항간 도로의 중간 지점을 통과할 때 였다. 노란색 바리케이트가 도로를 막고 있었다. UN 평화 유지군이 설 치한 프랑스 검문소였다. "어디로 가십니까?" 황갈색의 제복을 입은 초병이 영어로 묻자, 운전석의 베셀이 불어로 대답했다. "사라예보에 들어가는 중입니다. 회교계 자선단체의 식량 수송 차량 입니다. 여기 통과증과 구호품 명세서..." 베셀이 능숙한 불어로 대답해주자, 프랑스 병사가 하얀 치아를 드러 내고 구김살 없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미소 띤 병사는,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회교계의 적십자 도장이 찍힌 통과증만 자세히 들여다 보았을 뿐, 구호품 명세서와 트럭안의 구호품은 간단하게 둘러 보는 듯 했다. "통과!" 불어였다. 사라예보 TV 중계소가 그리 멀지 않은 젤라스니카 산 아래 숲 길에 서, 회사에서 파견한 길잡이 베고비치와 접선했다. 나머지 수송은 베고 비치와 동행한 회교계 자선단체에서 보내온 열 두명이 대신했고, 트럭 에서 필요한 장비들만 꺼내어 챙긴 열 두명의 전사들과 베고비치는 젤 라스니카산 안의 계곡에 마련된 캠프에 도착했다. 캠프에는 회교계에서 보내준 나단이라고 하는 작달마한 보스니아인이 알아 듣기 애매한 지역 방언과 함께 눈물까지 흘리면서 다가와 인사했 다. "나단은, 회교계의 모든 병사들 중, 사라예보 인근지역의 세르비아군 진지에 대해 가장 정통해 있읍니다. 지금 몹시 반가와 하고 있어요. 고 라제시의 포격으로 그의 어머니와 형이 포탄에 사망했고, 아버지는 중 상을 입었지요." 회색눈의 베고비치가 나단을 소개해 주었다.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끝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인사보다 절실한 휴식이 필요했다. 나단도 그 점을 이해하고 있는 듯, 침구가 가지런히 준비 된 캠프안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2조로 나누어 교대로 잠을 자며, 해가 떨어질 때까지 휴식을 가졌다. 피로를 정리한 전사들은 지도 읽기에 들어갔다. 회색 눈동자의 베고 비치가 준비한 석 장의 지도에는 키릴문자(보스니아에서 사용되는 러시 아 문자) 가 빨간 줄로 그어진 대신, 그 밑에 영어로 첨자가 새로 매겨 져 있었다. 목표는 사라예보 인접 전략 고지인 이그만 산내의 세르비아군 진지였 다. 고라제시 민간인 포격의 선봉이기도 했던 이그만 산의 깡패들이 없 어지면, 세르비아 군에게 포위되어 고립 상태에 빠진 사라예보에 이그 만 산 밑으로 두 개의 통로가 새로 열려지게 되겠고, 찡어진 자식들의 시신을 부등켜 안고 울던 어머니들을 달래줄 수도 있겠다. 나단이 시토 방언(세르보-크로아티아 언어로 베오그라드 지방을 중심 으로 사용되어지는 언어)으로 지도상의 이곳 저곳을 가르키며 알아 듣 지 못하는 지엽적인 설명을 하면, 회색 눈동자의 베고비치가 영어로 알 아 듣게 설명해 주었다. "약 오백명의 대대 병력으로 이곳에 다단두 로켓포, 요곳에 야포, 저 곳에 중포, 그리고 여기엔 기관포 참호가 있고, 가로 400, 세로 300, 120000 평방 미터의 진지내의 요 곳엔 헬기 1대, 이 곳과 조 곳에는 감 시용 망루..." 지도 읽기를 마치고 침투경로를 숙의했고, 미안했지만 내가 결정했 다. "젤라스니카산 능선을 따라 팔레를 돌아 이그만 산을 오른다. 이동 은, 21시에서에서 06시 이내에, 밤부터 새벽까지..." 트럭에서 꺼내 온 장비들에 마지막 기름칠을 했다. 나와 베셀 파아잘 그리고 아론이 매만지고 있는 저격용 라이플은 중 동의 무자히딘이라는 노인이 유별나게 만든 것으로, 총열은 M-18보다 길고, 방아쇠와 노리쇠, 총알 뒷 부분의 장약을 때려주는 공이쇠는 아 카보(AK) 스타일이며, 개머리판은 괴목을 이용해서 아카보보다 4센티 정도 길게 만들어져 있다. 격발시 총구의 화염을 줄이기 위해서 소염기 는 앞 쪽에 붙였고, 이동 편의를 위해 가스활대는 떼어냈다. 총알은 충 분히 긴 장약에 특수화약을 넣어 만든 5.5미리 납탄으로 장거리 저격용 이었다. 사 오백미터안에서 반지름 1.5센티의 타겟이 전자 야간 투시경 에 걸려들면 그 즉시 사망일테고... 중무기 사수 웨이즈가 등짝에 비스듬이 메고 있는, 길이 1.52미터, 무게 15 키로그램의 길쭉한 물건은 미국의 제너럴 다이내믹스사가 종래 의 로켓포인 `레드 아이`를 대체한 것으로 미사일 발사관 제동장치등으 로 나뉘어 지는 스팅어 미사일이겠고... 중화기 전문가 살레 역시 박격포 우지를 어깨에 걸어 메었고, 병기광 차오룽 또한 자신이 개조한 캘리버 50을 짊어 졌다. 폭발물 전문가 다얀은 길이 25센티의 길쭉한 막대형의 중앙에 둥근 쇠구슬 모양의 뇌관이 들어 있는 플라스틱 폭탄을 조심스럽게 챙겼다. 방탄 헬맷에 달려 있는 PNVS(야간 투시경)를 눈에 붙이고 있는 척후 담 당 인디언 피어네스와, 덤덤탄의 마가로프 9미리 소음 권총을 엉덩이에 찔러넣고 있는 데오도르를 포함한 나머지 동료들 모두는, 옆 구리에 G11 자동 소총을 걸었다. 서독의 헤글러사와 코흐사에 의해 제작된 G11 은 가볍고 짧지만 명중률이 높고, 탄창을 끼우지도 않으며 탄피도 튀어 나오지 않는다. 6백 14발이 장전되어 있고, 무게는 7.35키로그램이며, 전자 야간 투시경도 붙어 있다. 자동 소총이지만, 동료들은 수평으로 혹은 45도 하방으로 무식하게 긁어대는 짓 따위는 좀처럼 하지 않는다. 대부분 수동에 걸어놓고 한 방에 한 명씩으로 자존심을 지킨다. 밤길 산길을 헤치면서 40키로 그램의 장비들을 이고, 별 빛과 PNVS (야간 투시경)의 신세를 지며 우리는 9시간 동안 50키로미터 정도를 이 동했다. 세르비아 군 진지가 내려다 보이는 이그만 산 팔부 능선에서 나뭇가지들을 자르고 노끈으로 이어 은신처를 만들었을 즈음, 해가 떠 오르기 시작했다. 안내인 나단을 포함해서 열 두명은 은신한 나뭇잎들 속에서 코만 내놓고 잠이 들었고, 파아잘이 나무위에서 보초를 섰다. 두 시간 뒤에는 파아잘 대신 내가 섰고, 또 두 시간 뒤에는 베셀이, 마 지막 두시간은 아론이었다. 오후 네 시에 우리는, 인스턴트 깡통들이었지만, 충분한 식사를 했 고, 나무 이파리 속에서 어기적 거리며, 두 어 시간동안 세르비아 진지 와 고사포와 기관포가 배치된 참호들을, 지도에 표시된 방어초소들과 비교해 보며, 세세히 살폈다. 병풍처럼 휘어진 언덕 중앙부 두 곳에 대포 2문이 정면을 겨누고 있 었고, 대포가 위치한 언덕에서 이백여 미터가량 내리막진 곳이 끝나는 곳에, 세르비아군 진지가 평탄하게 펼쳐져 있었다. 언덕 가까이 진지 오른쪽에는 다섯개의 반원통 모양의 막사가 나란히 줄지어 보였고, 그 왼쪽 오십미터 지점에 식당일 듯한 통나무식 건물 두 채, 다시 왼쪽 백 여미터 지점의 철조망 옆에 기관포 참호가 망원렌즈에 잡혔다. 왼쪽 철 조망 바깥에는 사백미터 정도 평탄하게 구릉져 내려간 곳에 야포 산호 참이 포문을 겨누고 있는 것도 보였다. 진지내 중앙의 덩그런 연병장 앞에 헬기 한 대와, 헬기 앞 육 칠십미터 지점에도 기관포 참호가 있었 다. 언덕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정문 초소의 왼쪽 오른쪽 백여미터 지 점에, 높이 솟은 망루가 비탈져 내려간 철조망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두 망루 사이에 설치된 다단두 로켓포가 겁을 주었고, 막사들 바로 앞 오른쪽에도 기관포 참호가 또 있었다. 안내인 나단이 언급한 대로, 진지 바깥 오른쪽과 정문 초소 전방 500미터 지점에도 중포 산호 참이 있었고, 부대 바깥 좌 우의 두 곳에도 방어초소들이 내리막진 정 면을 겨누고 있었다. 정찰을 끝낸 열 두명의 군대는 부대 주변의 지형을 논하며, 부대 바 깥의 기관포 곡사포 참호등의 방어초소 공략을 위한 1차 공격 계획을 세웠다. 1차 공격 작전에 따른 위치 배정과 임무 할당을 끝내고, 철조 망내 진지의 포위 섬멸에 관계된 2차 공격 계획을 논의했다. 위치 설정 과 타겟에 대한 순 번이 매겨지고 작전을 완료하자, 두 시간 가량이 더 흘렀다. 짙은 어둠은 이그만 산을 벌써부터 덮고 있었다. 어둠과 나무 이파리에 숨겨진 전사들이 야간투시경의 도움으로 움직 이고 있었다. 산 중의 밤은 캄캄했고 조용했다. 산 거머리 한 마리가 검은 전투복의 어깨를 가린 나뭇잎 위에 달라 붙어 있었다. 잎사귀를 뜯어 조용히 내려 놓고 포복을 가만히 계속했다. 공중 전화 부스처럼 서 있는 경비초소와 기관포가 설치된 통나무 바리케이트를 살폈다. 초 소안의 두 명과 통나무 바리케이트안의 두 명은 이미 확인 되었다. 통 나무 바리케이트와 초소의 간격은 5미터였다. 바리케이트 7. 8미터 전 방의 어린아이 키만한 소나무에 걸려있는 전구 빛이, 초소 좌측에도 희 미하게나마 전해오고 있었지만, 노끈을 이용해 나뭇잎으로 전신을 가리 고 있는 터라, 초소 좌측의 창 옆으로 조심스럽게 붙을 수 있었다. 후 덥지근한 날씨탓으로 유리 대신 방충망 만이 닫혀져 있어서, 창 깨지는 더러운 소음을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왼 손으로 받쳐 든 오른손 에 쥐어진 마가로프 소음권총이 제 역할을 하는데 지장없는 위치였다. 통나무 바리케이트 뒤 쪽으로 접근하고 있던 살레 역시 뒤 쪽 통나무 밑으로 위치를 잡았다. 사 십여 미터 떨어진 고목나무 위에서 PNVS로 상황을 엄호하던 파아잘이 야광판으로 OK사인을 보냈다. 총을 든 병사가 대응 사격을 할 수 있는 간격은 보통 빠르면 1-2초 정도다. 따라서, 현장 상황의 실시에 있어, 1차 사살의 시작과 마감은 1초를 넘기지 말아야 하며, 2차 확인 사살 역시 1초내에 끝내야 안전하 다. 1차 시작과 2차 마감을 2초 내에 완결 지을 줄 안다면 프로겠다. "퓨슝!퓨슝!" "커억! 컥!" 두 명의 목 부위를 겨냥한 1차 사살이었다. 간격없이 2차 확인 사살 로 이어졌다. "퓨슝!퓨슝!" 죽어 가고 있던 두 병사의 이마에 덤덤탄(살속에 산탄처럼 파고들어 치사율이 배가된다.) 두 발이 추가로 적중되었지만, 이미 성대가 구멍 난 두 세르비아인은 아무런 소음도 만들지 못했다. 창 옆 맞은 편의 의 자에 앉아 있던 한 명은 목과 이마 한 복판에 덤덤탄을 한 발씩 맞았 고, 창 옆에 있던 한 명은 목과 머리가 옆 쪽에서 뚫렸다. "퓨슝!퓨슝! 퓨슝!퓨슝!" "억! 허억!" 초소에서의 실시와 동시에 실시된, 통나무 바리케이트 안에서도, 살 레가 저지른 상황은 비슷했다. 다만, 바리케이트 안의 두 시체는 뒤 쪽 에서 앞 쪽으로 구멍이 났다는 점이, 초소안에서 종료된 결과와 구별되 었다. 언덕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대포를 사수하는 또 한 군데의 반대편 바 리케이트를 공략하기 위해 이동했다. 이동의 와중에서 잡담하던 보초 두 명을 잠잠히 제거했고, 반대편 초소에 무사히 접근했다. 현장 상황 은 조금 전과 비슷했고, 실시 또한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사살의 시작 과 마감이 약간 더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일한 상황에서의 반 복 효과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이제는 대포가 남았다. 카멜레온의 껍데기같은 나무 이파리 속에서 검은 전투복과 마가로프 를 지형에 감춘채 우측에서 접근해 갔다. 조심스러운 포복은, 정면을 겨누고 있는 대포의 아가리 밑으로 기어드는데, 성가신 문제점을 만들 지 않았다. 대포의 왼 편에서 기어든 살레도 자세를 잡았다. 오십여미 터 뒤쪽에서 저격 렌즈에 눈을 맞추고 대포 입구를 엄호하는 파아잘이 야광판으로 OK사인을 보냈다. 밧데리에 의지한 희미한 전구 불이 대포 의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사각으로 반듯하게 뚫려진 구멍으로, 머리 통 두개와 마가로프 소음 권총을 따로따로 쥔 손 두개가, 동시에 파고 들었다.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에 얌전한 소음이 있었다. 오른쪽에서의 두 번은 내 것이었고, 왼쪽에서의 두 번은 살레 짓이었다. "퓨슝!퓨슝! 퓨슝!퓨슝!" "학! 컥!" 오른쪽의 졸다가 눈을 번쩍 뜬 한 명과 왼쪽의 자면서 그대로 영원한 잠속으로 빠진 또 한 명이, 목부위와 이마 한복판에 덤덤탄을 박고, 간 결하고 조용한 신음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이승에서 하직했다. 3-4분후, 약 이 백여미터 우측의 언덕위에 설치된 또 한 군데의 대포 아가리 밑에서도 나와 살레는 똑같은 소음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퓨슝퓨슝! 퓨슝!퓨슝!퓨슝!퓨슝!" "큭! 끄윽! 헉!" 다만, 살레가 두 번 더 추가했고, 이번에는 오른쪽에 한 명 왼쪽에 두명, 도합 세 명이 출세(세상을 떠남)했다. 부대 바깥의 대포 기관포 곡사포 방어 초소들이 있던 다섯 곳의 장소 에서 PNVS(적외선 야간 투시경)를 착용해야만 알아볼 수 있는 적외선 야광 사인들이 반짝 거렸다. 소음없이 치루어 내야만 하는 1차공격은 실수가 없었나 보다. 이제 그다지 어려울 리 없는 철조망 안의 청소만 깨끗히 해주면 되었다. 나와 열 한 명의 동료들은 2차 공격계획에 따른 위치를 만들며, 자신 의 화기들을 점검했다. 위치 선정과 병기설치가 완료되었다는 신호가 떠올랐다. 진지 뒤 쪽의 언덕은 진지 내의 병사들에게는 잔인한 언덕이 될 것 같다. 언덕에서 정면 마이너스 15도 각도로 내려다 보이는 병영은, 스팅어 미사일의 웨이즈, 우지 박격포의 살레, 베셀, 파아잘, 아론, 그리고 나 를 포함한 네 명의 장거리 저격수에게는 너무나 편안한 위치였다. 게다 가, 석회질 성분이 많은 이그만 산의 카르스트 지형은, 저격수들이 가 장 좋아하는 `서서 쏴` 자세에 안성마춤인, 볼록한 바위에 가려진 오목 한 장소들을 드물지 않게 제공하고 있었다. 진지 중앙에서부터 눈대중으로 사백 미터 정도 떨어진 언덕의 왼편에 자리를 잡았다. 거리계로 정확히 측정해 보니, 가장 가까운 왼편 언덕 아래에 설치된 부대 왼쪽 철조망이 184미터 였고, 부대 왼편 중앙에 위치한 기관포 참호가 342미터 였으며, 정문초소 왼쪽의 망루가 437미 터였다. 이곳까지가 저격수로서의 나에게 할당된 영역이다. 내가 위치 한 곳의 100미터 오른쪽 언덕에는 파아잘이, 파아잘의 오른편 100미터 지점에는 베셀이, 그리고 가장 오른쪽 언덕에는 아론이 자리를 잡을 것 이고, 네 저격수의 전방 500미터 내에서 지름 3센티의 표적을 보이는 세르비아 병사는 죽게 된다. 네 저격수의 사정권 안에 부대 전체가 담 겨져 있었다. 스팅어 미사일의 웨이즈 역시 부대 뒤편의 언덕위에 자신의 중무기를 옮겨 놓았다. 베셀이 위치한 곳의 뒤쪽 500 여미터 떨어진 곳, 그러니 까, 부대 중앙 으로부터 800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웨이즈는 다단계 로 켓포, 중포, 헬기, 기관포, 막사, 순으로 미사일을 쏘아댈 것이다. 박 격포의 살레는 파아잘 뒤쪽 100 여미터 지점에 자리를 잡게 되겠다. 그 역시, 2차 공격 계획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참호들을 순차적으로 때릴 것이고, 부대 내에서 네 명의 저격수의 탄알을 가려줄 수 있는 모든 엄 폐물들을 가루로 만들어 놓고 말 것 같다. 언덕 아래 병영을 두르고 있 는 철조망내에서는, 어떤 벽도 미사일과 박격포에 견딜 수는 없을테고, 두 중화기 전문가들의 조준 또한 빗나갈 리 없겠다. 부대 앞 쪽의 내리막 200미터 지점에는, 중앙에서 차오룽이 캘리버 50으로 정문초소를 노려보기로 했고, 차오룽의 왼쪽 오른쪽으로 나머지 동료들이 분산배치 되어 철조망 주변을 겨누기로 했다. 부대 정면의 시 야를 차단하는 나무들을 세르비아 병사들이 이미 베어 버린 탓에 아마 도 나의 동료들은 손쉬운 사냥을 하게 될 것 같다. 뿌리채 뽑힌 나무 들이 남겨 준 오목한 구덩이들은 동료들에게 적당한 사격장소가 되겠 고, 그곳에 자리한 동료들이 나무들의 뿌리뽑힌 한(恨)을 갚아줄 지도 모르겠다. "콰앙! 쿠앙!" 웨이즈의 미사일이 병영안의 다단두 로켓포를 때린 것을 시작으로, 살레의 박격포가 거의 동시에 왼쪽 기관포 참호를 박살냈다. 웨이즈의 미사일이 부대 오른쪽의 야포진지를 때리고 박격포가 부대 오른쪽의 기 관포를 때렸을 때, 비로서 내가 할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에 걸려 있는 라이플의 저격렌즈에 비해, 시야가 넓은 왼쪽 눈의 PNVS(야간 투시경)로 병사들을 찾았다. 허둥거리는 병사 하나가 PNVS에 걸렸다. 착시였다. 오른쪽 눈에 걸려 있는 저격 라이플의 적외선 렌즈를 병사에게 이동 시키고, PNVS의 왼쪽 눈을 감았다. 병사의 머리끝에서 슬며시 내려가던 지름 3센티의 원안에 병사의 치명적인 부위를 담았다. 조준이었다. 손가락을 가만히 당겼고 병사의 허물어진 이마를 확인했으며, 병사에 게서 불안한 공포를 해방시켜 주었다고 자위했다. 사살이었다. 저격렌즈의 오른쪽 눈을 감은 대신, PNVS의 왼쪽 눈을 다시 떳다. 착시-조준-사살, 착시-조준-사살, 착시-조준-사살... 사살과 착시의 간격은 3-4초, 착시와 사살의 간격은 1초. 네 명의 저격수들이 위치한 곳으로부터 500미터 안에 있는 병사들이 4-5 초마다 한 명씩 쓰러져 갔다. 웨이즈의 미사일이 막사들을 때리고 있어서 인지, 저격수들은 조금 더 바빠졌다. 착시-조준-사살, 착시-조준-사살, 착시-조준-사살... 사살과 착시의 간격은 1-2초, 착시와 사살의 간격은 변함없는 1초. 가만히 당기고 있는 여유로운 손가락이었지만, 재빠르게 움직여야 하 는 눈동자는 한가할 수가 없었다. 연이어 전해지는 어깨의 반동에 조준 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스코프에 눈을 더욱 바싹 가져다 대었다. 진지내의 병사들도 이리뛰고 저리뛰며 발악같은 총질을 해대며, 깜박 이는 불꽃들을 열심히 튀기고는 있었지만, 반격이라고 하기엔 너무 애 처러워 보이는, 포위된 공포를 지우기 위한 겁먹은 푸닥거리 같은 것이 었다. 언덕 저편에서 고요히 날아드는 죽음의 알맹이에, 하나씩 죽어 가는 전우의 옆 모습은, 진지내의 병사들에게 죽음보다 견디기 어려운 공포 였을게다. 병영안의 중화기들은 이미 못 쓰게 되었고, 그들의 구 닥다리 소총만으로 열 두명의 군대를 겨눌 수는 없었다. 그저 날아가는 파리에 총질하듯이, 죽어가는 병사들은, 그렇게 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엄폐할 곳을 찾기도 했지만 살레의 박격포와 웨이즈의 미사일은 개미집을 쑤시는 개나리 작대기 처럼 그곳에서 그들을 죽이거나 뛰쳐 나오게 만들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며 공포에 발버둥치는 개미들을 네 명의 저격수들은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죽이고 있었다. 진지내의 개미 같던 병사들이 부대 정문쪽으로 도망해 보겠다고 애쓰 기도 하였지만, 부질없는 시도였다. 차오룽의 캘리버 50은, 정문쪽에서 쏟아져 나온 쑥색 군복들을 걸레조각 처럼 뚫어 놓았다. 몇 명의 운 좋 은 병사들이 저격수들의 시야를 벗어나, 부대를 둘러싼 철조망까지 접 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의 운은 철조망에 걸린 채로 넘어가 주지 를 못했다. 철조망 바깥에서는 G11에서 쏘아져 나오는 한발 한발들이 그들의 운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사살과 착시의 간격이 다시 길어지고 있었다. 포위된 적들에게 가장 가공스런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살레의 박격포가, 미사일이 만들었던 구 덩이들을 이곳 저곳 다시 때리자, 몇 번 더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웨이즈의 미사일이 무너진 건물들을 재차 난도질을 해대었을 때, 역시, 몇 번 더 방아쇠를 당겨 볼 수 있었다. 도살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사격을 잠시 멈추고 왼쪽 눈의 PNVS자리에 시야가 훨씬 넓은 거리계의 파인더를 갖다 대었다. 무너진 통나무 더미들 사이와, 부서진 건물 구 석 몇 곳에 살아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완벽한 시체가 되지 못한 쑥 색 군복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맥주 캔만한 조명탄을 진지 중앙 하늘위로 쏘아올렸다. 부대안을 대 낮처럼 비추며 하강하는 불빛들이 이국의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지 면으로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착시-조준-사살, 착시-조준-사살... 간격은 필요 없었다. 정확한 조준으로 불편한 몸뚱아리들을 완벽한 시체들로 바꾸어 주는 작업이었다. 몇 명의 살아 남은 병사들이, AK소 총의 개머리판에 군복 상의를 벗어 걸고, 부대 가운데의 공터로 걸어나 왔다. 열 두명의 군대는 사격을 중지했다. 세 명, 네 명, 다섯 명... 기어 나오기도 했고, 부축 받으며 나오기도 했다. 패잔병의 수가 열 다 섯이 될때까지 10여분이 걸렸고, 30여분을 잠잠하게 더 기다려 주었지 만, 부대 중앙에는 여전히 열 다섯 뿐이었다. 착시-조준-사살, 착시-조준-사살. 사살과 착시의 간격은 1초, 착시와 사살의 간격도 1초. 잔인한 언덕에서 다시 시작된 사격은, 초침이 열번을 움직이기도 전 에, 가련한 열 다섯 명을 완전한 시체로 만들어 버렸다. 폐허가 되다시피한 병영안의 수색은 수색이랄 것 까지 없었다. 부상 자도 없었고 생존자도 없었다. 오백여구의 시체들만 오로지였다. 열두명의 군대는 청부를 끝냈고, 이그만 산을 떠났다. 젤라스니카 산 밑의 숲 길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호물품 운반 트럭은 비워진 채로 열 두명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을 대신 몰고 왔 던 회교계의 심부름 꾼들이 안내인 나단에게 몰려 들어 크로아티아 방 언으로 무엇인가를 묻자, 안내인 나단이 고개를 떨구어 흔들며 반복해 서 중얼거렸다. "나하니아트 게로아 보이트 두다시. 니하니아트 게로아 보이트 두다 시..." 내가 의아해진 얼굴로 베고비치를 쳐다보자, 베고비치가 신음같은 통 역을 해주었다. "지상에서 가장 잔인(殘忍)한 군대..." 전사(戰士)들의 탄알은 돈에 팔릴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전사들의 잔인(殘忍)은 돈으로 거래 되어 지지는 않는다. 오백이 넘는 대대 병력 의 세르비아계 병사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몰살해 버린 잔인(殘忍)은, 육 백만불에다, 파편으로 찡어진 어린아이의 쓰라린 살점과, 어머니의 눈물을 보태 준다고 하더라도 지나친 것이었다. 하지만, 전사들은 차원 높은 지옥에 가게 될 지라도, 잔인하기로 했 었다. 잔인(殘忍)은, 보스니아 내전은 물론 지구상의 어떤 전쟁에서라도, 고의적으로 민간인에게 포격을 한 깡패는 살아 남기 어려울 것이란 경 고였을 수도 있겠다. 그럴듯한 변명으로 세계인들에게 적당한 우연으로 위장하는데 성공했 을지라도, 민간인 포격이 고의적인 것이었다면, 전사들의 잔인(殘忍) 은, 단 돈 육 달러에 팔릴 수도 있을 것이고, 포격을 즐겼던 사람은, 죽어야 할 것이다. 이그만 산에서 흙이 되고있는 오 백여구의 주검들처 럼... 회교계가 전사(戰士)들의 잔인(殘忍)을 보았고, 세르비아계는 경험했 다. 그래도 지구상에 알아야만 할 사람들이 더 있다면, 알았으면 한다. 잔인(殘忍)은, 민간인 지역에 대한 고의적인 포격이라면, 팔릴 만한 것 이란 것을... 사라예보를 왼쪽으로 끼고 흐르는 사바 강변을 따라 회교 점령 지역 인 두브로부니크항까지는 트럭과 도보였고, 두브로부니크에서 비행 금 지 구역 밖인 부다섬까지는 쾌속정을 이용했다. 부다섬에는 회사에서 준비한 전세기가 마중 나와 있었고, 열 두명의 군대는 하늘을 날아 로 마에 무사히 착륙했다. 나는 로마에서 서울로 가는 하늘의 여객선 대한 항공에 몸을 실을 수 있었고, 좋아하는 아가씨들의 풋풋한 서비스를 받 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음료수는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카트를 밀며 다가온 두 스튜어디스 양들의 생김생김이 좋았고, 그녀 들이 들려준 모국어도 반가왔다. 그리고 목이 약간 말랐다. "있는대로 한 잔씩..." "몽땅요?" 여인들의 활짝 웃는 얼굴을 마주보며 나 역시 상큼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부터 한동안은, 전사(戰士) `야마가따 사이찌`일 필요는 없겠다. 날렵한 오렌지 기사나 착한 과외 선생 `한 기석`이면 될 것이 다. 앞 좌석의 뒤에 붙은 받침대를 무릎위에 펼치자, 친절한 아가씨들 은, 한 잔씩, 한 잔씩 성의껏 따라주고 있었다. 고개숙인 그녀들의 목 덜미가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은, 내가 엉큼해서인지도... (4) 접촉사고 "아이! 왜 이렇게 막히지!" 구기터널을 지나 역촌 오거리 방향으로 빽빽하게 늘어선 차량들 속에 는 하얀색 엘렌트라도 있었다. "운전 잘 하는데... 다리도 예쁘구..." "놀리지 말아욧! 늦었는데, 신경질나게스리..." 느릿하게 구르는 하얀색 엘렌트라에서 붉은색 가죽 시트에 몸을 파 묻으며 다시 현주의 비위를 긁었다. "공기도 좋고, 골반 바지는 짧아서 예쁘고, 바지 아래 넓쩍 다리는 만지고 싶고..." "앗! 어따가 손을 넣는 거야... 오빠 얼른 빼! 나 부딪힌단 말야!" 현주의 허벅지 위쪽을 쓰다듬던 손바닥이 허벅지 아래쪽으로 미끄러 지며 엉덩이 부위로 파고 들었다. "그냥 빼면 섭섭할거야..." "앙! 난 몰라!" "알았어! 조금만 주무르다가 뺄께. 탱탱한 것이 너무 좋다..." "빨랑 빼지 못해! 나 차 세울거야!" "손이 안 빠지네... 엉덩이에 깔려서..." 현주가 오른쪽 엉덩이를 슬쩍 들어 주었지만, 엉덩이 밑의 손은 더욱 깊숙이 파고들 뿐이었다. 현주가 다시 엉덩이를 내리깔며 손바닥의 진입에 저항했다. "아잉! 거기까지만... 더 파고들면 나 정말 운전 못해." "그러지..." 역촌 오거리 못미쳐면서 엘렌트라에 속도가 붙자, 현주의 살집에 눌 려 있던 손을 그제서야 뽑아냈다. "손바닥에 주름이 다 졌네. 너 엉덩이 꽤나 단단하다. 무겁기도 하 구..." "오빤 다 좋은데, 쓸데 없는 짓 좀 하지마. 그럴 땐 멍청해 보인단 말야." "참고할께... 은영이란 친구네 집은 아직 멀었니?" "조금만 더 가면 돼." "내가 그 집에 가도 정말 쑥스럽지 않은거니? 난 수줍움이 많은 편이 라서..." "그렇다니까! 걔네 부모님들 모두 미국 언니네 가셨고, 오빠도 기말 시험 중이라, 학교 도서관에서 밤샘한대..." "그 집안 잘 나가는 집안이네... 그런데, 너는 왜 일어 필기를 안했 니?" "난 오빠 만나느라고 바빠서 못했다고 했잖아." "어이구! 누가 들으면 대단히 자주 만나는 줄 알겠다." "오빠 만나는 날엔 꼭 일어가 들어 있는 날이더라구. 그러니, 오빠가 내 일어 책임져야 돼." 일어 필기를 못 한 현주가 기말시험을 앞 두고 은영이란 같은 과 친 구에게 일어 노우트를 빌리기로 했었다. 현주는 그 보답으로 나를 그녀 들의 일어 선생으로 데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때마침 은영의 집이 비어 있는 터라, 그 곳에서 그녀들의 일어를 도 와 주기로 했었다. "은영이라는 애 이쁘니?" "가서 보면 알잖아!" 옆 눈을 흘기던 현주가 신사 오거리 못미쳐, 지하철 공사가 끝나는 부분에서 그녀의 엘렌트라의 속도를 죽이고 있었다. "저기서 꺽어지면 돼." 그녀가 가리킨 곳은, 명성 상회란 간판이 붙어 있는 골목 입구로, 서 부 종합 시장 쪽으로 이어진 골목 입구였다. 4차선에 택시 한 대가 정지해 있는 관계로, 3차선의 엘렌트라는 택시 앞으로 꺽으면서 오른쪽 골목 입구에 진입해 들어갔다. 그 때였다. "쿵!" "어머나!" 4차선에 정지해 있던 택시가 출발하면서 3차선에서 꺽어지던 현주의 엘렌트라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박고 말았다. 택시의 왼쪽 앞 범퍼로 현주의 오른쪽 뒷 문짝을 우그려 놓았다. "이걸 어쩌면 좋아... 오빠! 저 택시 운전사가 잘못 한 거지?" "너도 3 차선에서 4차선을 무시하고 골목으로 직접 꺽어 들었으니까 잘못이 없진 않아. 바쁘니까 쌍방 과실로 끝내자고 해." 엘렌트라 밖으로 나선 현주가 이미 차 밖으로 나와 있는 택시 운전사 에게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조심하셔야지. 앞에서 꺽어지는 차 옆구리를 받으면 어떻게 해요!" 골반 바지 아래 곧게 뻗은 현주의 대퇴부로 눈이 가 있던 운전사가 고개를 쳐들고 만만치 않게 맞섰다. "아니! 이 아가씨가 정신이 있는거야! 3차선에서 그대로 골목으로 틀 면 어떻게 해?" 현주가 당연히 목소리를 더 높였다. "4차선에서 아저씨 차가 길을 막고 있었으니까 3차선에서 꺽은 것 아 니예요!" 주위의 구경꾼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할 즈음 내가 나섰다. "아저씨! 쌍방 과실로 여기서 끝내는 것이 어떻겠어요??" 그 때였다. 금테 안경에 턱이 뾰족한 아저씨 하나가 끼어 들었다. "이건 저 아가씨가 잘 못 한 거야. 3차선에서 4차선으로 끼어든 차를 직진하던 차가 받았을 경우, 그건 끼어든 차가 잘못한 것이야. 난 버스 운전사거든, 버스 운전사라서 웬만치 알어..." 묻지도 않았던 버스 운전사를 강조하던 금테 안경의 초싹거림을, 옆 에 서 있던 머리가 허연 아저씨가 받았다. "버스 운전사 말이 맞구먼... 아가씨가 잘못 한거여... 3차선에서 끼 어 들면 쓰나! 이건 경찰서에 가도 아가씨가 지는 거여. 어이구! 이 범퍼 모서리 껍질 벗어진 것 좀 봐!" 신이 난 택시 운전사가 툭 튀어나온 배를 한층 더 내밀며 목에 핏대 를 세웠다. "이거 오늘 아침에 새 칠 한 것 뽑아 온 거라구. 칠이 덜 말라서, 뒤 쪽에 회사 이름도 아직 써 넣지 못했어... 아가씨 어떡 할꺼야!" 구경꾼들의 간섭에 조금 주눅든 현주가 나에게 슬그머니 물어왔다. "오빠 정말 내가 잘못한 거야?"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그맣게 대답해 주었다. "택시 운전사가 더 잘못했어. 경찰서 가면 네가 이겨." "정말?" 현주의 의구심에 나는 간사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현주가 자신에 찬 어조로 입장을 분명히 했다. "쌍방 과실로 여기서 끝내시던가, 경찰을 부르시던가 아저씨가 양자 택일 하세요. 더 이상은 양보 못해요." 택시 운전사가 머뭇머뭇거리고 있을 때, 잘난 버스 운전사와 초싹거 리던 구경꾼들이 현주의 맨질거리는 다리를 훔쳐 보면서 택시 운전사를 부추겼다. "이건 아가씨 잘못이라구... 어딜 가도 뻔 한 거여..." "그래. 아가씨가 범퍼 값만 물어주고 여기서 끝내도록 해. 3차선에서 끼어들면 쓰나..." 지긋한 아저씨들 입장에서, 기둥서방 딸린 야한 아가씨의 엘렌트라 보다는, 꾸질꾸질한 택시 운전사 편이 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도 같았다. 망설이던 택시 운전사가 주위의 간섭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실수하고 있었다. "아가씨! 정말 경찰 불러야겠어?" "부를 테면 부르세요." "그럼 나 112에 신고한다." 잠시 나를 흘깃 돌아본 현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세요." 대한민국 경찰의 기동력이 좋아졌는지, 5분도 못 돼서 패트롤 카가 도착했다. 하얀 페인트로 바닥에 칠을 하던 경찰관에게 현주가 안심이 안 되는 지 상황을 설명하고 물었다. "누가 잘못한 거예요?" 경찰관이 도리질을 하며 대답했다. "어려운 상황이야. 여기서 잘 모르겠으니까, 교통 사고 조사반에 가 서 따져 봐." 경관의 도리질에 끼어들던 버스 운전사등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은평 경찰서 알아요?" 경찰관의 질문을 택시 운전사가 받았다. "네. 압니다." "그럼 거기 사고 조사반으로 가봐요." 현주가 머뭇거렸다. "난 은평 경찰서 모르는데..." 택시 운전사가 현주를 탐탁치 않게 한 번 쳐다보고 떨떠름하게 말했 다. "날 따라오면 돼요. 따라올 수 있어요?" 현주의 자존심도 보통은 넘었다. "왜 못 따라가요. 어서 가요." 멀찌감치 도망가던 택시가, 차선을 이리저리 바꾸며, 현주의 추격을 일부러 뿌리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나쁜 자식 같으니라구... 차 경주하는 것도 아니고...없어졌잖아. 오빠! 어떡하면 좋아?" "내가 길 아니까 천천히 가면 돼. 다음 신호등에서 우회전 해." 교통 사고 조사반 중앙의 둥근 테이블위에 중국집 배달보이가 철가방 에서 몇 가지 면류를 꺼내 놓았다. 두리뭉실한 경찰관들이 둘러앉아 식 사를 끝낼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려야만 했다. 게슴츠레한 눈빛이 거만해 보이는 담당경찰관이 현주와 택시 운전사 에게 자리를 권했다. "거기 앉고 당신부터 상황을 설명해 봐요." 지목당한 택시 운전사가 억울한 피해자같은 목소리로 상황 설명을 끝 내자, 이어서 현주 역시 비슷한 넋두리를 끝냈다. "아가씨는 누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설명을 막 끝낸 현주에게 태도 불량한 담당 경찰관이 반말로 묻자, 약간 주눅이 든 현주가 떠듬거렸다. "저는... 저는 쌍방과실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경찰관의 턱 짓에 택시 운전사가 여전히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이 아가씨가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담당 경찰관도 택시 운전사의 뻔뻔스러운 대답이 거슬렸는지, 굵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애?" 우물쭈물 거리던 택시 운전사가 어정쩡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 다. "저도 옛날에 그 비슷한 사고를 겪었는데, 그 때는 반대의 상황이었 요. 제가 삼차선에서 꺽어 들어갔고 옆 차선에서 직진하던 차가 제 차 를 받았어요. 그 당시에 제가 몽땅 물어준 적이 있었거든요." 경찰관이 또 물었다. "그 당시 당신 차를 받은 차도 정지했다가 출발했나? 아니면 직진하 던 중이었나?" "직진하던 중이었던 것 같아요." 두툼한 교통사고 판례집을 뒤적거리던 담당 경찰관이 판례집의 중간 부분 정도를 펼쳐 보이며 택시 운전사에게 말했다. "여기 읽어 봐. 당신이 저 아가씨 차를 들이 받은 것과 똑같은 상황 이야." 현주가 고개를 기울이며 택시 운전사가 읽고 있는 부분을 엿보려 하 자, 경찰관이 주의를 주었다. "아가씨는 볼 것 없고... 3차선에서 4차선으로 갑자기 틀면 되나! 잘 못 했지?" 경찰관의 엄포에 현주가 다시 목을 움추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잘못했어요." 묵묵히 판례집을 읽던 택시 운전사가 고개를 들자, 경찰관이 택시 운 전사에게 다시 물었다. "정지 했다가 2미터도 못 가서 저 아가씨 차를 받았다고 했지?" "네." "정지해 있던 차가 출발해서 10미터 이내에 들이 받으면, 옆 차선에 서 꺽어 들어온 차가 더 잘못한거야? 들이받은 차가 더 잘못한거야?" "제가 더 잘못한 걸로 되어 있네요. 저번에는 안 그랬는데..." "안 그렇긴... 그 때는 이미 직진하고 있던 차에 당신이 꺽어들어갔 으니까, 옆 차선에서 꺽어들어갔던 당신이 잘못한 것이었고, 이번에는 정지해 있던 당신이 꺽어들어온 차를 살피지도 않고, 출발하면서 들이 받았으니까, 또 당신 잘못이 큰거야. 그렇다고 아가씨도 잘못이 없진 않아. 3차선에서 4차선으로 갑자기 틀면 어떻게 해!" "잘못했어요." 현주가 경찰관의 큰 목소리에 유리해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얌전히 조아리자, 경찰관이 택시 운전사를 향했다. "이거 112에 신고했다고 했지?" "네." 택시 운전사의 풀죽은 대답에 경찰관이 안경을 고쳐 잡으며 동정을 표시했다. "그럼 봐 줄 수가 없게 됐어. 벌써 저쪽에 올라갔을테니까... 딱지는 떼야겠어. 2만원 벌금에 벌점 10점, 그리고 열흘 면허 정지야." "저도 딱지를 떼나요?" 옆에서 끼어든 현주를 돌아보며 구렁이같은 경찰관이 대답했다. "쌍방과실에서, 딱지는, 잘못이 큰 쪽에만 떼게 되어 있어. 6:4 정도 로 택시 운전사가 잘못했으니까, 아가씨는 딱지 뗄 필요가 없지. 도의 적인 차원에서 쌍방과실을 인정하고 이대로 각자 제 갈길을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아가씨 생각은 어때?" 현주가 얼른 대답했다. "저도 여기서 끝내고 그냥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현주가 합의서를 대충 써주고 있었다. 미묘한 상황이라 장담은 못하겠지만, 훌륭하고 약은 경찰관이었다. 쌍방과실 판정에 있어, 6:4 정도라 해도, 받힌 현주의 엘렌트라의 수리 비용이 받은 택시 보다는 클 것이기 때문에, 현주의 수리비용의 상당부 분을 택시 운전사가 부담해야만 하는 사고였다. 그러나 무식한 현주는 각자 자기차를 수리하는 합의에 군소리없이 만족하고 있고, 가난해서 불쌍한 택시 운전사는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사고가 재판 까지 간다면, 담당 경찰관은 검사에게 여러번 불려 다니며 시달려야 하 는 귀찮은 사건이기도 했다. 경찰관은 현명했고, 약은 처신을 했다. 경찰서내의 주차장에 사고 택시 운전수와 나란히 걸어가며 이만원을 꺼내 주면서 말을 붙였다. "저희 잘못이 없는 것이 아니니까, 벌금 이만원은 저희가 부담하죠." "아니예요. 제 잘못인걸요." 받지 않으려는 택시 운전사를 타일렀다. "회사차 칠 값도 변상하셔야 할 텐데 받으세요." "칠 값 변상보다도 열흘 면허 정지가 문제예요. 열흘동안 일 못 나가 게 되었으니, 죽는 놈만 죽으라는 건가봐요." 택시 운전사의 넋두리가 안돼 보였는지 현주도 거들었다. "열흘동안 면허 없이 몰면 돼잖아요?" 택시 운전사가 힘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 패트롤 카에게 면허증 제시 한 번 당하면 면허 취소 돼요." 문득 그럴듯한 방법이 떠올라서 택시 운전사에게 조언을 했다. "면허증 제시 당하면 깜박 잊고 집에다 수첩을 두고 나왔다고 하시고 그 자리에서 해결하세요." 택시 운전사가 피식거렸다. "그럼 당장 패트롤 카에서 컴퓨터 면허 조회 들어 갈테고, 면허정지 된 것이 들통날텐데요." 나는 간단한 미소와 함께 자신있게 보장해 주었다. "컴퓨터 조회로는 면허 정지 여부는 안나와요. 예를 달면, 김 말똥, 청량리 1번지, 1종 보통, 이라고 밖에 안 불러줄 꺼예요. 그러니 안심 하시고 일 계속 하세요." 사고현장에서 간단한 합의로 끝낼 수 있었던 접촉사고였는데, 그렇지 못했다. 현주는 기말 시험공부 할 시간을 경찰서에서 허비했고, 택시 운전사는 열흘간 면허 정지 딱지를 떼었다. 목청이 높아야 이긴다는 사고현장에 떠도는 미신이, 사고 당사자들의 불쾌감을 더욱 고조시켰고, 사고에 대해 정통한 지식도 없는 제 삼자들 의 주제 넘는 입방아도, 사고해결을 복잡하고 지루하게 만드는 데에만 기여했을 뿐이었다. 버스 운전사라고 자처하는 이는 맨지르르한 엘렌트라보다 남루해 보 이는 택시를 도와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버스 운전사의 어정 쩡한 개입은, 택시 운전사에게 열흘 면허 정지를 안겨주었을 뿐이었다. 당사자가 아닌 제 삼자의 개입은 사건에 대한 정확도와 순수한 면이 떨 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간단한 사건 이든, 국가의 안위와 관계된 거대한 사건이든, 제 삼자들에게 기대서는 좋을 것 없겠다. 사건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제 삼자가 아닌 당사자가 지는 것이고, 따라서, 판단에 대한 결정은 당사자 자신의 의지에 의해 내려져야만이, 망해도 떳떳하게 책임질 곳이 있어 보기에 나쁘지 않고, 흥해도 벌레 먹지 않은 탐스러운 열매를 떳떳하게 거둘 수 있을 것 같 다. "은영이네 집에서 시험공부는 어떻게 하니?" 뒷 문짝이 찌그러진 엘렌트라 안에서 묻자 현주가 웃었다. "어떡하긴! 날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지. 옆에 든든한 선생님도 계신 데..." 접촉사고로 심신이 피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날 밤을 새우며 시험공 부에 매진하겠다는 현주가 기특하게 여겨졌다. 운전대를 꼭 붙잡고, 전방을 또렷이 살피며 운전하고 있는 현주가 보 기에 좋았다. 이젠 학생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그녀에게 나는 더 이상 기사가 되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담배 한대를 꺼내물고 차창을 내릴 때 현주가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오빤 도대체 직업이 뭐야? 뭐 하는 사람이야?" "그건 갑자기 왜?" "건달로 보기에는 조금 유식해 보이구, 먹물로 보기에는 너무 까졌 구... 정체가 뭐야?" "글쎄다... 조금후엔 현주의 일어선생이 될테지..." 얼버무린 내 음성이 대답같지 않았는지, 현주가 계속해서 물었다. "같이 만난 오빠 친구나 후배들에게 정은이랑 성미가 물어봤다는데, 아무도 모르더라는데..." "너는 안 물어봤니?" "나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는데, 저번에 외국에서 왔다는 무식하게 생 긴 떼거지들하고 오빠랑 애들이랑 드림랜드에 놀러 갔었잖아?" "그랬지." "그때 부터 약간 수상하더라구..." "어째서?" "무슨 사람들이 총을 수 백발씩 쏘는데, 한 발도 빗나가지 않아? 머 리가 곱슬한 사람은 왼 손으로 쏴도 다 맞더라! 이상하잖아? 덕분에 공 짜 인형은 왕창 얻어서 좋았지만..." "오호라! 그게 이상했구나. 그 사람들 다 서커스 단에서 일하는 사람 들이야. 그 짓으로 밥 먹다 보니까 그런거지 뭘!" "오빠도 서어커스 단에서 일해?" "비슷해." "에잇! 더 궁금하네. 혹시 안기부 같은데 다니지 않아?" "하하하!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네. 거긴 하늘을 나는 사람들만 다니 는 데야. CIA나 모사드 정도라면 모를까... 공연히 기분 좋아진다. 안 기부라니! 내 주제에..." "그럼 그런 계통이 맞긴 맞아?" "그런 계통이 뭔데?" "그냥 정보 계통 뭐 그런거지... 얼마 전에 스니커즈란 영화 봤는데, 오빠 생각 나더라." "왜?" "오빠도 전자공학 했다고 했잖아. 그 영화에선 컴퓨터 한대로 남의 비밀번호 같은 것들을 막 알아내더라구..." "하하하! 컴퓨터 한대로 남의 비밀 번호를 알아낸다고?" "응." "스니커즈에 나오는 컴퓨터가 슈퍼 컴퓨터라도 되나 보지...아니, 슈 퍼 컴퓨터라도 도둑질 하는 상대 기기도 속도가 슈퍼급이나 되어야 가 능한 것일텐데..." "에이 어려운 소리 하지 말고... 그러면 그 영화는 말짱 거짓말이란 소리야?" "글쎄다.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해서 장담은 못 하겠지만, 남의 비 밀번호를 도둑질 하려면 도둑놈이 되어야 확실하지." "어떻게?" "몇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제일 간단한 것이 전화 번호의 리다이얼 (REDIAL) 기능을 떠 올리면 될꺼야. 리다이얼 기능만을 갖춘 회로 설계 는 그리 어려운게 아니니까, 전자 공학 지식이 조금 있는 사람이 만들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 회로판을 도둑질 할 기기의 키보드 같은 곳이 나, 전화선의 입출력에 병렬로 연결해 놓고, 며칠 있다가 회수해서 메 모리 되어진 신호를 분석하는 수법이 비교적 간단한 방법이지. 보통 컴 퓨터 가지고 하는 방법이 없진 않은데, 컴퓨터 말고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어." "뭔데?" "고건 비밀이야. 약오르지?" "오빤 너무 못됐어." "나도 말해주지 못해서 약간 답답하다." "그건 그렇구 하는 일이 정말 뭐야?" "그냥 회사다녀." "거짓말! 무슨 회사가 오후에 출근하고 화요일 토요일 쉬냐?" "그런 회사가 있어." "하는 일이 뭔데?" "경비 업무도 보고..." "또?" "주 업무는 미생물 내지는 불순물 제거 공정에 직접 관계해." "아! 대충 알겠다. 우주복 같이 괴상한 옷입고 들어가서 일 하는 거 지? 가끔 TV같은데서 본 적 있어. 그런데, 거기에서 어떤 일 하는거 야?" "우주복 같은 건 거의 입을 필요 없고 보통 장갑만 끼고 하지. 비비 고 문지르고 빨면 돼." "뭘 비비고 문지르고 빠는데?"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각종 장비들이겠지..." "회사 이름이 뭔데?" "대한 실업 주식회사라고..." "에잇! 오빤 왜 그렇게 사람이 진실하지 못해! 그러니 여자 친구도 하나 없지..." "은영이네는 아직 멀었니?" "다 왔어..." "멍멍! 멍멍!" 검은 점이 군데군데 찍힌 개 한마리가 잠긴 철문 앞에서 짖고 있었다. 인 터폰에서 갸날픈 아가씨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나야, 현주" "현주 왔구나!" 인터폰에서 흘러나온 갸날픈 음성이 현주를 반겼다. 곧이어 `찡`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려졌다. 뛰어 들어가는 점박이 개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 니, 대추나무 잎새들이 마당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었다. "대길이 혼자 밖에 세워두고 문을 잠궈 놓으면 어떡하니?" 현주가 현관에서 나오고 있는 검정색 진바지 아가씨를 쳐다보며, 대길이란 이름의 얼룩개를 염려했지만, 진바지는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우리 대길이는 강아지 때부터 싸돌아 다니기를 좋아해서, 지금까 지 8년동안 내놓고 키웠어. 그 덕에 동네사람들도 다 아는 개가 되어 버렸거 든. 이집 저집 기웃거리면서 구걸도 잘하구, 아뭏튼, 동네에서 귀여워 해주 는 개라 며칠 내어 놔도 굶지는 않을꺼야." 쏘다니기 좋아하는 개, 대길이에 대한 대견스러움을 늘어놓고 있던 진바지 에게, 짐작으로 첫 인사를 대신했다. "숫놈이죠?" "네."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진바지가 고개를 약간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은영이라고 해요." "저는 기석이라고 합니다. 인사할 수 있게 돼서, 참 좋네요." 은영이 얼굴에 깨끗한 웃음기를 띄우며 입술을 움직였다. "현주하고 정은이가 칭찬을 많이 하던데요." "현주하고 정은이가 제 칭찬을?" "네... 아주 엉큼하지만, 쪼금은 신사라고..." "그런 것이 이 동네에선 칭찬이군요... 허긴! 대길이를 귀여워 하는 동네 니까..." 대화 도중 끼어든 대길이가 궁금한지, 현주가 나에게 물었다. "대길이는 왜 끌고 들어가?" "들어오면서 보니까 이 동네에는 서성거리는 바둑이들이 꽤 많더라구..." "맞아! 아까 골목어귀로 들어올 때, 나무 의자에서 앉아있던 할머니들 주 위에도 몇 마리 있었고, 슈퍼앞에도... 그런데 왜?" 의아해하는 현주와 은영을 흘깃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동네 강아지들이 죄다 대길이를 닮았더라구..." 바람난 개 대길이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마루위의 소파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아가씨가 일어서며 목례를 해왔다. "사촌 언니예요. 이모님이 저 혼자 집에 있는 것이 걱정된다고 사촌언니를 보내셨어요. 괜찮죠?" 은영의 말이 귀에 가물거렸다. 목례를 끝내고 방실거리며 웃는 은영의 사촌언니와 나는 어이없는 첫 만남 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서 천적(天敵)을 느껴야만 했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항공 운항과 2학년 A반, 학번 9213-0XX 최 현주 였다. 이북출신의 아버지, 세 딸중의 막내딸, 재수를 경험했고, 단발머리 스타일을 내내 고수하고 있다. 심지어, 그녀의 주민등록번호 본적지 주소 전 화번호 몸매 사이즈까지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박 현주양의 친구인 은영의 사촌 언니라는 사실은 몰랐다. 지난날 사랑했던 현주의 닮음꼴들을 뒤지다가 그녀의 자료에 접했을 때, 적지 않이 놀랐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정말로 존재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그녀의 자료를 보고 그녀에게 접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었지만, 나는 시도를 할 수가 없었다. 섣부르게 다가서다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나를 말렸던 것은, 접근에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겁이었 다. 한순간 굳어있는 혓 바닥을 움직이기 위해 목부터 힘을 주다보니, 목소리 가 약간 컸다. "천만에요. 안 괜찮아요." "네?" 내 대답이 조금 돌발적으로 들렸는지, 두 현주와 은영이 눈을 둥그렇게 떴 다. 단발머리의 귀여운 입술에 묻은 매력을 잠시 흘터 보고나서 나는 아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은영씨 사촌언니가 너무 `나이스(NICE)`해서, 왼쪽 가슴이 쿵쾅거리고 목 구멍으로 침이 넘어가고 안면이 후끈거리는 것이, 필시 병인가 싶어요." "호호호! 큰일났네! 애들한테 일어 가르치러 오셨다면서 병드시면 어떻게 해요. 우선 소파에 좀 앉으세요. 음료수 갖다 드릴께요." 소파에 앉으면서 왼쪽 가슴을 살살 문지르던 손으로 이마도 살짝짚었지만, 괘씸한 박 현주가 주방으로 가는 최 현주양의 뒷 모습에 쌀쌀맞게 일러부쳤 다. "얼씨구! 또 발병했어? 정말 병은 병이야! 예쁜 여자만 보면 홀랑까지는 중병... 언니! 이 오빠 조심해야 돼. 아주 여물게 까진 오빠니까..." 나쁜 년이라고 욕해주고 싶었지만, 이미지 관리가 중요한 시점이라 옆 자 리로 따라 앉는 박 현주에게도 적당한 아첨을 해주어야만 했다. "현주는 눈이 참 이뻐. 이쁜데다가 시력도 좋지! 내 바지 속 까진 걸 다 알구..." 현주가, 그녀의 긴 머리를 목 뒤로 쓸어 넘기고 있던 손으로, 매섭게 내 넓쩍다리 안쪽을 내리쳤다. "에잇!" "윽! 현주는 주먹두 커..."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이 허벅지 쪽을 문지르고 있는 것이 궁금했는지, 주방 에서 돌아온 단발머리가 오렌지 쥬스를 놓아주며 물었다. "다리도 아프신가 봐요?" 쥬스를 마시고 길다란 자개상이 준비된 은영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가씨들 사이에 앉아 그녀들의 일어 책을 펼쳤다. 신문 비스무레한 것을 펼쳐 보는 아저씨가 그려져 있는 그녀들의 일어 교 재에는 비행기내에서의 안내와 여행지에 대한 대화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 다. "후지상가 미에루.(후지산이 보인다.) 에서 미에루는 목적어가 필요없는 자동사로서 우리말로 `--가 보이다`란 뜻이고, 심붕오 미루.(신문을 보다.) 에서 미루는 목적어를 갖는 타동사로서 `--을 보다."란 뜻이야. 따라서, 미 에루와 미루를 알맞게 선택하는 것은 주로 앞 단어에 따라붙는 조사가 주격 인지 목적격인지를 판단하고 선택하면...주절주절..." 긴 머리 현주와 은영에게 일어를 가르치고 있는 동안, 졸업반인 단발머리 현주는 곤색 표지의 스트림 라인(STREEM LINE:항공운항과 2학년 영어교재)에 매달려 있었다. 긴머리 현주와 은영에게 일어 강의를 끝낼즈음, 단발머리 현주는 스트림 라인을 덮고 16절지 반만한 일어교재를 새로 펴 들었다. 그리고, 조그만 목 소리로 비행기 방송 안내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미나사마 곤니찌와. 교우와 다이깡 고우구오 고료오시테...(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오늘도 대한항공을 이용해 주셔서...).....조잘조잘....소근소 근...." 자정 어림에, 그녀들의 시험 준비가 대충 끝났다. 늦은 시간이었으나, 단발머리 까지 포함한 세 아가씨 사이에는, 이제 곧 자야한다는 먹구름보다는 놀아야 겠다는 뜬구름이 지배적인 분위기로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삼십분 동안 오가던 잡담이 한 남자와 세 아가씨를 친숙하게 만들어 주 더니, 급기야는 신사와 숙녀들 사이에 담요가 깔리게 되었다. 시험전야는 올나이트 포커판으로 흘러 갈 모양이었다. "안되네..." 딜러가 예 닐곱 번이나 바뀌어 졌지만, 나는 한 판도 잡아 보지 못했다. 나의 이태리 수제품 소가죽 사이에서 빠져나온 배추잎(만원권 지폐)들이, 숙 녀들이 자리한 담요아래에 차곡차곡 쌓여져 갔다. 그럴 즈음이었다. 현주가 딜러가 된 새로운 판이 시작되면서, 나는 히든카드를 보지 않기로 하고 막바 지 배팅까지 따라갈 것을 공고했다. 카드가 돌았고 배팅이 몇 차례 오갔다. "고마와 오빠, 오빠 덕분에 오늘 이렇게 놀면서두 시험은 잘 칠 것 같아. 난 사실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오빠한테 일어 가르쳐 달라고 한건데, 막상 배우고 나니까, 오빠가 평소보다 더 멋있어 보여. 어쩌지?" 마지막 카드를 남기고 들어가던 박 현주의 재롱을 벌써 들어간 은영이 한 단계 더 띄워놓고 있었다. "어쩌긴, 마구 안겨 버리면 되잖아. 깔깔깔! 그렇죠?" 나는 마지막 카드를 집기위에 반달모양으로 구부린 오른 손을 카드위로 뻗 었다. 반달모양으로 구부러져 드러나지 않는 손바닥 천정에는 미리 빼돌린 ` 하트 킹`이 역시 반달모양으로 휘어진채로 달라 붙어져 있었다. 쌓여진 카드 위에 손바닥의 그림자가 드리워 질 즈음 중지와 약지를 살짝 피자, 손바닥 안에서 휘어져 있던 플래스틱 카드는 자체의 탄성으로 쌓여진 카드위에 자연 스럽게 올라탔다. 나는 나의 마지막 카드, `하트 킹`을 가만히 집어 들고, 은영과 긴머리 현주에게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건 안돼." 어쩌면 쌀쌀맞게 들릴수도 있는 내 대답에, 가장 빠른 관심을 표시한 것은 의외로 단발머리 최 현주였다. "왜요?" 단발머리의 파이널 카드는 클로버 세븐이었다. 그녀는 위세당당한 세븐 포 카를 쥐었겠지만, 내 무릎 앞에 펼쳐진 하트 킹으로 인해 나 역시 로열 스트 레이트 플러쉬 족보에서 하트 에이스 한 장만이 빠져 있었고, 히든카드가 여 전히 내 왼쪽 손바닥 밑에서 가려져 있는 상태였다. 히든카드의 궁금증은 만 만한 것이 아니었을진대도, 그녀는 나의 단순한 대답에 대한 해명을 먼저 요 구했다. "현주(박 현주)처럼 예쁜 애가 마구 안겨 준다는데 어째서 안된다는 거 죠?" 이미 세 아가씨들에게 존대말은 쓰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기에, 단 발머리 현주에게도 혓바닥을 편안하게 굴리며 놀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난기도 섞지 않은 존대말을 착 가라않은 목소리에 실 어 보내기로 했다. 떠오른 승부욕이 영감(靈感)이 되어 뇌리를 자극했기 때 문이었다. "단발머리양을 본 순간, 저는, 단번에, 그대로, 정직하게, 반해버렸읍니 다. 그러나, 어설프게 서두르다가 그르칠까 두려워, 차분하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최 현주양을 소개시켜 줄 것을, 현주에게 부탁해야 겠다고 마음먹고 있 었읍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저는 조금 전에 `하트 킹`을 뒤집었어요. 그 순간 신 의 계시같은 영감(靈感)이 떠오르더군요.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몇 년 동안 포커를 쳐도 한 번도 쥐기 어려운 족보가 이제 `하트 에이스`한 장만만을 남겨두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제 왼쪽 무릎 앞에 있는 히든 카드를 전 아직까지도 보지 않 고 있어요. 한장 한장의 카드가 열려지면서, 히든카드에 대한 초조한 바램과 궁금증이 더욱 강력하게 일기 시작했지만, 그럴수록 저는 히든카드를 마지막 까지 덮어둔채로 버틸 것을 다짐했지요. 아까운 꿈일수록 깨기 싫은 조용한 몸부림 비슷한 거라고 하면 비유가 될까요? " 흐으... 그런데, 마지막에 `하트 킹`이 뒤집혀지자, 아리송한 불덩이같은 것이 가슴속에서 별안간 일더니, 히든카드에 대한 초조한 바램과 궁금증을 단번에 태워버리더군요. 그리고 타고난 빈자리에, 고요한 확신이 단단하게 채워지고 얼음처럼 굳어지더군요." 잠자코 귀를 기울이던 세 여인 중 한명이, 단발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 며 조용히 물었다. "어떤 확신이?" "히든 카드는..." 나는 말을 잠시 멈추고 단발머리를 쳐다 보며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단 발머리 최 현주가 마지막까지 관심을 보여 주었다. "히든 카드는요?" 뭉게구름을 먹구름으로 바꿀지도 모르는 모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는 무 식하다 싶을정도로 적나라하고 성급하게 사고를 치고 말았다. "히든카드는 `하트 에이스`가 아닐수도 있겠지만, 최 현주양은 틀림없는 저의 운명이라는 확신입니다. 최 현주양의 연인(戀人)이 되어 일생을 바치겠 읍니다. 진심입니다." 말을 끝내고 나서, 단발머리 현주의 당혹해 하는 눈망울 안에, 그윽한 눈 빛으로 진정(眞情)을 호소하고자 하였고, 다음 단계로 고개를 돌려, 긴머리 현주의 주춤거리며 치켜 올라가는 눈초리를 무심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떳떳 함을 주위에 표현하려 애썼으나, 어째 둘 다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았다. "뭐! 어째! 연인(戀人)? 언니를 소개시켜 달라고? 알았어. 지금해줄까?" 졸지에 패대기 쳐진 자존심 탓인지, 박 현주의 입에서 `미쳤니예스`가 부 글거리면서 흘러 나왔다. 게다가 이슬을 머금지 않으려 빨개지고 있는 눈과, 이마와 콧날사이에 세로로 잡힌 주름은 나머지 두 여인에게 나의 떳떳함보다 는 뻔뻔함을 고자질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단발머리 현주에게 눈을 붙힌채, 긴머리 현주의 공격적인 물음에 될 수록 간결하게 입장을 표시했다. "응." 긴머리 대신 단발머리가 내 대답을 받았다. "소개는 무슨... 현주야. 난 아직 그런 것 생각해보지 않았어. 그러니 부 담 갖지마." 단발머리의 은근한 거절을 은영이가 딱부러지게 만들고 있었다. "열 두시가 넘었네. 현주는 우리집에서 자고 내일 학교에 같이 가기로 했 는데, 오빠는 어쩌죠? 여자들만 있는 집이라서 재워 드리기두 그렇구..." 은영의 축객령으로, 나는, 악화된 이미지를 조금도 만회하지 못한채 어두 운 골목길을 홀로 걸어 나와야 했다. -마음엔 바람과 비가 있고 꿈은 열대신 싸늘함만 감도네. 지루한 밤마다 별빛과 풍운은 날 부르는데 헤메며 돌아본 곳엔 고독만 남아있는가? 세상이 아릿해진 것은 그대의 눈물을 지켜주지 못해서 이려나? 이루지 못한 사랑은 안타깝게만 떠돈다지만 아쉬운 정만 일지라도 이승의 꿈을 걸고자 하네.- 오래전에 흘러갔던 구창모의 `희나리`란 곡조에 실어 읊조려 보았으나, 노 래처럼 제대로 불러지지 않았다. 대신, 외롭지도 우울하지도 않았다. 오히 려, 신선하고 진한 짜릿함같은 것이 온몸 안팎에서 간질거리며 반짝이는 것 이 느껴지고 있었다. 무거운 먹구름을 밀어내고 아름다운 행운을 예고해 줄 것만 같은, 좁은 골목 하늘위의 별빛이, 손바닥 안의 `하트 에이스`를 비춰 주고 있었다. (5) 친구들... 대학동기 주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명동 YWCA 회관에 차를 파킹하고 차에서 내려설 때였다. "기석아!" 고개를 돌려보니, 이 주원이란 놈과 방 이건이란 녀석이었다. "무서운 놈들끼리 붙어다니네!" 이죽거림으로 반가움을 표현해주자, 주원이가 희죽거리며 응수했다. "그래도 우린 너한테 맞고 자란 애들이잖아." 주원이는 ROTC를 거쳐 군인이 되었다. 지금은 대위쯤 되어 있어야 할 녀석 이었지만 정보사로 차출된 터라 민간인처럼 보이는 주원이었다. 아는 사람들 은 알겠지만, 정보사는 대북 특수 공작 임무를 띄고 있는 곳이다. 현역의 경 우 테러 사건 뒤 신분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민간인 신분의 공작팀을 운영하 고 있는 곳도 정보사다. 양아치 같은 허름한 주원의 작업복이 결혼식장에 어울려 보이지 않아서 한 마디 했다. "훈련이라도 떳니? 친구 결혼식날 거무튀튀한 먼지들은 어이하여 묻히고 다녀?" 정보사 엘리트가 약간 떨떠름해 하자, 옆에 있던 이건이가 말했다. "이 자식 지금 이 지대에서 독수리 훈련중이야. 주호 결혼식이라고 옆으로 새고 있는 중이지." 훈련의 일종으로 예고없이 자신의 사령관 집에 침투하기도 하던 주원이 인 지라, 대낮 명동 한복판이었지만, 훈련중이란 녀석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사령관 집이 명동인가 보지... 그러면 주원이 결혼식 보고 곧장 들어가야 하니?" 이건이가 주원이 대신 또 대답했다. "오늘은 완전히 샛단다. 끝나고 따로 한 잔해야지." 결혼식장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주원이가 중얼거렸다. "소식이 뜸 한 놈들도 나타날 자리엔 잘들 나타나네!" "사는게 다 그런거지..." "주호 이 자식은 어디에 쳐박혀 있는거야?" "글쎄다. 신랑이 입구에 서 있어야지...어! 저기 나오네." 신부 대기실에서 아가씨들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주호에게 셋을 대표해서 이건이가 왔다는 인사를 했다. "평생 딱 붙어 지낼텐데, 신부 대기실엔 뭐하러 기어들어가 있니?" "으응! 비데오 촬영 좀 하느라고... 너희들 와줘서 고맙다." 이번에는 주원이가 북을 쳤다. "한국통신에 들어간 것 까진 알겠는데, 쫓겨나진 않았나?" 주원이가 대답하기 전에 내가 장구쳤다. "뭐! 장가드는 걸 보면, 무사히 버티고 있나 보지..." 이건이가 물었다. "신부 이쁘니?" 주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냥 뭐... 이뻐." "이쁜 마누라 얻어서 좋컷네. 너무 주물르지 말고 잘 더듬어 줘라. 바쁠텐 데 어여 가 봐." 주호를 떠밀어 보낸 이건이가 입맛을 다셨다. "그것 참! 저렇게 못생긴 자식도 장가가는데, 난 뭐여... 제기랄!" 어수룩해 보이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거의 다름없는 이건이었다. 그러 나, 겉과 달리, 하는 짓은 고약하고 속알머리는 음흉한 녀석이었다. 고약하 고 음흉한 이건이었지만, 녀석과 나는 서로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가까와 졌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피아노 반주 대신 실로폰 비슷한 마린바란 악기가 울려내는 웨딩마치를 지 켜보노라니, 얼핏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사진 찍느라 진이 빠지고 정신없는 주호에게 축하와 염려를 아울러 보태준 후, 주원과 이건이와 함께 예식장을 빠져 나왔다. 주차비 비싼 명동을 빠져나와 대학로의 `앙주`라는 카페의 2층 룸에 자리 를 잡았다. "요즈음은 어떻니?" "그냥 그렇지 뭐..." `S대의 쓰레기`란 소설을 쓰기도 했던 이건이는 세계 문화사란 곳에 직장 의료보험이 있고 그곳에서 월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고교, 대학 동기동 창이며, 특별히 친분이 두텁다고 할 수 있는 나는 그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안기부에 입사했던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또한 전사(戰士)로서의 나에 대해 짐작으로나마 어느만큼 알고 있었다. 그는 안기부요원 이전에 나의 친구였 고, 나 또한 전사이기전에 그의 친구였다. "우리가 이야기 했던 것은 생각 좀 해봤니?" 보름 전쯤 이건이와 주원이는 나에게 단순하지 않은 제의를 한 적이 있었 다. "아직은..." 미적거리는 내 대답이 신통치 않게 느껴졌는지, 이건이가 장황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너 스스로도 잘 알테지만, 관계없는 남들 싸움에 끼어들어 먹고 사는 일 이, 속은 편할지 몰라도, 무의미한 짓이잖아. 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널 안다. 남들 일에 끼어 드는 것은 네가 별로 좋아 하는 일이 아니잖아. 무 엇때문에, 그런 일을 하고 살아야 하니? 그건 내 눈에는 네가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질 않아. 너는 이 나라에서 태어났고, 네가 가장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이 나라안에 포함되어 있다. 네가 이 국가를 위해서, 할수있는 만큼 일해주기를, 안기부 원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부탁한다." 이건이답지 않은 진지한 부탁에 나는 할말이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건이의 말을 그대로 받아 주기엔 찜찜한 구석이 없진 않았다. "나는 이 나라의 정보기관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매스콤 에서 흘러나온 정도일 뿐이겠지만, 어쨋든, 내가 아는 고작으로나마, 내 생 각을 이야기 해보겠다. 안기부는 본부의 2개국과 지방분실등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판단국으로 보 내, 여기서 각 분야의 정보를 종합 분석하고 체계화한다. 이 판단국에서 보 통 하루 평균 이 삼건의 정보를 대통령에게 일일보고서 형식으로 올리고, 안 기부장이 일주일에 한 번 주례보고를 올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보사의 주원이가 끼어들었다. "그게 어때서?" 주원이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거기까진 별 문제가 없다고 여겨진다. 다만 대통령과 안기부와의 관계를 확인해 보았을 뿐이다." 이건이가 내 말을 받았다. "우리가 너에게 안기부에 관해서 혹은 정보사에 관해서 이야기 해 줄 수는 없다. 또, 네가 알고있는 것들에 대한 시비(是非)역시 가려줄 만한 입장도 아니다. 하지만, 우린 이 나라 정보기관에 대한 너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너는 일반인을 대변할 수 있는 어느정도의 지성을 갖추었고, 반면에 정보업 무에 관계된 필요불가결한 특수성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 계속해서 네가 안 다고 여기는 것들과 그에 따른 너의 생각을 이야기 해주기를 부탁한다. 나는 지금 너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로서..." 나는 이건이의 요구대로 알 만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러 정보의 신뢰도와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판단국 산하에 `기술 보안단 `을 두고 있다고 알고 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을 계획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만, 이곳에서 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것은 있다. 87년 대선당시 김 영삼 후보는 자신의 사생활과 관련된 전화도청을 당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미루어 짐작컨대, `기술 보안단`이, 정치, 경제등 주요인사들에 대한 도청을 담당했다고 여겨진다. 87년 당시 안기부엔 전화선이 약 9000회선 정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한 회선당 30000대 정도의 전화도청을 카바할 수 있다는 것도... 물론, 국가 안보를 담당하는 곳에서 전화도청 전용회선이 필요 하다는 것 을 이해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조국에 대한 사명감에 입각해서, 국가와 민 족을 위해 제대로 쓰인 적이 많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악의 적으로 이용되어 지면서, 비도덕적이고 비인격적인 정치사찰의 전형으로서 사용되어 진적이, 비록 단 한번일지라도 없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네가 안기부의 첫발을 `기술 보안단`에서 시작한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물 어보는 거다. 없었니?" 이건이가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대답했다. "87년 당시에 저질러졌던 전화도청 이야기는 내가 입사하기 전이다. 그 당 시의 안기부와 지금의 안기부는 차이가 있을거다. 또, 지금의 나는 기술보안 단 소속도 아니다." 맥주 한잔을 들이킨 내가 이건의 말을 받았다. "그러면, 대공수사국 이야기를 한 번 더 해보자. 대공수사국의 고유업무는 물론 대공수사업무다. 하지만, 이 대공수사국도 `안보수사`라는 명목하에 주 요인사에 대한 미행, 감시업무와 특수한 목적의 정치 공작 기능을 담당했던 적이 있었다. 92년 3,24 총선 당시 민주당 홍사덕 후보에 대한 흑색 선전물을 배포한 안 기부 부원들이 이 부서 소속원으로 알고 있다. 92년 당시, 너는 이 대공수사 국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사실의 진위여부를 알고있다고 여겨지는데, 이번에는 묻지는 않겠다." 맥주 잔을 원 샷으로 들이킨 이건이가 말했다. "묻지 않아서 고맙지만 대답은 해주겠다. 분명한 것은 난 그사실을 모른다 는 것이다. 대공수사국내에서 그같은 일들이 저질러졌다면 마땅히 수사국은 그 사건으로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당시 수사국내의 정 예요원이었던 나도 그 사실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다. 뿐만 아니 라, 대공수사 업무에 주력하던 대다수의 우리부서 요원들도 역시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우리부서 소속원에 의해 저질러 지지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 니다. 다만, 정말 그런 일들이 저질러졌다면, 대공수사국 전체요원들중 극 소수에 의해, 마지못해 저질러 졌을 것이고, 지금은 수사국 안에 정치 공작 관련 부서는 분명히 없다." "없다니 믿겠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지금의 넌 대공수사국 소속이 아닌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니?" "대강 넘어가자. 근데, 네 놈은 내가 대공수사국 소속이 아닌 줄 어떻게 그리 잘 알고있냐?" "음! 사실 알고 있진 못했다. 그냥 넘겨 짚어 본거다." "여우같은 놈..." 옆에서 듣고만 있던 정보사 엘리트가 입을 열었다. "기석이 이야기는 안기부가 정치공작에 관여했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는 것 같은데, 정치공작이란, 어느 나라에서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만, 정치공작의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또 공작 실행의 과정에서 발발할 수 있는 치사한 수법들의 허용한계치를 고려해서, 정치공작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된다고 여겨진다. 기석이가 처음에 언급한 바대로 대통령과 안기부장는 밀접한 주종관계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5공탄생 당시 중앙 정보부에서 안전 기획부로 바뀌는 과 정에서 `정확히 정보를 분석해 대통령에게 명확하게 전달하는 부장의 능력` 이 안기부의 위상을 높이는 데 힘이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안기부는 대 통령의 철학과 뜻을 받들어 업무를 수행하는 기구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정 치공작의 목표란 대통령의 철학과 관심이 어디로 쏠려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5공때의 대통령과 6공때의 대통령이 다르다. 현재의 대통령 역시 이전의 대통령과는 다르다. 따라서, 지금의 안기부 역시 5,6공 때의 안기부와는 다 를 수 밖에 없다. 현재의 김 덕 안기부장도 군인 출신이 아닌 대학교수 출신 이다. 대공 수사국안의 정치과와, 여 야정당 및 국회에 정보관을 출입시키며 정치 언론을 담당하던 정치사찰의 대명사, 4국이 폐지되었고, 4국과 정치과 소속인원들 또한 보직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의 안기부의 철학 은 이전의 안기부의 철학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적어도 정권유지를 위해 안달하는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예 쁘고 고마운 대통령으로 이름 석자를 남기고 싶어하는 통치자를 위해서 일하 고 있다." "너는 정보사 요원이냐? 안기부 요원이냐?" 툭 찔러넣은 내 질문에 주원이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안기부원이 아니라도 그정도는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니? 그러면 네가 이야기한 대로 대통령의 관심에 좌지우지 된다는 정 치공작 실례를 들어줄 수도 있겠네?" "갑자기 떠올리는 것이라 적절하다고 여겨질 지는 미지수지만, 6공때의 예 를 들어 보겠다. 민자당의 문희갑, 무소속의 정호용, 민주당의 백승홍이 출마한 대구 보궐 선거에 안기부가 개입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 삼탁 당시 안기부 기획조정실장이 그랜드 호텔의 스위트 룸 한 채를 빌려 현장을 지휘하면서 당시 영남대 학군단 명예위원장 이 아무개씨, 청년단 대구지구 지부장, 경북 6개 지부장등 여섯 명에게 학생동원령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 다. 물론 이 개입은 정호용씨가 사퇴하면서 안기부가 개입된 선거전은 맥없 이 끝났다. 또 한 가지의 예는 90년 봄, 한국 방송 공사(KBS) 분규가 터지자 통일 청 년단 단장이던 김 진성씨를 통해 노사분규에 개입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내 용은 `공영 방송국의 파업사태를 몹시 우려한다며 방송 파업을 막아야 한 다.`는 것이었다. 전단을 살포하고 KBS정문 앞에 전단도 붙혔다. 주위의 음 식점을 돌며 `안심하라 별 일 없다.`는 내용의 선무공작 활동도 했다고 여겨 진다. 무술과 몸싸움에 능한 20-30명의 침투조를 편성해서 침투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경찰력이 진입할 때 내부에서 기물을 보호하고 경찰병력 의 진입을 돕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KBS노사 분규가 싱겁게 끝나버려 별 다른 사태는 역시 없었다. 이런 정도가 6공시절 안기부가 행한 국내 정치 공작의 행태가 아니었나 생 각된다. 욕을 먹을 만 하지만, 때려 잡을 정도는 아닌 6공시절의 안기부였다 고 사료된다." "잘 들었다. 그러면 5공때 걸로 한 두가지 싸가지 없었던 예를 들어줄 수 있겠니?" "에, 또..." 주원이에 의해서 안기부가 씹히는 것이 좀 못 마땅한지, 이번에는 이건이 가 들고 나섰다. "이 나라 정보 기관은 안기부 밖에 없냐? 정보사도 한 일이 없진 않다." "그러냐? 그럼 이건이가 5공때의 정치 공작에 있어 정보사가 저지른, 또 해서는 안될 짓 같은 것이 있으면 일러 봐라." "간단히 이야기 하겠다. 85년 김 영삼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 자택에 들어 가 서류들을 절취해 온 것이 정보사 소행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또, 86년 4월 29일 밤 당시 신민당 부총재이던 양 순직씨가 테러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정보사 공작단이 훈련차원에서 두들겨 팬 것으로 알고 있 다." "음 확실히 6공때보다는 5공때가 쎄구나. 정치공작이 대통령의 철학에 무 관하지 않다는 주원이의 말에 어느정도 수긍이 간다." 서로 상대방의 소속기관의 떨떠름한 과거들을 끄집어 낸 주원이와 이건이 에게 88한 개피씩을 뽑아주며 계속해서 이간질을 했다. "그러면 아까 주원이가 언급한 공작 실행 과정에서 발발할 수 있는 허용한 계치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줄 수 있겠네. 이번에도 적절한 예를 들어 주면 서 설명해 주는 것이, 듣는 내가 좋을 것 같다. 주원이는 정보사니까 안기부 쪽 이야기를 해주고, 이건이는 안기부니까 정보사쪽 이야기를 해주면 되겠 지. 박 종철 고문 사건같은 것이야 다시 일어날 리 없는 것이니까 제쳐두고, 약간 상큼한 것으로 실례를 들어봐라." "이런 얌생이 같은 자식! 그런 거 없어 임마!" "괘씸한 자식!" 예(例) 대신 욕을 듣고 말았다. `괘씸한 자식`이라고 욕한 이건이가 장황 한 넋두리를 예(例)대신 시작했다. "그간 안기부에 의해서 불미스러웠던 일들이 저질러 졌다는 것을 부정하지 는 않겠다. 음지, 양지 가리지 않고 일을 하다보니 해서는 안될 일도 해야 했었다는 따위의 변명도 하지 않겠다. 안기부의 국내 정치 공작은 곧 5, 6공 각하들의 입맛이었다. 5,6공 각하들이 떳떳했다면 안기부의 정치공작도 떳떳 한 것이었을 테고, 5,6공 각하들이 치사했다면 안기부의 정치공작 역시 그러 했을 수 밖에 없다. 지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지난 일을 거울로 삼을 수는 있다. 안기부는 어쩔 수 없는 대통령의 직속기관이다. 국민들은 안기부를 탓하기 이전에 올바른 지도자를 선택하는데 있어, 자신의 자제들 대학입시만큼이나 깊은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기부는 임무의 성격상 잘못하기는 쉽고, 잘 하기는 어려운 일을 해왔다. 또한 욕 먹을 일을 감추기 어렵고 잘한 일을 드러내기 어려운 기관 이다. 그런만큼 국민의 솔직한 애정에 배고픈 기관이기도 하다. 안기부는 국내 정치 공작만을 다루어 오지는 않았다. 수 많은 안기부원들 이 재외 공관에 근무하고 있다. 그들이 국내 정치 공작에 관여하기 위해서 재외 공관에 근무하고 있겠나? 아니다.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들 대부분은 국제적 안보상황의 변화와 새로운 정보문화 창출이 요구되는 시대 상황 속에 서 국익을 위해 눈과 귀를 사용하고 있다. 안기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대다수 요원들은 정치적 필 요에 따라 정치공작등 꼬질꼬질한 활동에 나서야 하는 비릿한 운명보다는, 헌법 기관의 공무원으로서 음지에서나마 떳떳하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 하 기를 바란다. 안기부원 모두가 성인군자일리는 없다. 안기부원 모두가 투철한 애국자일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나라안에서 가장 애국자가 많은 집 단을 꼽으라면 주저않고 내가 소속된 안전기획부를 꼽을 자신이 있다. 어째서 냐고? 내가 속한 부서의 사명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 는 것도 아니고, 다름아닌 국가의 안전 보장과 자유민주 체제의 수호이기 때 문이다. 바로 그 사명에 이끌려 안기부에 입부한 사람들이 없지 않기 때문에 안기부는 누가 뭐래도 이 땅의 애국자집단일 수 밖에 없다." 이건이의 장황한 넋두리에 정보사의 주원이가 토를 달았다. "정보사도 그렇다. 뭐..." 나도 토를 달고야 말았다. "잘들 났다." 비아냥 거리던 나에게, 주원이가 등을 의자에 붙이며 똑바른 자세로 말했 다. 자세보다 뚜렷한 음성이었다. "기석이 너는 애국(愛國)이란 단어를 진지하게 음미해 봐야 해. 국민학교 입학시절 교단의 태극기를 순수하게 바라볼 때처럼... 잘났건 못났건 그 태극기안에 네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들어있는거야. 이 건이와 나는 네 가슴에 그 태극기를 붙여주고 싶은거다." 대학로의 앙주에서 방배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까페 골목의 아 구찜집에서 배를 채우고 거리로 나오자 자정에 가까와졌다. 예나 지금이나 이 거리에서 젊은 남자 셋은 봉처럼 보이는 것은 매한 가지인 모양이었다. 삐끼(호객행위 하는 사람들)들이 달라 붙고 있었다. "형님들, 저희 집으로 가시죠. 마침 끝내주는 아가씨들이 들어 왔십니다. 삐끼 주제에 아가씨들 2차까지는 장담해 드릴 수는 없 지만도요, 몬생긴 파트너 땜시 형님들을 실망시키는 일은 절대 없을 껍니다." 무전기든 사내를 따라 침침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퀴퀴한 싸롱안의 술냄새가 붉은 조명을 적시고 있는 듯 했다. 안내된 룸 은 약간 축축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넓찍한 것이 그리 답답해 보이지는 않았다. 여인의 상반신이 그대로 드러난 사진에 시선을 보내며 이건이 가 중얼거렸다. "그림이 산뜻하구만... 한 번 만져봐도 돼?" 따라 들어온 웨이터가 테이블 위에 물수건을 놓아주며 대답했 다. "그럼요." 코팅된 모델의 풍만한 가슴을 이건이가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 며 웨이터에게 말했다. "이거 아주 쫀덕쫀덕하구먼... 이런 애 하나 들어오면 오늘 이 방 매상은 확실하게 책임져 주지." 테이블위의 메뉴판을 뒤적이던 주원이 덧붙였다. "저만큼 안돼도 좋으니까, 치마 짧은 애로 들여보네. 이런데 와서 바지입은 여자보면 한달내내 재수가 없더라구..." 공손히 서 있던 웨이터가 살살거리는 목소리로 분위기를 맞춰 주었다. "헤헤, 여기 아가씨들은 거의 다 이쁘지만, 개 중에는 형님들 마음에 안 드시는 아가씨가 있을 수도 있읍니다. 아가씨들 들어 오는 것은 순번제라 저희들이 타치를 못하고, 대신에 형님들이 마음에 안 드시면 즉석에서 퇴짜를 놓으시고 아가씨 바꿔 달라고 하세요." 그림에서 시선을 거둔 이건이가 탐탁치 않아 했다. "야! 들어온 아가씨를 못 생겼다고 어떻게 내쫓니? 아가씨들도 자존심이 있을텐데..." 웨이터가 두 손을 휘저으며 당치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닙니다. 형님들, 이런데 오는데, 솔직히 누가 술보고 오나 요? 아가씨들 보고 비싼 돈 내고 술 마시러 오는건데, 형님들 기 분좋게 드셔야죠. 마음에 안드시는 아가씨가 들어오면 저에게 바 꿔달라고 해주세요. 술은 뭘로 드릴까요?" 주원이가 패스포드 둘 하고 과일을 시켰다. 웨이터가 나간 뒤 2-3분 후 쯤에 똑똑 두드리는 문소리후에 아 가씨 셋이 들어왔다. 긴 생머리는 윤기있어 보였고, 소매없는 원피스 밖으로 드러난 두 팔이 건강하고 날씬해 보였다. 첫 번째 아가씨는 미인이었다. 내가 십자가를 져야 했다. "첫 번째, 넌 저쪽 가서 앉아." "민정이라고 해요." "나머지 둘은 미안하지만 빠구야." 첫 번째 아가씨가 이건이 옆에 앉았고, 뒤따라 들어오던 두 아 가씨가 지체없이 나갔다. 새로 들어온 두 아가씨 중 치마가 더 짧은 아가씨가 주원이의 눈짓으로 선택되었고 한 명은 다시 나갔다. 내 옆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여러 아가씨들이 들락 거렸지만, 끝끝내 빈자리를 메꾸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나이가 좀 들어보이고 목이 굵은 지배인이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여기 들어왔던 아가씨들이 전부입니다. 보신 아가씨들 중에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한 명도 없으셨나보죠?" 아가씨들이 들락거리는 와중에 이미 술과 안주가 나온터라, 지 배인에게 술한잔을 권하며 말했다. "어째 오늘은 내 눈이 좀 높나봐요. 전 오늘 혼자서 마시죠." "그래도 그렇지. 다른데서 불러올 수도 있읍니다만..." "그럴껏 까지는 없구요. 친구들이 있으니까 전 없어도 괜찮아 요. 나가서 일 보세요. 매상걱정 마시고..." "네. 그럼 재미있게 놀다가십쇼." 아가씨들이 더 있었더라도, 나는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 다. 아가씨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아니었고, 세 놈 중에 한 놈은 여자 없이 마시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떨떠름한 이유가... "자! 미정이라고 했지, 어서 쭉쭉 들어..." "민지도 들어, 안주도 먹고..." 싸롱 아가씨들은 단순하다. 평상시 나이든 손님들 앞에서는 눈 치껏 술을 마시지만, 분위기 잘 띄워주는 젊은 남자들 앞에선 비 교적 잘 받아마신다. 게다가, 아가씨들을 마지막까지 퇴짜놓았던 까다로운 손님 앞에선 더욱 잘 받아 마실 수 밖에 없다. "홀로 계신 분한테도 따라드려야죠?" "따라 주는 건 좋은데, 아가씨도 내 술 한 잔 받아야지..." "그럼요..." 두 아가씨는 조신하게 술을 따르고 있었지만, 기실, 대단히 신 이나 있을 수 밖에 없을 게다. 많은 아가씨들 중에 자신들 둘이 선택되었다는 그럴듯한 자부심은, 내색은 안하겠지만, 술집에 나 가는 아가씨들이라면, 돈을 주고라도 한 번 만끽해 보고 싶어하 는 것일게다. "술 한 병 더 들여오라 이르고, DJ 불러..."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사랑은 잠시 내게 다가왔~다... 아 픔만 남겨두고~..." `유혹`이 스타트로 불려지면서 아가씨들이나 놈들이나 죽자고 불러 대었다. 양주 대 여섯병이 바닥이 났지만, 웨이터는 새로 세 병을 더 가져와야 했다. "야, 너 웨이터!" "예! 형님!" "너 자꾸 들락거리지 말어. 난 아가씨 하고 뽀뽀할 때 누가 보 는 거 질색이란 말야! 엉! 알겠어!" "넵! 알겠읍니다요." 미정이란 아가씨의 안면에 볼딱지를 비비적 거리던 이건이 녀 석이 웨이터에게 금지령을 내렸다. "사랑은~ 은은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순간에도 느~껴지는 거....꽥꽥..." 두 어시간 동안 꽥꽥거린 후에 DJ팁 삼만원을 주고 DJ를 물렸 다. 룸 안에는 여전히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건이와 주원이는 아가씨 없는 자리에선 거의 술을 마시지 않 는다. 그러나, 아가씨가 있는 자리에선 상당히 잘 마신다. 돈이 없던 학생시절에는 싸구려 매미집에 들어갈 때도 소주 몇 병을 감춰들고 들어가곤 했을 정도다. 술 자리에서 사내 셋이 술집 아가씨 셋을 보내는 것은 어지간 한 주량이 아니면 어렵다. 그대신, 남자 셋이 아가씨 둘을 보내 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냥, 주거니 받거니 분위기만 띄우면 서 마시다 보면, 초장에 매상만 생각해서 야금거리며 받아 마시 던 아가씨들은 어느새 자세가 풀어지고 만다. 술이 술을 먹는다 는 말이 있듯이 아가씨 둘도 그렇게 흐트러져 가고 있었다. "헤헤! 이 오빠는 너무 얌전해." 주원이 옆에 앉아 있던 민지라는 아가씨도 자세를 비틀며 헬렐 레거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풀어진 탓인지, 그녀의 검은색 똥꼬 치마가 허벅지 위로 약간 밀려 올라갔다. 치마 아래의 하얀 허벅 지 사이로 희끄무레한 삼각천이 눈을 약간 자극했다. 주원은 맥주 그라스에 양주 반 콜라 반을 따라 그녀에게 주었 다. "만남을 기념해서, 폭탄주 한 번 나눠 마셔보자. 내가 반 비울 테니까, 반은 너가 비우는 거다." "좋아. 좋아..." 폭탄주 반 잔은 민지를 완전히 그로기로 만들어 버렸다. 테이블 앞으로 고꾸라지다가 소파뒤로 푹 퍼지다가 옆으로 비 스듬이 흐트러지는 민지였다. 이제까지 이건이에 비해 대단한 신사도를 지키고 있던 주원이 도 슬슬 행동을 개시했다. 입술이 입술을 덮고, 손은 브라우스 아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며 단추를 죄다 풀러놓았다. 술 젖은 이십대 초반의 하얀 속살이 뭉클하게 자극했다. 이건이 쪽은 더했다. 이미 소파에 쓰러진 미정이란 아가씨 위에서 귓 밥을 깨물며 타고 오른 이건이 녀석이었다. 이건의 손은 그녀의 팬티 스타킹 을 그녀의 팬티와 동시에 까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부터 내가 도와 줄 일들이 생기고 있었다. 미정의 엉덩이에 뻑뻑하게 걸려있는 스타킹에, 낑낑거리고 있 는 이건이부터 도와주어야 했다. 나는 이건의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미정의 반쯤 드러난 엉덩이를 한 손으로 받치고 그녀 의 스타킹을 팬티와 함께 벗겨냈다. 여인의 엉덩이 살이 사내들에게 그지없는 욕망으로 만져졌다. 이제 주원이를 도와 줄 차례였다. 소파에 비스듬이 쓰러진 민지위에서 상체를 공략하고 있는 주 원의 등 뒤로 다가갔다. 굳이 주원의 등 뒤로 다가간 것은, 비록 풀려 있는 눈이었지만 민지의 눈에 내 모습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소파아래 내 려져 있는 그녀의 종아리 둘을 소파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그 녀의 치마 속으로 양손을 집어 넣었다. 그녀의 양쪽 넓쩍다리를 타고 올라간 손 맛을 느낄 여유은 없었다. 그녀의 팬티 스타킹을 그녀의 팬티와 함께, 그녀가 인식할 사이없이, 재빠르게 벗겨내 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급적 빠르게 잡아내렸다. "으음! 내 아래가..." 민지의 입술사이에서 흐터지는 신음이 반사적으로 흘러 나오긴 했으나, 내려다 보이는 그녀의 반지르르한 넓쩍다리 사이에 자라 있는 거뭇한 털들이, 성공했다는 안도를 눈 안에 심어 주었다. 그녀가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경계할 만한 여유를 주어서 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주원이었기에, 녀석은 벌써 까내 린 자신의 아랫도리를 그녀의 거웃사이로 곧바로 비벼넣기 시작 했다. "아아! 학!" 이미 일을 치루고 있는 이건이 쪽과, 이제 막 시작한 주원이 쪽에서, 두 아가씨와 두 짐승의 하머니가 룸안을 달구고 있었다. "학학!" "아! 아아!" "헉헉!" "하아! 하아!" 미정의 날씬한 양 다리를 양쪽 어깨에 걸어메고 쑤셔대던 이건 이가 한 손을 들어 끝났다는 표시를 했다. 이젠 내 차례였다. 혁 대를 풀고 병원에서 엉덩이에 주사맞을 만큼만 바지를 내린 후, 이미 곧추 선 중심을 손으로 한 번 쓰다듬었다. 우뚝 솟은 내 것 과, 민정의 숲 속에서 이제 막 빠져 나온, 이건의 곱슬거리는 검 은 숲 아래에서 축 늘어져 대롱거리는, 것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듯 했다. `내가 만일 화가라면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을 것 을...`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민정이 달짝지근한 허우적에서 깨어나기 전에, 나는 그녀의 몸 위로 재빠르게 올라탔고, 잔뜩 쏠려있는 것을 이미 달아있는 그 녀의 질 사이로 밀어 넣었다. 이미 비벼졌던 곳이어서인지, 순탄하고 매끄럽게 밀려들어 갔 다. 나는 부드러운 왕복을 시작했다. 미정은 바뀐 나를 알아본 듯 했지만, 그녀의 부드러움에 제동 을 걸지는 않았다. 거부하고 싶은 마음의 의지보다는, 모른 척 하고 싶은 어쩔 수 없는 유혹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인 듯 했다. 그녀의 젖을 문지르며 그녀를 유린하는 쾌감은 남성만의 본능 은 아닌 것 같았다. 여인들의 신음은 고조되고 있었다. "아음! 아아! 학!학!" 달뜬 그녀들의 신음은 짐승들의 교대를 도와주고 있었다. 잠시 쉬고 있었던 이건의 남성이 여인들의 교성(嬌聲)에 힘 입 어서인지, 너끈하게 새로 솟아올라 있었다. 민지의 아랫도리에 붙어있던 주원이 빠지자마자, 이건은 민지 의 빈 자리에 자신의 중심을 채워 넣고 다시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녀석의 양쪽 엉덩이에 까맣게 찍혀 있는 점이 귀여웠 다. 두 점들 사이에서 뻗어내린 녀석의 살덩이가 민지의 구멍에 박힌 채, 헤집으며 쑤석이고 있었다. 여인들의 신음은 흐느낌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흑! 흐윽! 흐윽!" "학! 하악!" 봉긋하게 솟은 젖무덤을 입안에 한가득 빨아들이고 투실한 엉 덩이 살을 구겨쥐고 그녀의 깊은 곳을 오갔다. 마침내, 이겨지고 있던 민정의 여체가 쫄깃하게 느껴지면서 나 는 최후의 압박을 가했다. "아응! 아!" 그녀의 비음속에서, 나는 몸 안에서 얼룩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허연 절정에 잠시 바르르 떨었다. 민정의 축축한 맨살위에서 나 는 사정을 끝냈지만, 그녀의 꿈틀거림을 조금 더 즐기고 있어야 만 했다. 주원이 자신의 물건을 온전히 세우고 옆으로 다가올 때 까지... 내가 내려온 민정의 몸 위로, 물건을 다시 세운 주원이 오르고 있었다. 사그러들 줄 모르는 열기가 계속되었다. "아하! 아하!" "헉헉!" 후줄근한 땀방울을 쓸어내리며 콜라 한잔을 들이키고 나서, 풍 경을 살폈다.. 짐승같은 사내들 아래에서 눈을 감고 입을 벌리고 있는 여인들 을 보며, 붙어 있는 두 짐승과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겠 는가? 변태적 욕구? 지랄? 글쎄겠지만... 그 정도라면 우리는 차라리 좋겠다. 아마도 우리 모두의 머리 속에는 한 여인의 영상만을 떠올린 채, 열중하고 발광하면서 그리워하고 후회하며 몸부림치고 있는 것일 게다. 한동안 부대끼던 이건이가 민지의 여체에 깊숙히 파고 들었다. 녀석의 최후의 몸부림이 끝났다 싶을 때, 나는 내 것을 또 다시 쓰다듬었다. 민지에게서 빠져 나온 이건이 물수건으로 그의 것을 닦으며 바지 춤을 올렸다. 이제 녀석에게는 눈요기만 남았을 뿐 이었다. 주원과 이건이 싸질러 놓은 정액에 흥건하게 젖어있는 민지의 자궁안으로 뭉툭해 진 것을 집어넣었다. 막차였다. 흠뻑 흘린 땀으로 입술이 마르고 화장기마저 연약해진 민지의 얼굴이 풋풋하게만 보였다. 그녀의 감겨있던 검은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며 열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안에서 오래오래 머물고 싶어졌다. 나는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 주원과 이건 그리고 나, 모두 청량리 587번지 출신이었다. 정말로 587번지에서 살아서가 아니고, 588번지 인접한 곳에 살던 연유로 우리 모두는 587번지 출신이 되었다. 다섯 정거장이 넘는 H 중학교를 걸어다니던 우리 셋은 그 거리 의 누나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모자를 빼앗기고 되돌려 받는 장난 을 즐긴 적도 있었다. H 중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는 거주지가 다닥다닥이었던 관계 때 문이었는지 모두 D고교에 입학했다. 우리는 집안 환경이 그리 좋지는 않은 축에 들었지만, 학교 성 적은 상위권이었다. 성적의 기복이 많았지만, 어쨋거나, 평균적 으로 셋 모두가 1 등급은 못해도 2,3등급 정도는 유지하고 고 3 에 올라 갔었다. 셋이서 자주 붙어 다녀서였는지, 언젠가 함께 놀러갔던 S대가 우리에게 어떤 감명을 동시에 주어서였는지, 우리 모두는 S대 전 자공학과를 가고 싶어 했다. 기왕이면 장학생으로... 우리는 우리의 기대치가 비교적 높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 았다. 하지만, 절친했던 우리들은 모두가 그곳에 가야만 했고 그 래서, 가기로 했다. 우리는 83 대입 학력고사에 대한 빤한 정보를 놓고 고심했다. 총 문제수 객관식 340문항, A, B형 구별은 없고, 국어 한문 기 술 상업(공업), 수학 국사 국민윤리 정치경제 사회문화(지리), 영어(제 2외국어), 물리 화학 생물 지학, 등 14과목을 네 번에 나누어 시험치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선택 과목만 동일하게 선택하면, 같은 장소에서 시험치 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모두 같은 선택을 했고, 같은 교실에서 치게 될 경우를 대비한 볼펜 싸인과, 서로 다른 교실에 흩어져 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화장실을 이용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부호화 된 1234(! = ^ *)를 다섯 단위씩 찍은 메모지를 매 시 간마다 화장실에 갔다두면, 다른 두 녀석의 부호를 바지위에 찍 어서 되돌아 오는 수법이었다. 화장실을 안 보내줄 경우에는 헛구역질을 해대면 보내줄 것이 라고 여겨졌다. 그 외에도 써 먹을 만한 몇 가지 방법을 준비해 두었었다. 어쨋거나, 고 삼이었던 우리는 만만치 않은 계획을 짜 임새있게 완료했다. 물론 우리가 믿었던 것은 우리였다. 평균 2-3등급 짜리 셋이 짜고치면 몇 점이나 나올까도 테스트해 보니, 321점이 나왔다. 아직도 시간이 좀 있는 편이어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 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도원결의에 대한 고사(告 祀)로서, 여학생 하나에게 우리모두의 순결을 몽땅 바치기로 결 정을 보았다.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한참 거리가 있는 강 건너로 갔고, J 여 고 앞에서 서성이며 전교생 중에 한 명을 찍는데, 성공했다. 몇 몇 다른 여학생도 물망에 떠올랐지만, 우리 셋 모두가 보자마자 두말없이 반해버린 여학생은 오로지 한 명이었다. 바로 J 여고의 현주였다. 그녀의 집은 반포 3단지였고, 반포의 한 독서실을 다 니고 있었다. 우리가 납치를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주원이 때문이었다. 주 원은 비록 고 삼이었지만, 녀석의 아버지가 장안평에서 중고차 매매업에 종사했었던 탓에, 자동차엔 빠싹한 녀석이었다. 11시쯤에 도서실에 돌아올 현주를 기다리는 동안, 주원은 아파 트 앞에 일렬로 주차된 차를 물색해 놓았다. 나와 이건이가 망을 보는 동안 주원은 준비해 놓았던 굵은 철사를 운전석 유리에 찔 러넣고 간단히 차문을 열었다. 그리고 핸들 밑의 아래쪽 카바를 능숙하게 벗기고 밧데리 선을 뽑아 놓았다. 아파트 모퉁이에서 한 시간 쯤 더 기다리고 있자,200여미터 앞 의 공중전화 근처의 내리막 길을 타박타박 내려오는 현주가 보이 기 시작했다. 주원이 차 안에 재빠르게 들어가 시동을 걸었고 헤트라이트를 껐다. 이건이와 나는 놀이터 뒤에 모습을 감추고 그녀를 기다렸 다. 이윽고, 그녀가 우리 앞을 지나 주원의 차를 대 여섯걸음 남겨 두었을 때, 숨죽이며 따라가던 이건과 나는 지체없이 그녀의 좌 우에 붙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차 안으로 우겨 넣었다. 차문 이 닫히자마자 출발한 차는 황색 스텔라였다. 이건과 나 사이에 끼어 오들오들 떨고있는 현주가 무언가 오물 거리려 했을 때, 언제나 태연한 이건이가 칼끝을 그녀의 턱에 슬 그머니 갔다대었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채 아무말도 못하고 떨고 만 있어야 했다. 이건이 그녀의 양 손을 뒤로 돌려 묶는 동안, 나는 그녀의 입에 테이프를 붙여주었다. 파랗게 질린 현주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날 새기 전에 집에 무사히 돌려 보내 주겠다. 그러나, 반항하면 죽이겠다.`였다. 낙성대 뒷 길을 따라오른 황색 스텔라는, 우리가 미리 점 찍어 둔 서울대 내의 붉은 색과 하얀 색을 번갈아 칠한 굴뚝 옆의 차 한대가 딱 들어가는 으슥한 공간(당시에는 이곳이 파워플랜트 옆 이란 것을 몰랐다.)에 주차되었다. 그녀의 옷을 몽땅 벗겨내고 그녀의 양손을 머리위로 다시 묶어 뒷 좌석의 손잡이에 매어 놓고 그녀의 옷을 몽땅 벗겨냈다. 처음이어서 서툴렀던 우리였지만, 587 번지 출신이어서 였는 지, 여러 유형의 강간에 대해 줏어 들은 바가 많았다. 우리가 선택한 현주였기에 강간의 유형 중 여인이 가장 덜 다 치는 유형으로 배려를 해주었다. 주먹으로 그녀의 양 허벅지를 `꽝` 때리고 시작했다. 잠시의 지독한 충격은 여인으로서는 끔찍하겠지만, 넓쩍다리에 힘을 모 으지 못하는 여인은 더 이상 다치지 않는다. 가위 바위 보로 순번이 매겨진 우리는 그녀를 돌아가면서 범했 다. 두 번째 차례였던 주원이가 구시렁거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등은 일등이라서 좋고, 삼등은 뒤에 걸리적 거리는 마지막 이 없어 좋고, 재수없는 것이 이등이라던데...` 그녀에게서 여인을 처음으로 맛본 우리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편지봉투 안의 만원짜리 석 장을 목장갑을 끼고 꺼내주었다. 지 문을 남기지 않으려 애썼던 유치함도 있었고, 동정을 바친 여인 을 위해, 우리가 마련한 최소한의 정성이기도 했었다. 여전히 썰렁하고 어두운 학교안에 우리는 그녀를 남겨 놓고 돌 아왔다. 우리는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적나라한 여인의 나신을 접한 것 이었다. 현주의 나체가 우리 모두에게 첫 번째 여인이어서 였는 지, 아니면 탱탱하고 여리여리한 그녀의 아름다움 자체가 우리가 이제껏 보아왔던 어떤 여인보다도 우월한 것이어서였는지, 우리 모두는 이날 이때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꼽으라면, 마릴린 먼로도 아니고 부르크 실즈도 아니고 현주를 꼽고 있다. 현주에게 동정을 바친 대가가 효험을 보아서 였는지, 우리의 음모(陰謨)는 성공해서 우리 모두는 83년 당시 이 나라에서 커트 라인이 가장 높았던( 319로 기억한다.) S대 전자공학과에 모두 합격했다. 그것도 장학생으로... 그러나, 현주는 우리에게 받았던 상처때문인지, 그 해의 입시 에서 실패했고, 한 해 뒤에 인하대 스튜어디스 학과(지금의 항공 운항과)에 들어갔다.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우리가 입학한 S대 1열람실 옆 도다(도서실 매점)에서 였다. 그녀가 거 기에 어째서 앉아 있었는지는 우리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아마 우리 셋이 동시에 그녀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녀라고 확신하지 못했었을지도 모르겠다. 여고생에서 변신한 그녀는 화 사한 화장으로 성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혼자였었고, 점심 시간이 지난 늦은 오후였던 탓인지, 도다안에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슬그머니 빠져 나왔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우리는 가슴앓이를 시작해야 했었다. 그후로도 그녀는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비슷한 시간대에 거의 예외없이 도다에 한 시간 정도 혼자 앉아 있다 가곤 했다. 그녀를 처음 발견 했을 때, 우린 약간 겁이나기도 했지만, 더 욱 솔직한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그러나, 나설 자신은 없었다. 몇 주가 더 흐르면서 우리는 화요일 오후와 토요일 오후엔 으 례 도다 앞에서 모이게 되었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지켜보곤 했 었다. 우리가 그녀에게 한 짓이 점점 더 우리들의 가슴을 후벼왔었지 만, 우리는 양심에서 찔러오는 감각만으로 그녀 앞에 나타날만 큼, 곱게 자라오지는 않았었다. 모질게 자라온 우리 셋이 그녀 앞에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어 쩔 수 없던 이유는,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녀의 처연한 자태에 견디지 못한 사랑일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도다에 한 시간 가량 앉아 있던 그녀가 일어설 때, 우리는 죽 을 각오를 하고 다가갔다.. 그녀를 납치했을 당시, 도난한 차량으로 그녀를 납치한 아파트 에 데려다 줄 수는 없어서, 학교안에 버려두고 갔었다. 차안에서 그녀에게 날새기 전에 집에 무사히 데려다 주겠노라고 했던 약속 을 지키지 못한 탓에 내내 씁쓸했었다. 그래선지, 나는 `집에 데 려다 줄께.`로 그녀에게 나를 표현했고, 얼떨결에 흘린 반말이 그녀로 하여금 우리를 알아보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았 다. 우리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새초롬한 눈망울이 어느 순간 크게 확대되었고, 더할 수 없이 화사했던 그녀의 매끄러운 얼굴이 조 각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분노, 당황, 두려움등이 어우러져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 앞에 서, 우리는 미안해 보이기 위해 불쌍한 표정을 짓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었다. `당신들이로군요.`로 말문만 열어놓고 한동안 말을 있지 못하 던 현주는, 결국 눈에 가득 고인 물기만으로 놀람을 수습했고, 분노와 두려움 대신 차분함으로 우릴 맞아 주었었다. 주원이가 구겨진 얼굴로 용서해달라고 빌자, 그녀는 아무런 대 답도 하지 않았고, 불쌍하게 보이는 연기력이 남달리 뛰어난 이 건이가 눈물까지 뚝뚝 흘리면서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을 때도, 역시 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만 훔쳤다. 현주의 훌쩍임이 잦아들 무렵, 앞으로 우리를 어떻게 할 생각 이냐고 그녀에게 묻자, 그녀는 `그런 걸 여자한테 물으면 어떡해 요.`라고 대답하고는 식탁위에 머리를 수그리고 다시 흐느끼고 말았었다. 그녀의 코메디같은 대답으로 어이없이 용서받은 우리는, 그녀 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로 갑론을박 하다가 그녀를 데리고 대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결투를 벌이기로 했던 것이었다. 명목상으로는, 그녀를 차지하기 위한 결투였지만, 우리는 그녀 에게 용서받은 미안함을 표현하고자 했었던 것 같다. H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우리 모두는 태권도부에 들어갔었고, 2학년때부터 3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선수로 뛰었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원이는 이건이에게 약했고, 이건이는 나에게 약했으 며, 나는 주원이에게 약한 징크스가 있었다.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우리는, 삼각 겨루기로 현주를 책 임질 승자를 가리기로 했다. 세 명이서 동시에 치고 받는 우리의 삼각 겨루기는 어린시절부터 수 없이 치루어 왔었던 우리에겐 매 우 익숙한 싸움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가끔 우리사이에 승자가 나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철들 무렵 부터는 승부를 내지 않 으려는 고의성을 담아 놓은 스트레스 해소형 스포츠로 변모해 왔 던 쌈박질이었다. 입술이 찢어지고, 코피가 터지고, 눈탱이가 푸르뎅뎅해질 때까 지 치고 받았지만, 우리는 철든이후 언제나 그랬듯이 누구도 이 기려 하지 않았다. 아니, 누구도 이길 수 없었던 것 같다. 우리의 처참해졌던 몰골이 현주의 용서에 대한 보답으로 부족 함이 없진 않았었겠지만, 어쨋든, 그 이후로 스스럼없이 나와 주 는 우리의 현주에게 구김살 없이 대할 수 있도록 한 몫을 해주었 다고 여겨진다. 그 이후로, 우리는, 수영을 가르쳐 주겠다며 화요일마다 그녀 를 데리고 수영장을 다녔고, 매주 토요일은 그녀가 싸온 김밥을 들고 전국의 유원지를 싹싹 흘텄다. 현주가 우리의 여왕에서 우리의 연인으로 탈바꿈 되어진 것은 우리가 문무대( 80년대 초반까지 대학 1, 2 학년들은 교련과목의 이수를 위해 한주일 동안 입대해야 했다.) 입소를 한주일 앞 둔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반짝이는 토요일 오후를 학교 앞 신림극장에서 동시상영으로 보낸 것이 쑥스러워, 포장마차에서 잔뜩 사온 안주거리와 소주 여섯병과 맥주 두병을 들고, 초여름 밤의 정취를 신록속에서 즐 겨 보고자, 교내 순환도로 뒤쪽의 개울 길을 따라 올라갔다. 두 어개의 웅덩이를 지나쳐 올라갈 즈음, 물 맑은 시내 옆의 아늑한 풀밭에 현주와 우리는 자리를 잡고 술판을 벌렸다. 해가 산마루에 거의 기울어 갈 즈음 술 병들이 거의 비워졌고, 거나해 진 우리는 현주의 책상다리를 한 구석씩 차지해 베고 누 웠다. 현주는 소꿉장난 속의 어머니가 되어 자장가를 불러 준 것 같았다. 어렴풋이 잠에 빠져있던 내가 눈을 뜬 것은 주원과 거의 동시 였을게다. 옆에서 아랫도리가 벚겨진 채로 한덩이가 되어 흔들거 리는 이건과 현주의 기척이 주원과 나를 깨운 것 같았다. 얼떨떨한 와중에 현주의 다리사이에서 오가던 이건의 물건이 빠져 나오는 것이 눈에 비쳤다. 내가 몸을 반쯤 찌뿌드드하게 일으키고 있을 즈음 나보다 먼저 일어난 주원이 이건을 한 번 쳐다 보았다. 이건이 고개를 돌리 자, 주원은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 주원은 같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주원은 이건을 반대편 나무 뒤로 데려갔고, 나는 몸을 일으키 려는 현주에게 다가가 그녀의 가슴부위를 살며시 누르며 그녀를 다시 눕혔고 윗도리를 벗어 그녀의 하체를 덮어 주었다. 주원과 이건의 짤막한 대화가 나무 뒤에서 들려왔다. 아마 현 주의 귀에도 들렸을 게다. `어떻게 된 거니?` `술김에 땡낀 도둑질이었다.` `현주를 너가 고스란히 가져도 우리고, 우리가 너하고 똑같은 놈이 돼도 우리다. 어느쪽이야?` `후자가 좋다.` 주원이 돌아왔다. 주원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현주의 아랫도리 를 덮었던 내 티를 걷어내고,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 갔다. 담배 한 개피의 시간이 흘렀을 때, 주원이 현주에게서 떨 어져 나왔다. 주원이 빠져 나온 현주의 젖은 숲을, 나는 마지막으로 헤치고 들어갔다. 내가 그녀의 몸 밖으로 나올 때까지 감겨져만 있었던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싶었지만, 젖어 있던 그녀의 검고 긴 속눈 썹만이 기억날 뿐이다. 물가에서 몸을 추스리고 돌아온 현주를 위해, 우리 셋은 모닥 불을 피워 주었고, 그녀가 우리 셋 중 누구를 선택 하더라도, 선 택당한 하나는 그녀를 죽을 때까지 책임져 주겠다고 약속했다. 현주는 젖은 몸만을 조용히 말리고 있었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 중 누구라도 그녀를 책임지겠다는 것은 그녀 에게 저지른 행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셋 모두는 진심으로 그녀 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을 때, 그녀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날 이후, 현주는 우리들의 꽃이 되어, 화요일 이면 우리를 그녀의 치마폭 아래에 감싸 주었고, 토요일에는 깨알같은 글씨를 가득 적은 예쁜 이야기를 우리 모두에게 한결같이 나누어 주곤 했다. 현주와 우리는 그렇게 한 때의 청춘을 보낸 적이 있었다.- 가까스럽게 떠졌던 민지의 촛점없는 눈동자가 힘없이 떨리는 속눈썹에 의해 다시 닫혀지고 있었다. 민지의 검게 젖은 속눈썹 은, 그녀의 마른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억울한 목소리와 더불 어 우리들 모두를 심난하게 어지럽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쁜놈들야... 너희들은..." 방배동에서 흘린 진땀으로 술기운이 어느 정도 빠진 우리는, 잠원동 한신 아파트 맞은 편의 간판없이 새벽 영업을 하는, 실내 포장 마차로 뱃속을 달래기위해 찾아 들어갔다. `부킹`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이 실내포장마차는 5공때부터 아 직까지 새벽영업을 이어온 저력있는 집이기도 하다. "이 집은 역대 대통령들 사촌이라도 되나? 끈질기게 버티는 구 만..." 주원이 구석에 자리잡으며 중얼대는 말을 이건이가 받았다. "조만간 철거될꺼야." "정말이야?" "그렇다." "15년 역사를 자랑하는 물 좋던 포장마차가 드디어 사라지는구 나..." 소주 잔을 홀짝거리는 화장 두터운 아가씨들과, 나이트나 가라 오케를 거친 해장족들이, 새벽 4시를 비웃으며 군데군데 흥청거 리고 있었다. 우리는 삼계탕, 대합탕, 가이바시라등과 밥 한공기씩을 추가해 먹고 한남대교를 타고 이태원으로 건너갔다. 이태원 크라운 호텔 부근의 W다방 2층에는, 트로피, 상패 제작 회사로 위장 되어있는 사무실이 있고, 그 위층에는 40여평의 룸 이 마련되어 있다. 안기부가 운영하고 있는 일종의 안가라고 할 수 있겠다. 넓찍한 킹싸이즈 침대위에 주원이 퍼질러지며 말했다. "야! 안가 좋구나! 푹신한 침대도 좋고..." 샤워를 끝낸 우리는 얼큰한 피로를 쿠션에 파묻으며 두런거리 기 시작했다. "세월 참 빠르지." "그런 것 같다." "우리가 요모양 요꼴로 전락한 건 고 기집애 때문이야." 불쑥 내밸은 주원의 `고 기집애`가 막 잠으로 떨어지려는 우리 셋을 말똥거리게 만들기 시작했다. "맞아, 현주가 우리 모두의 인생살이를 바꾸어 놓은 거야. 제 기랄!" 이건이가 계속해서 주절거렸다. "이뻤어. 마음씨도 고왔고, 우리 어머니가 찾던 딱 맞는 며느 리감이었는데, 그 기집애도 하필이면 그런 걸 조건으로 내걸께 뭐야. 쌍년같으니...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놈에게 평생을 맡기 겠다니, 제기랄 무슨 놈의 말라 비틀어진 아름다운 사랑이냐 고... 그 기집애도 눈깔이 멀었지, 저 염치없는 기석이 자식한테 갈건 뭐야! 여기 내가 있는데... 에잇! 빌어먹을..." 이건이의 씨부렁거림을 주원이가 받아주고 있었다. "네 놈은 간수 잘 했겠니? 그래도 현주가 이건이를 선택했던 것이, 너나 나를 선택했던 것 보다는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 같 아." "현명하긴, 나를 선택했으면 적어도 이세상에서 사라지지는 않 았을 거다, 이놈아!" 이건이가 계속해서 툴툴거리자 주원이 옛 일을 들춰내었다. "쯔쯧 미친 놈! 그럼 그때 잘 하지 그랬어. 아무리 술팔고 몸 팔던 년들이었지만, 진선이 하고 은정이 사이에서 오락가락 거렸 던 놈이... 게다가, 은정이하고 진선이는 가까운 친구 사이였잖 아. 고 따위 짓이나 하고 다니던 놈을 미쳤다고 현주가 선택하겠 니? X랄 썩지않은 게 다행인 줄이나 알아. 이놈아!" "이런 못 된 새끼, 치사하게 남 쓰라린 과거를 들추기는... 네 놈은 어떻고, 모녀를 동시에 희롱하다가 사발시계에 뒤통수나 깨 진 주제에..." "큭큭큭큭큭!" 주원과 이건의 투닥거림에 실소가 흘러 나왔다. 사이좋은 친구사이였던 은정과 진선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쳐왔 던 이건은, 탁월한 경지의 감언이설로 두 여인과 동시에 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한 이불속에서 두 여인에게 보람있게 시달리며 쉴새없이 찍어 댄 것 까지는 나무랄 데가 없었는데, 그만 나른한 피로때문이었 는지 깊은 잠속으로 골아 떨어진 것이 문제였다. 뺀질뺀질하고 의기양양하게 깨어져야 했었던 이건의 깊은 잠은, 이건에게 영원 한 비애가 되어 그의 가슴에 한(恨)으로 새겨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건이 보람있는 깊은 잠에 빠져든 데 비해, 끄트머리의 허무 와 배신감에 휩싸였던 두여인이 복수를 결의했고, 앙심을 품은 두여인으로부터 이건은 테러를 당했다. 이건이 그녀들 사이에서 곤하게 자빠져 자고 있었을때, 그녀들은 넥타이로 이건의 입에 재갈을 물려놓고 불을 질렀던 것이었다. 이건이 아랫도리의 화끈 함에 깨어 났을 때, 다행히 물건은 무사했었지만, 그의 검고 윤 기있게 곱슬거렸던 털들은 몽땅 누렇게 타들어간채 부스러져 버 렸다. 이건은 `넥타이 끈으로 입에 재갈을 물린 채 X털을 태워보지 못한 놈은 사랑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구설로 자신의 치부를 미화시키며 현주와의 잠자리에 끼어들려고 애썼으나, 몽땅태운 빽X지의 징그러움으로 인해 한동안 현주로부터 배척당할 수 밖에 없었다. 주원도 그와 비슷한 주책을 부린 적이 있었다. 학교 구내 식당 아줌마들에게 유달리 인기가 좋았던 주원은 그 가 자주 다니던 방배동의 까페 여주인에게서도 지극한 사랑을 받 고 있었는데, 당시 삼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40대 초반의 여주 인은 딸 하나를 둔 과부였다. 주원과 함께 가기만 하면 언제나 우리에게 공술을 먹여 주곤 했었다. 언젠가, 거나하게 취한 주원은, 우리가 얻어먹은 공술의 십자 가를 지기위해 그녀의 집까지 따라가 봉사해 준것 까지는 좋았었 는데, 새벽에 화장실을 갔다가 덜 깬 술 탓이었는지 아니면 고의 였는지, 그만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과부의 외동딸이 자 고 있던 2층으로 기어 올라간 것이었다. 외마디 비명소리에도 주 원은 의연하게 침대 위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더듬 거리고 있었나 보다. 아래층에서 까페 여주인이 뛰어 올라왔고 컴컴했던 방의 불이 켜졌다. 주원은 팬티차림임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고 재빠르 게 도망쳤지만, 억울하게도, 당시 E여대 체육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침대속의 아가씨가 힘있게 집어던진 탁상시계에, 뒤통수 가 터지며 붙잡히고 말았다. `잘 곳 없어 애처러운 아르바이트 학생이라 하룻밤 재워 주려 데려왔다`라는 까페 여주인의 변명은 그녀의 딸에게 어머니로서 의 변명이기도 했지만, 주원의 입장에서는 건전한 대학생으로서 의 변명이 되어, 여덟 바늘을 꼬맨 채 병원에 누워있던 주원은, 문병 온 E여대 1학년과 눈을 맞출 수가 있었다. 두 달이 넘도록 뒤통수에 반창고를 붙이고 다녔던 주원은, 멀쩡한 뒤통수에 반창 고를 갈아 붙혀 주던 현주에게 `모녀 사이의 사랑에 고민해 보지 못한 놈은 사랑을 논할 자격이 없다.` 라는 어수룩한 플레이 보 이의 궤변철학으로 현주의 환심을 사려했었지만, 그날 이후로 현 주는 더 이상 주원의 뒤통수에 반창고를 붙여주려 하지 않았다. 이건과 주원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물론 현주였다. 현주 는 이건과 주원의 그런 마음을 아는 체하지 않았지만 고마와했 고, 그녀 역시 모두를 사랑했다. 그녀는 모두에게 향해야만 하는 그녀 자신의 사랑이 미안해서인지 괴로워서인지 초라해져만 가려 고 하고 있었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이야기 하고 싶어졌다. "너희들한테 면목이 없다. 현주 본인에게는 물론 너희들에게도 용서를 빌 낯도 없다. 너희들도 잘 알겠지만, 그녀는 우리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해서 시작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우리를 탓했던 적이 없었어. 다만 우리들 사이에서 일부종사할 수 없다는 여인으로서의 열등 감을 갈무리한 채, 항상 죄스러워하며 고민했던 것 같아. 그녀가 나를 선택했던 것은, 너희들이 그녀의 그런 마음을 달 래주려고 너무 심하게 애썼기 때문이야. 이건이 너는, 밑 파는 년들까지 동원해서, 헤프게 노는 꼴을 현주에게 보여주며 현주의 미안함을 달래주려고 버둥거렸고, 또 주원이 너도, 애꿎은 모녀들 사이를 오가며 어줍짢은 짓으로 현 주를 위로하려 했지만, 둘 다 도가 너무 지나쳤어. 현주는 머리는 나빠도 눈치가 없는 여자는 아니었어. 언제나 부드럽게 수그리고는 있었지만, 자존심이 있었고, 지조마저 서늘 한 여인이었어. 너희 둘이 현주를 차지하기 위해 그녀 앞에서 부린 주책들은 현주로선 아마 부담이 되었을 꺼야. 더러워지겠다고 몸부림치는 너희들의 마음을, 지저분해지고야 말겠다는 그 속뜻을, 현주의 풍부한 감성으로 헤아리지 못했을 리가 없어. 너희들이 그녀에게 애써 보인 성의는, 오히려 그녀의 자존심과 지조를 고집스럽게만 만들었을꺼다. 너희들에게 가는 사랑을 더 욱 송구스럽게 만들었을테고, 또, 가끔 너희들을 꼴보기 싫게도 만들었을게고... 그래서, 현주는 뻔뻔스러웠던 나에게 자신을 맡긴 것 같아. 너희 두놈들에 비해, 일찌감치 현주를 포기하고 착하고 예쁜 영숙과 새롭고 진지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내가, 현주는 덜 부담 스러웠을꺼야. 뿐만아니라, 그보다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여 인이 집착하는 사랑은, 은근하게 빠져 나가려고 하는 사랑이란 것을, 너희들이 나보다 약간 늦게 깨달았던 것이지. 그런 점에서, 그 당시 나는 확실히 너희들보다 한 수 위였던 것 같아. 나 역시 현주를 포기하진 않았어. 그러나, 포기한 척해 야 했는데, 자주 얼굴을 대하면서 그런 척하긴 힘들고 무언가 확 실한 것을 그녀에게 보여 주어야 했지. 그래서 진짜 괜찮은 영숙 을 정말로 꼬신거지. 그래서, 현주는 나에게 속았고, 결국 불안 한 사랑에 그녀의 인생을 던졌지. 그런데, 너희들보다 똑똑하기도 했던 나였지만, 너희들보다 더 욱 미련했던 것도,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나더라구. 내가 판 함정에서 나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었으니까... 현주를 꼬시기 위해서 꼬셨던 영숙을 진짜로 사랑하다 보니까, 영숙과 현주 중 누굴 더 사랑하는지 차이를 느낄 수가 없더라구. 영숙과 현주에게 동시에 진정(眞情)을 주다보니까, 그냥 똑같이 사랑하게 되었던 것 같아. 이번에는 내가 고민하며, 해결방법을 모색했지. 중동의 엔지니 어로 가면서 둘 다 데리고 해외로 나르는 거였는데, 영숙의 아버 지에게 들켜서 영숙은 딴데로 시집가 버렸지. 그렇게 실패했어. 그 덕에 거칠어진 나는, 두 여인중 한 여인만이 떠났을 뿐인데 도, 나 자신을 가누지 못하며 허우적 거렸어. 불똥은 현주에게도 튀어서, 나는 그녀에게 학대보다 더한 무관심으로 대했고, 매서 운 바람둥이가 되어 애꿎은 날라리 아가씨들을 작살내며 현주의 흐느낌을 즐기려 했지. 당시, 영숙의 아버지에게 들켰던 이유가, 현주가 영숙의 아버 지에게 우리들의 일대이 사이를 고자질하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 이라고 여겼었지. 거기에다 구실을 갖다부치며 나는 현주에게 못 되게 굴었던 거지. 근데, 이제와 돌이켜 보면, 현주의 편지질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아. 내가 나약한 보통 남자이었기 때문에, 영숙을 잃 은 고통을 혼자서 달래지 못해서 가장 가까운 현주를 괴롭힌 것 같아. 영숙과의 깨어진 사랑에 난 무언가 이유를 갖다 붙이고 싶어한 것 같았고, 그걸 현주의 편지질에서 찾아낸 거야. 구실을 찾은 나는, 견디기엔 너무 괴로운 울화를 나혼자 감당하기 싫었고, 현 주에게 퍼 부우면서 그녀가 느끼는 고통으로 나를 치유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 한 마디로 악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사내의 야비한 본성이었던 것 같아. 떠나간 사랑에 비틀거리며 지독하게 불쌍해지는 것은, 여인보 다는 사내라는 것을 나는 이 때의 체험으로 깨달았지. 그 후로 나를 또 한 번 괴롭혔던 것은 영숙의 아버지에게 고자 질한 편지가 현주 짓이 아니고, 영숙의 동생 영옥의 짓이란 걸 알았을 때였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이상 불쌍해질 수 없을만큼 비참해진 것 은, 현주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달려갔을 때, 그녀가 이 세상에 서 사라져서 `나는 다시는 그녀를 만나볼 수 없다.`라는 허무(虛 無)를 터득한 것이었지. 허무해진 나는 정글과 사막을 떠돌며 석유캐는 엔지니어 노릇 을 했지만 고된 줄 몰랐고, 우연한 기회에 끼어들게 된 전쟁놀이 에서도 무심하게 총질을 해댈 수가 있었던 것 같아. 허무는 더 이상 아낄 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유지만, 그래도 슬 퍼지고 불쌍해지고 정이 안 가는 것이 내가 겪은 허무야. 빌어먹 을..." 잠자코 듣던 주원이가 큰 덩치를 뒤척이며 씁쓸하게 말했다. "어쨋거나, 여자는 요망(妖妄)해.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것이 가슴을 한 번 할퀴면 여러 해가 지나도 아물지가 않거든..." 옆에서 담배 한 개피를 뽑아 문 이건이가 긴 한숨같은 연기를 뱉아냈다. "후욱... 현주가 기석이에게 허무를 남겼다면 나나 주원이 너 에게는 무엇을 남겼을까?" 주원이가 대답했다. "글쎄... 현주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표현할 수 있는 낱말을 내 머리로는 찾아낼 자신은 없고, 다만, 우리는 첫 번째 여자를 너무 재수없이 좋은 여자를 만났었던 것 같아. 그건 우리 에게 행운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불행이었어. 현주이후에도 여러 여자를 만났었지만, 어쩔 수 없이 꼭 비교 하게 되는 것은 현주였는데, 다들 현주에 비해 너무 똑똑한 년들 이었어. 똑똑한 것 자체야 나쁠 건 없겠지만, 현주보다 형편없이 못 생긴 년들 뿐이었거든. 이쁜 년이 마음씨도 착한 것인지, 마 음씨 고운 년이 이뻐보이는 것인지, 난 아직도 헷갈려. 아뭏튼, 현주이후에 만났던 년들이 적진 않았지만, 아무리 모 양새가 그럴 듯해도 현주에게서 느꼈던 감정은 느낄 수가 없더라 구. 정말 현주가 대단한 년은 대단한 년이었나 봐. 제기랄..." 이건이가 주원의 말을 이어갔다. "이쁘기도 이뻤지만, 그렇게 미련한 년은 세상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아. 기석이가 섭섭하게 대하면, 우리에게 오면 어때 서......" 주원과 이건의 군시렁거리는 소리를 가물하게 느끼면서 내가 나직하게 말했다. "현주 이야기는 그만하고 자자. 자고 일어나서 할 이야기를 하 자."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밸 소리에 깬 우리들은, 세면을 끝내고, 누런색 커튼을 젖혔다. 도로 보수 공사로 좁혀져 있는 길을 땅꺼 미가 더욱 답답하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에서 깬 우리 들의 아침은 늦은 오후였다. 이건이가 철제 책상에서 몇 가지 서류철을 뒤적이며 부산을 떨 었고, 주원이 흐트러진 침대를 정리했다. 정리를 끝내고, 우리는 길쭉한 유리 탁자를 중앙에 둔 갈색 가 죽 소파에 둘러 앉았다. 탁자 위에는 이건이 정리한 서류철이 놓 여져 있었다. 이건이의 눈빛이 진지해져 있었고, 주원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 져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너희 둘이 나에게 우정을 담보로 요구하겠다는 그 거 창한 이야기 좀 들어보자." 이건과 주원은 사전에 이야기를 끝낸 듯, 서로 눈빛을 한 번 교환하더니, 이건이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판단국 시절부터 내 상관이었던 이 병욱 2차장에게 불려갔던 적이 있었어. 참고로 이 병욱 2차장은 안기부 안에서 인정받는 미국 정보통으로 전직 CIA 요원이었고, CIA 국장 이었던 로버트 게이츠 밑에서 일하며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가까워진 사이였다고 해. 한달 전쯤에 게이츠가 한국을 비공식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 병욱 2차장과 만났었지. 당시에, 게이츠와 비중있는 남 북문제에 관해 언급하던 중, 정찰 위성 정도의 첨단 과학 만 으로 해결 불가능한 난제를, 실질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007식 첩보전에 대해 논의했었나 봐. 이 병욱 차장이 현장 임무 수행 능력을 확실하게 갖춘 요원의 부재(不在)에 아쉬움으로 한탄을 표시하자, 게이츠가 어떤 한 사 람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인 호감을 표시하면서 언급했다고 하더 군. 물론 그 당시에는 그냥 흘리는 말이었다고 했어. 게이츠가 그 사내에게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되새기 는 정도였었다고 했거든. 사막의 폭풍작전이 있기 전, 후세인 벙커 침투를 위해, 벙커 내부 설비에 관여했던 한 명의 동양계 엔지니어를, 모사드와 합 작으로 훈련시켰다고 하면서, 그 젊은이가 CIA와 모사드의 수법 을 얄미우리만치 빈틈없이 배워갔다고 하더래. 그리고 덧붙이길, 그 동양인만 얻을 수 있다면, CIA요원 반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 겠다며 그 젊은 전사의 행방에 아쉬운 안타까움을 삭이지 못하더 래. 그래서, 이 병욱 차장이 그런 과분한 찬사를 받는 인간의 국적 이 어디냐고 게이츠에게 물었더니, 게이츠 자신도 정확히는 모르 겠다고 대답하면서, 다만, 게이츠 자신이, 그 젊은이에게 세상에 서 누굴 가장 존경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 젊은이가 대 답하길, `프린세스 낙랑(PRINCESS NAKRANG)`이라고 대답했다더 군... 그 후에, 게이츠가 `프린세스 낙랑`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더 니, 바로 이 한반도에서 전설처럼 구전되어 오던 설화속의 여주 인공이 바로 프린세스 낙랑이란 것을 알아내었대." 이건이 테이블위에 놓여진 서류철에서 영문으로 찍여진 서류 석 장을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이 병욱 차장이 `프린세스 낙랑`에 대해 게이츠로 부터 얻어 낸 자료야. 물론 명목상으론 게이츠에게 그 사내에 대한 존재를 추적해 보고, CIA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인가를 알아봐 주겠다며 선심까지 쓰는 척하며 뽑아낸 자료래." - CODE NUMBER: ZBDEBUT405 CODE NAME: PRINCESS NAKRANG NATIONALITY: ? AGE: ? ........................... ........................... ........................... 일본 국적의 여권을 사용했던 것으로 미루어 일본인일 수도 있 겠으나, 405 가 존경하는 인물이 일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반도의 낙랑 공주임을 상기해 볼 때, 북한 또는 남한의 국적을 가졌거나, 아니면 낙랑이 한 사군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니만큼, 중국국적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낙랑의 파트너였던 호동왕자 가 고구려의 왕자이었음을 비추어 보건데, 아마도 북한 국적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 ........................... ...........................- 세 장의 서류에는, 프린세스 낙랑의 애매한 국적에 대한 추측 과 후세인 벙커 침투에 대한 준비 과정및 침투에서 보여준 프린 세스 낙랑의 능력과 평가등이 화려하게 기록되어져 있었고 낙랑 공주에 대한 설화도 요약 되어져 있었다. "다른 건 대충 알겠는데, ZBDEBUT는 뭐야?" 내 질문에, 이건이 떠듬거리며 주절대었다. "`ZOOM BOOTY, DEUCE-EDUCING UNTOUCHABLE` 의 약자인 모양인 데 뜻은 나도 잘몰라. CIA에서 사용하는 인물목록 단위겠지." 어정쩡하게 얼버무리는 이건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대충 넘어가고, 서류철에 있는 나머지 화일들은 뭐니?" 이건이 서류철을 통째로 건네주었다. "걸프전이후, 프린세스 낙랑이 개입했다고 여겨지는 사건들에 대한 분석자료야. 맨 위에 있는 사진은, 쿠바인 암살자들인데, 알래스카에서 시 체로 발견되어졌을 당시에 찍은 것이고, 이들이 소지한 AK47 소 총은, 부시를 암살하기 위해 이라크의 후세인이 고용했던 쿠바인 들이 지니고 있던 소총들과 일련번호들이 이어져 있었지. 그 밑에 사진은 원래는 벽으로 위장된, 금고가 있던 자리였는 데, 금고는 없어지고 구멍만 남아있는 사진이야. 마카오 타이파 섬에 있는 하얏트 호텔 카지노의 금고인데, 1375만달러가 털렸다 고 하던데... 또 그 아래는...주절주절..." 사진들을 무시한채 사건개요를 정리한 서류들을 살펴보던 나에 게, 이건이 개략적인 설명을 해주고 있었지만, 듣는 나나, 떠드 는 이건이나, 별반 성의는 없었다. 그러나, 대강의 설명을 끝낸 이건은 마지막 말만은 목에 힘을 주고 내밸는 것 같았다. "그 자료들에 대한 기석이 네 생각을 듣고 싶다." 잠시 고개를 들어 이건을 쳐다보니, 이건은 눈동자를 고정시키 며 비켜주지 않았다. "어떤 생각?" 반문하는 내 얼굴에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건이 물 고 늘어졌다. "그 자료는, 이 병욱 차장이 나에게 조사할 것을 지시하며 일 임한 자료들이야. 없앨 수도 있고, 다시 판단국으로 올릴 수도 있어. 이 병욱 차장으로부터 그 자료를 넘겨 받고 사실 난 한동안 당 황할 수 밖에 없었어.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여기있는 주원이와 나는, 프린세스 낙랑이 얼마나 이쁜 여자인지 잘 알고 있잖아. 우리 모두는 그녀를 사랑했고, 어제 밤, 주원이와 내가 현주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도 프린세스 낙랑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 였다. 너희들 모두 잊어 버리지 않았겠지만, 현주가 세상에서 없어졌 을 때, 내가 `현주만큼이나 미련한 계집애가 또 있을까?`라고 허 탈해하자, 주원이가 `있다면 낙랑공주 정도겠지.`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다음 기석이 네가 한 말을 기억하니?" "......" 잠자코 있는 내 대신 주원이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이제부터 누가 나에게 세상에서 누굴 가장 존경하냐고 묻는 다면, 난 프린세스 낙랑이라고 할꺼다.` 였다." 다시 이건이가 말을 이어갔다. "난 네가 중동에서 어떤 짓을 하고 사는 지에 대해서 대충은 알고 있었다. 우린 친구니까... 그러나, CIA 국장이 와서 떠벌리 고 갈 정도로 끔찍한 녀석일 줄은 몰랐다. 정말, 이런 짓을 하고 다닌 건 다닌거냐? 했다면 그리고 하고 있다면, 너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해야했고 하고있는 거니?" 나는 88 담대 한 개피를 뽑아 들고 불을 붙혔다. 입에서 나온 연기를 코로 둥그렇게 다시 빨아 들이곤 무색이 된 담배연기를 뿜으며 말을 시작했다. "프린세스 낙랑의 존재가 드러난다면, 아마도 이건이 너에 의 해서 일 것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또, 드러나도 가려줄 것이 너이기 때문에 내가 프린세스 낙랑으로 불리워 지게끔 만들 었는지도 몰라. 그래... 네가 늘어놓은 이 자료의 대부분은 내가 개입된 거야. 물론 여기 있는 자료는 내가 개입했던 것들의 오분의 일도 안되 는 자료량이고, 또 이 자료들 중에는 나와 무관한 것들도 없진 않아. 조선땅이 개입되어지지 않은 곳에서, 프린세스 낙랑이란 이름 이 섞여서 거래 되어지는 사건들이 있다면, 그건 너희들 앞에서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 하고 있는, 내가 관련된 공작일 꺼야.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싸움을 붙이기도 하며, 사람을 구하기 도 하고 죽이기도 해. 인간사에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전쟁인 것 같아. 그덕에, 우리 회사는 불황이 없어. 지구 땅덩이 를 뒤져보면, 고객은 언제든지 있거든. 총을 쏘고 폭탄을 터뜨리는 전쟁도 본사의 거래처가 되어 주고 있지만, 전쟁터의 고객이 아니더라도, 임자없는 이권이 진공상태 에 빠져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판단되면, 우리가 가서 스스로 챙겨오곤 하지. 40인의 도적떼들과 알리바바의 관계에서 처럼, 도둑놈한테서 훔친 물건들을 강도질하면서, 우린 그렇게도 살아. 이런 저런 험한 일을 하는 이유는, 직원들마다 모두 제각각이 겠지만, 처음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돈 때문에 라고 대답하는 경 우가 대부분일꺼야. 한 몫 챙겨서, 편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보 통 사람들 생각일테고, 우리라고 다를 바는 없겠지. 그런데, 모든 직원이 돈 때문에 움직이는 거냐고 누가 묻는다 면, 그건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어. 우리 직원 중에는 한 평생을 충분히 여유작작하게 살아갈 만한 부자도 적지 않거 든. 특히, 회사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시니어 레귤러들을 살펴 보면, 돈 때문에 험한 짓을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아. 그렇다고, 어떤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이런 일을 하며 회사를 떠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물론, 과거에는 이념이나 한같은 것 때문에 모질어 져서, 테러 집단이 형성되어진 것도 사실이고, 그런 집단들이 아직도 없진 않지만, 8-90년대를 거치면서, 그런 집단은 거의 대부분 아마추 어로 전락해 버렸어. 대부분 광신에 가깝게 쇄뇌되어진 아둔한 대가리들로 벌이는 짓들이란 것이 미친짓에 가까워서, 목적한 바 를 이루려고만 하는 욕망하나로 날뛰거든. 그러다 보면, 얻어 지 는 것은 쥐뿔도 없고, 여기저기에서 욕만 먹고, 피만 흘리지. 쌈질이 좋다고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것은 전사가 아니야. 죽을 곳이 뻔한 싸움터는 피해 갈 줄도 알아야 전사고, 싸워서 무엇인 가를 얻고 돌아와야 전사다운 전사야. 그래서, 약은 전사들은, 이념에 의해서 움직이는 테러집단에 몸을 파는 경우는 드물어. 그런 집단은 아마추어가 대부분이고, 또 용케 그런 집단 속에서 버틴 아마추어가 프로로 성장할 즈음이 되면, 시야가 트여서 독 립을 하거나, 우리 회사처럼 합리적인 이권과 안전에 신경 써 주 는 곳으로 회사를 옮기지. 그래서, 이념과 종교적인 맹신에 대한 옹고집만이 뭉쳐있는 집단에는 노련한 경험을 축적한 전문가들이 별로 없어. 이곳저곳을 다 둘러보며,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겪 어보며, 오래 살아 남은 전사들은, 어느 한 지역의 편협한 사상 을 신념으로 굳혀둘리도 없고... 노련한 전사들을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돈을 무시할 순 없고, 인정(人情)도 필요하겠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사들이 오래 일할 수 있도록 안 전(安全)에 지대한 심혈을 기울여 주는 회사라는 신뢰를 심어줄 수 있어야 해.. 돈이야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서, 인정(人情)은 인정(人情)때문 에 어디서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어서, 그렇다치고, 안전이 가 장 중요한 까닭은, 삶에 연연해서도 그렇긴 하겠지만, 그것보다 는, 진짜 전사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명예때문에 그런 것 같아. 어려운 여정에서 누구보다도 더 오래 살아 남겠다는, 전사의 꿈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한심하고 미련해 보일 수도 있 겠지만, 총알밥에 숟가락질을 하고 사는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 아." 재떨이에 떨구어진 재위에 담배불을 비비적거리고 있을 때 주 원이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끝까지 살아남는 명예를 지켜보려구, 사람잡는 짓을 계속하는 거니?" 다시 새로 한대의 88에 불을 붙이고 나는 계속 이야기 했다. "사람들이 일하는 이유가 뭐겠니? 밥을 먹기 위해서? 옷을 입기 위해서? 집에서 자기 위해서? 이런 것들이 일하는 이유의 전부가 될 수 있겠니? 아닐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주 때문에 일하는 것처럼 보여도, 개개 인을 붙잡고 그 속을 헤집어 보면 오만가지 이유가 있을꺼야. 내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사람잡는 짓을 한다고 너희들에게 말하진 않았어. 그건, 그냥 내가 바라본 전사들이 그렇게 보인다 는 거였어. 나 역시 한 개인이고, 내 속을 뒤집어 보이면 별의별 잡스러운 이유들이 먼지처럼 떨어져 나올꺼야. 전사의 명예에 욕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그것 도 내가 이런 짓을 하고 사는 한 가지 이유는 될 수 있다. 하지 만, 말그대로 한가지 이유일 뿐이야. 굳이 이런 저런 이유를 더 주절거려 보라면, 다른 어떤 일보 다, 집중이 잘 돼. 그러다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중에 가장 잘하는 일이 되어버렸고, 또 나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이 이 땅에서는 거의 없을 것 같은 왕자병도 나쁘지 않고, 거머 리처럼 머리속에 달라붙어 있는 유별나게 행복했던 괴로운 과거 들이 일할 때는 잠시 잊혀지거든. 그게 좋은 것 같아." 이건이 테이블위의 서류에 다시 초점을 맞추었다. "이 자료를 어떻게 처리해야겠니? 나는 지금 안기부원으로서가 아니라 한 기석의 친구로서 묻고 있는거다." 내가 반문했다. "순전히 친구로서만 이 문제를 처리할 생각이냐?" 이건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이번에는 주원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주원이 너는?" 주원이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오늘 현주 이야기 외에는 별로 들은 것이 없다." 얼굴에 주름이 느껴지면서 웃음이 삐져 나왔다. "큭큭큭... 여우같은 놈들..." 내가 웃는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주원과 이건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간사하게 웃었다. "크크.." "헷헷! 어째 눈치 챈 것 같다." 뺀질거리는 이건과 주원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훅 뿜어주며 다 그쳤다. "약은 척은 그만하고, 둘이 짜 놓은 각본이나 들어보자." 이건이 철제 책상안에서 또 한뭉치의 서류철을 들고왔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만, 이 병욱차장으로부터 너에 대한 건을 지시받았을 때, 사실 이차장은 별로 기대를 하는 눈치는 아 니었다. 상대가 워낙 모호한 프린세스 낙랑이고, 우리 의사대로 움직여 줄 만한 구석이 짚이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우리쪽 에 해나 입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프린세스 낙랑에 대한 조사를 시도해 보라는 의도였던 것 같아. 그러나, 나는 달랐어. 프린세스 낙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 간, 프린세스 낙랑은 내친구 한 기석이란 사실을 그 자리에서 알 수 있었거든. 물론, 이 차장 앞에서 그런 내색은 하질 않았어. 다만, 이번 일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나에게 맡겨진 것이, 무엇보 다 다행스러웠다. 국가적인 입장에서나, 여기 앉아있는 우리들 개개인에게나... 조사를 착수하는데 안기부내의 다른 인력을 동원할 상황이 아 닌지라, 주원이에게만 도움을 청했다. 사실, 너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데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리도 없는 까닭에, 나나 주원이는 앞으로 이 땅안에서 너의 위치를 어떻게 감추고, 어느 범위 안에서 이용해 먹어야 하는지를 의논했고, 또 너의 이야기 를 들어야 했다." 이건이 잠시 말을 끊었을 때 내가 계속할 것을 종용했다. "주원이와 의논을 했다면,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듣고 싶 다." 이번에는 주원이가 다물고 있던 입을 떼기 시작했다. "이건이와 내가 구체적으로 의논한 것은 이 땅에서의 잠정적인 너의 위치를 생각해 보았고, 너를 어떻게 운용해야할 지에 대한 우리 둘만의 논의 였으니까, 기석이 네가 들어보고 마음에 안들 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면 그만이다. 이번에 안기부 내의 `대마약 정보센터`를 `국제 범죄 정보센터 `로 확대 개편시킬 계획이다. 이 정보센터를 통해, 헤로인 코카인 대마초등 마약류 밀반입, 여권 외화 유가 증권 위 변조, 금괴 보석 밀수, 청부살인 인신매 매, 북한의 대남테러등 국제 전반에 대한 정보수집을 강화할 계 획이다. 안기부는 이미 이를 위해, 서울을 비롯한 부산 인천 제주등 국 제공항과 항만지역에 국제 범죄 신고 상담소를 설치 운영할 준비 를 거의 끝내놓고 있다. 또, 외국 정보기관과의 정보협력 확대등 을 통해 수집된 정보등을 검찰 경찰등이 필요로 할 때 제공해 줄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이 기구를 통해, 너를 감출 수 있고, 너 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건이와 의논했다." 주원이의 설명에 잠시 헛웃음이 나왔다. "헛헛헛... 나를 그런 곳에 감춰두고 무엇에 이용해 먹을 생각 을 했는지도 마저 들어보자." 이건이가 나섰다. "너에 대한 용도야,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주원이와 촛점 을 맞춘 것은 대북 공작 업무였다. 사실, CIA 의 첩보위성이나,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집해 오는 정보만으로는 대북관계에 적절하 게 써 먹기에 부족함이 많다. HID를 통해 직접 얻어오는 자료들 도 이중적인 것이 많아 어려움이 많다." 듣는 와중이었지만, 이건이의 말허리를 잘라야 겠다고 여겨졌 다. "그래서, 날더러 저 쪽에가서 이런저런 도둑질을 해달란 이야 기인 모양인데, 그럴 수는 없다. 자신도 없지만, 하고 싶은 생각 이 일지 않는다. 이건이가 말을 멈추고 반문했다. "너도 인정하겠지만, 우린 친구다.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우리들의 심정을 이해 못 하겠니?" 주원이도 끼어들었다. "기석이 네가 넘어가야 할 상황이 전개되어진다면, 어떤 수단 을 동원해서라도 나도 같이 가겠다. 그러니, 이건이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라."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째, 나를 저쪽으로 떠밀려는 분위기가 역력한데, 하필이면 나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뭐니? 안기부나 정보사에 그렇게 사 람이 없니? 아니면 저 헐렁한 CIA자료에 내 도둑질이 그렇게 일 품이라고 긁어져 있디?" 이건이가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안기부나 정보사에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 CIA 자료 때 문에 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CIA 자 료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읽었다면, 너를 대북공작에 맞추어 놓고 포섭을 생각하진 않을꺼다. 그러나, 나는 이십년이 넘도록 네 가까이에서 너와 반생을 보 낸 친구다. 뿐만 아니라, 너의 족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네 할머니에게서 너의 할아버님들의 이야기를 너와 함께 들은 적 이 있으며, 너의 아버님에 대해서 자세히는 아니더라더도, 대강 어떤 분이시라는 것까지 너에게 직접들은 사람이다. 그런 것이 내가 지금 너를 대북업무에 끌어들이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나나 주원이가, 너에게 유신시대 때처럼 빨갱이들을 때려 잡아 달라는 식으로, 북쪽에서의 일을 도와 달라는 것은 아 니야.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은 일인데, 다리가 없어서 오가지 못할 때, 다리가 되어줄 수 있잖아. 너와 그리고 중동의 아버님 이라면...안 그러니? 사실, 우리가 일을 하다보면, 잘 이야기 해보면 상대방이 다 좋은 일이 될 수 있는 건인데, 우리쪽 하고 저쪽하고 의사소통이 되질 않을 때가 많아. 물론 이럴 때의 의사소통이란 것은 대단히 비공개적이어야 하는 건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왕왕 있거든. 그 럴 때, 누가 끼어들어서 어부지리를 얻는 줄 아니? 중국놈 일본 놈 미국놈 러시아놈, 그런 놈들이 끼어들어서 제 놈들 챙길 것만 챙기고, 우린 우리대로 일만 꼬인 덕에 감정만 상하고... 그런 일이 없을 것 같니? 그럴 때, 도와달라는 이야기야. 너하고 아버님이라면 얼마든지 순수하게 도울 수 있잖아." "큭큭큭... 이건이 말재주가 많이 늘었다. 이놈아! 내가 세살 박이 어린애니... 네 말은 즉슨, 서로 좋을 때 도와달라는 이야 기인데, 그런 건수에만 나나 아버님을 부려먹으려 하겠니? 너야 그럴 수 있다쳐도, 윗 대가리들이 알아봐라. 이런 용도에만 만족 하고, `그래라`만 하고 앉아 있겠니? 멍청한 자식같으니라고..." 이건이가 상을 찡그렸다가 도로 폈다. "기석이 너는 나나 주원이를 그 정도로 밖에 평가 못하니? 이놈아, 그래서 너에 대한 건을 우리 셋이서만 이야기 하고 있 는 것 아냐. 나는 바람막이가 될 자신이 있고, 이 차장을 충분히 설득할 자신이 있다. 다 좋고 좋은 것인데, 이 차장 머리속에 똥 만 들어 있겠니? 필요한 공작을 구상하는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니? 네가 아까 언급한 윗 대가리라고 생각하니? 천만에 말씀이다! 공작 구상은 나같은 쫄다구가 하고, 윗 대가리는 더 윗대가리에게 이런 저런 공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슬쩍 비치고, 더 윗대가리가 무언의 승락을 내리면, 네가 가서 실시하면 되는거야. 그러니, 프린세스 낙랑에 대한 비밀보장을 낙랑이 원한다면, 내가 이차장에게 낙랑의 가치와 존재만을 보장해주고, 함구에 대 한 당위성을 대충 설명해주고, 나 자신이 바람막이가 되겠다고 나서면, 이 차장도 더 이상 낙랑에 대해서 파고들려 하지 않을꺼 야. 파고들 수도 없지만, 파고든다 해도, 기껏해야 나를 족치거 나, 내 뒤를 캐는 것인데, 나는 너를 팔아먹고 살만큼 세상이 어 려워 보이는 사람은 아니야. 그리고, 이 차장도 내가 바람막이가 된다는데 미쳤다고 파고들리도 없고, 그 사람도 쓸데없이 부지런 떠는 것은 질색인 사람이거든... 따라서, 너를 숨기는 것은 별 문제가 없어." "공작구상을 너같은 쫄다구가 한다고 했는데, 쫄다구가 너하나 냐?" "그건 아니지만, 어느 집단이건 이빨이 딱딱한 놈이 있지 않겠 니?" "그래서, 그 딱따구리 이빨이 너라는 거냐?" "아마 그럴꺼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주원에게, 이건이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의심스러워 했다. "대체 안기부가 뭘 믿고, 고교 내신 삼등급 짜리에게 말빨을 맡겼을까?" 이건이 발끈했다. "야이! 치사한 놈아! 그럼 넌 공부 잘했니? 나 아니면 네가 대 학에 갔을 줄 알아! 이 나쁜 놈아..." 주원이가 그래도 내 말을 챙겨 주었다. "기석이하고 나는 이등급은 되었잖아...헌데, 이건이 너는... 크크크..." "잘들났다. 이등급 나리들..." "미안하다. 이등급이라서... 삼등급짜리 자존심은 좀 챙겨줬어 야 했는데, 내가 속이 좁았다." 잠시 셋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생각을 좀 정리한 내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너같은 쫄다구가 공작구상을 짜낸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 나, 윗대가리로부터 이러 저러한 방향에 대한 요구 사안이 내려 진 상황에서 짜내는 것 아니겠니? 그런 사안에 맞추어, 네가 이 쪽 저쪽 구미에 다 당기게 공작구상을 할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사안에 대해서 그럴 수는 없다. 나는 대한민국 안 기부 요원으로서 녹을 먹는 입장이고, 따라서, 당연히, 우리 쪽 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내가 별 수를 다 쥐어짜도, 저쪽과 우 리쪽이 동시에 좋을 수 밖에 없는 건들도 있다. 그럴 때, 너를 써먹으면 되지 않겠니?" "음 그러냐? 근데, 네가 별 수를 다부려도 우리쪽과 저쪽이 동 시에 좋을 수 밖에 없는 건이라고 판단한 것이, 저쪽 입장에서 보면, 얼마든지 저쪽만 좋은 건이 될 수도 있는 건일수도 있지 않겠니?" "그렇다. 그런 것은 기석이 네가 판단하면 된다. 네가 판단해 서, 양쪽이 다 좋은 것이 어느 한 쪽만 좋은 것보다 낫다고 판단 하면 네가 해주면 된다. 아니라고 판단하면 하지말고..." "그래도 되는거냐?" "그렇다." "주원이도 동의 하는거냐?" "물론이다." 나는 손톱사이에 낀 때를 잠시 바라보면서 목욕이 하고 싶었지 만, 좀 더 참기로 했다. "내 입장을 분명히 해두겠다. 내가 이 땅에 관계된 어떤 일을 이건이 너를 통해서 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나 혼자만의 승락이 다. 만일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아들의 자격으로 서 아버지에게 도움을 구하겠다. 아버지가 도와주면 도움을 받을 것이고, 거절하면 나혼자 하겠다. 그리고, 강조하지만, 나나 아 버지 뿐이다. 내가 속한 회사를 남북문제에 개입시킬 능력은 나 에게 없다. 있다면, 청부 뿐인데, 아버지는 한반도에서 돈에 팔 려서 남북문제에 휩쓸리고 싶어하진 않을 꺼다. 나도 그렇고... 그리고, 아까 이건이 네가 이쪽 저쪽이 다 좋은 건이란 표현을 썼는데, 좋다는 단어의 방향을 묻고 싶다. 어떤게 좋은 거냐?" "좋다란 말에 방향성을 부여해 달라는 뜻인 것 같은데, 사실 그렇게 물어오면 괴롭다. 어떤 일이건, 실무를 담당하는 입장에선 동전의 앞 뒤 면을 똑 같이 고려해서 공정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 하겠지만, 보통 국가적인 사안에 있어서는 동전의 앞 뒤면 정도가 아니라, 사방 팔방의 원리 원칙과 이해관계들이 꼬인 것이 대부분이어서 한가지를 딱 집어내어 이것이 좋은 것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 다. 다른 것들은 다 제쳐놓고, 남북문제만 놓고 언급해 볼때, 대부 분 국민 정서가 통일쪽으로 흐르고 있음이 명백하다. 소련이 민 족 단위로 분해 되는 것과 우리가 통일을 바라는 것이 언뜻보면 상반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구 소련은 여러민족으로 형성 되었던 탓에, 민족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민족단위의 국가로 쪼개지고 싶어 하는 것이고, 우리는 한 민족 두 국가란 대단히 어색한 국가 구조로 서로 적대시 하며 사십년이 넘도록 지내었는 데도, 민족의 테두리 안에서 뭉치고 싶어하는 것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관점에서, 구 소련의 쪼개지고 있는 민족 단위 국가들 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련은 쪼개 지는데, 같은 다민족 국가인 미국이 쪼개지지 않 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 생각으론, 잡종 제일주 의 원칙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쨋건 그 비슷한 이유 로 많이 섞였고, 미국애들은 민족간 갈등보다는 피부색 정도에 문제가 있었을 뿐, 지역간에 대립할 수 있는 따로공간이 만들어 지지 않은 탓에, 민족국가 개념이 빈약해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한 민족 두 국가`와 `한 민족 한 국가`를, 나는 가끔, `한 남 자 두 여자`와, `한 남자 한 여자`로 비유해 보곤 하는데, 만일 어떤 남자가 두 여자를 거느리고 대단히 유연하고 편안하게 두 여인을 행복하게 해주면서 자신도 행복해지는데 성공했다고 해 서, 나는 이러이러한 근거로 이러저러하게 행복해졌으니, `한 남 자 두여자`가, `한 남자 한 여자`보다 우월 하다고 주장한다면, 아마 직싸게 욕을 먹지 않을 수 없을 꺼다. 하지만, 그 남자가, 초반에 무지와 어설픔으로 두 여인에게 실 수를 이미 했고, 두 여인 모두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어서 책임져 야 되는 상황에 이르렀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한 남자 두여인`이었으며, 또 그 상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면, 그 남자 가 두 여인 중에 한 여인을 저버리고 다른 한 여자와 행복을 추 구한 것보다 더 잘못한 것일까? 그리고, 그 남자가 과연 사랑하는 여인 하나를 팽개치고 또 다 른 사랑하는 여인 하나만을 선택했다면, 과연 그 남자는 저버린 여인을 깔끔하게 잊고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남아있는 한 여인에 게 부드럽고 다정했던 `한 남자 두여인` 시절의 사내의 멋을, 품 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한남자 한 여인`은 물론 `한 남자 두 여인`과 비교할 가치도 없이, 보편적인 대중의 추구할 방향임에 분명하다. 아버지와 두 딸이 있는데, 두 딸이 과년해져서 사윗감을 찾고 있던 아버지가 두 딸을 한 남자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겠는가? 하 고 물어보면,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데 주저할 바가 없다. 그러나, 여건을 약간 비틀어서, 어떤 무인도에 아버지와 사랑 하는 딸 둘이 살고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어느날 세 젊은 남자가 그 무인도에 표류해 왔다. 한 남자는 툭 하면 언성을 높이고 고집만 부려서 다른 사람과 싸우기 일쑤고, 또 한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자기 배만 부르면 그만인 이기적인 사내였고, 마지막 젊은이는 사리판단이 뛰어나 고, 감정을 다스릴 줄 알며,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책임감이 강 했다. 이 상황에서 아버지는 똑같이 사랑하는 두 딸 중 누구를 마지 막 젊은이에게 보내야 하고, 또 어떤 딸을 마음에 안드는 사위와 짝찌워 줘야 하겠는가? 요렇게 물어보면 단순하게 대답하기 어려 워 질 꺼다. 우리민족은 체제가 다른 두 개의 국가를 갖고 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불렀 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 노래 모르면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노랫가 사 중에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나가는 사 람 붙잡고 `당신 죽으면 통일이 된다는데, 죽을래?`하고 물어봐 라. 늙은 노부모, 토끼새끼 같은 처자식 어쩌고 하면서 대부분 발을 빼야, 사람이다. 물론 개중에는 죽을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한남자 두 여인`처럼 일반적이지 못 하다. 또 `당신 죽으면 통일이 된다는데, 죽을래?` 이것도 너무 형편 없는 질문이다. 사람하나가 죽어서 통일이 될 수도 없고, 또 통 일이 된다면 어떤 유형의 통일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었 다. 한 가지 남북의 국민 정서 모두가 동의 하는 사실은 있다. 통 일이 된다면 평화통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엔 이론의 여지 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국민들은 평화통일을 바란다. 그런데, 서로다른 체제의 두 국가가 합치는데, 어느 체제를 고 수할 것이냐? 에 대한 질문에는 남과 북이 판이하다는 데에 문제 가 심각하다. 현시점에서, 남쪽 사람에게 사회주의 국가구조로 통일한다고 한다면, 잘살건 못살건 대다수가 미쳤냐고 할 것이고, 북쪽 사람 에게 우리식의 국가구조로 통일하자고 한다면 마찬가지 대답이 나올 것은 뻔하다. 북한 사람들도 남한의 복부인을 안다. 우리식대로 통일이 되 면, 복부인이 한주먹 쥐어주는 돈 덩이에 얼씨구나 하고 전답 다 팔고, 산동네로 산동네로 밀려 올라가야 하는 그네들의 운명을 왜 모르겠는가?" 지루하게 듣던 내가 끼어들었다. "뭐가 그렇게 장황해, 간단히 이야기 해 간단히... 뭐가 좋은 거야?" 이건이가 또 무시당했다고 여겨지는지, 얼굴이 께름찍하게 구 겨졌다. "이 무식한 놈아! 그렇게 설명해도 모르겠니? 두루두루 좋은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란 말야. 이 자식아!" 옆에서 아직도 팔짱을 풀지않은 채 듣고 있던 주원이가 이건을 거들었다. "그래그래.. 이건이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뭐! 할 일도 별로 없는데..." 이건이 다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내 말인 즉슨, 남북문제에 관한 종착역은 결국 평화통일이고, 따라서, 평화통일에 대한 나의 시각을 피력하는 것이지. 어찌 되었건 통일로의 출발은, 현재의 `한남자 두 여자`체제에 서 시작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개성이 판이한 두 여자인데, 두 여자가 한 남자 안에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수하겠다고 으르렁 거린다면, 남자가 너무 괴롭잖아." "그래서?" "다 잘 살자고 하는 짓인데, 서로 양보하고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도록 중간에서 사랑을 심어주는 것이 좋은 일 아니겠 니?" 이건의 달짝지근한 말이 시큰둥하게 와 닿아서 한 마디 쏘아보 았다. "그건 안기부 생각같진 않은데... 허긴 너라도 그렇게 생각하 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이건의 약간 뒤틀린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런...제길... `안기부는 사람 잡아다 두들겨 패기나 하고, 우악스런 우격다짐이나 하고, 빨갱이라면 이를 갈고 물어 뜯으려 는 고집스런 대가리들만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 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안기부에 들어온 요원들은, 너희들 하고 똑같이 고등 학교 대학교를 이 땅에서 다녔고, 유신체제나 군사 정권 시절에 돌 던져본 사람들도 많고, 세상 물정 많이 알고, 사랑하는 처 자 식과 이웃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자식들 공부가 걱정되면 슬그머니 과외도 시키고, 북한하고 일 본하고 축구하면 북한을 응원하는 사람들이고, 길 거리에서 소매 치기 보면 따라가 잡는 척이라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다만, 때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감상적인 표현을, 일반인 처럼 자유자재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대중의 오해를 살 여지는 많 아. 안기부원을 너무 무시하지마. 일반인들이 좋다고 생각하면 안 기부원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가 일반인과 유별나게 분리되어서 욕을 얻어 먹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건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일반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점을 생각하지 못해서가 아 니고,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복잡한 제반 상황들을, 일반인과 달리, 알고 있어서 욕을 먹는 경우도 많아. 물론 그런 상황에서 는, 우린 변명도 할 수 없이 그냥 욕을 먹곤 해." "그렇게 억울하게 욕 먹은 적이 있긴 있니? 매스콤에서 그런 적 있다고 보도된 것은 한 번도 못 보고 못들었는데..." "이 나쁜 놈아! 매스콤이 미쳤니? 안기부 편을 들게... 그랬다 간 시청률이 낮아지고, 발행부수 왕창 떨어지는 걸 몰라서 물 어...글 쓰는 놈이면 당장 어용으로 몰려서 패대기 쳐지겠고... 그래서 안기부는 외로워. 흐으..." "워낙 잘못한 짓이 많으니까 편들어 주지 않는 것이지, 이쁜 짓만 해봐라 왜 편을 안들어 주겠니... 그러니, 앞으로 잘해... 이 땅에서 뭐니뭐니해도 통일로 가는 어려운 산등성이에 터널 을 뚫어줘야 할 곳은 안기부가 아니겠니? 어째, 모처럼 이건이 놈 듣기 좋은 말을 해서 그런지, 혓바닥이 좀 가렵네. 퉤퉤..." 주원이가 팔짱을 풀고 복부를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배가 너무 고프다. 어디가서 밥 좀 먹고 말씨름을 해도 하자." 깜박이는 이 태원의 간판 사이에서 소박한 형광 빛이 켜져있는 곳에서 우리는 T 본 스테이크로 배를 채웠다. 버터를 철판에 바 르고 익혀진 고깃덩이들이 먹음직 스럽게 가위질 쳐지고 입안에 서 씹혀지고 있을 때였다. 스무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섯 명 정도 되는 일단의 청년들이 아가씨 세 명을 데리고 들어와 우리 자리 옆에 빙둘러 앉았다. "그 새끼들 골통을 부셔놓는 건데..." "아이! 그만해. 너도 잘한 것 없잖아." "그래도 그렇지. 그랜져가 가는데, 왜 티코가 앞에서 알짱거리 냔 말이야 내 말은 ... 그래서, 한 대 쥐어박은 것인데, 무슨 똥 차 구겨진 차 값에 삼십만을 달래... 에이 도둑놈 같으니..." "어차피, 날라간 거 그만 잊어버려. 생각하면 분통만 터지잖 아." "아니야, 누나! 그래도 한 방 갈기고 물어 주면, 개 값이거니 하고 속이 좀 편해질 것 같아. 이 새끼들 어디가서 쳐 먹고 있 지? 좀 전에 그 새끼들 들어간데가 어디야?" "요 앞에 맞은 편, 공공팔로 들어가는 것 같은데, 왜?" "아무래도 억울해서 안되겠어. 누나, 나 먹고 가서 시비나 한 번 걸어야지. 이대로는 얌전히 못 놀겠어..." 옆에서 얌전치 않게 떠드는 소리가 코메디처럼 들렸는지, 이건 이 소리내어 웃었다. "큭큭큭..컥.. 컥..." 고기를 씹으며 킥킥거리던 이건이 사래까지 걸렸나 보다. 주원 이 이건의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그러게 멍청한 놈들 떠드는데,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웃니?" 때마침, 분노에 절어있던 옆자리의 얼간이가 그 소리를 들었는 지, 벌떡 일어나서 주원이에게 다가왔다. "형씨! 금방 뭐라고 그랬어?" 주원이 이건의 등에서 손을 떼고 돌아서서 타일렀다. "주둥아리질 그만하고, 앉아서 고기먹고 가." 주원이가 다독거린 말씨가 청년을 달래주지 못했는지, 얼간이 의 오른손이 주원의 안면을 향해서 날아들었다. 날아든 청년의 주먹을 슬쩍 제낀 주원이 오른손으로 청년의 비 껴진 오른쪽 팔굼치의 옷깃을 슬쩍 잡아채며, 왼 발로 얼간이의 오른 쪽 발목을 가볍게 비껴쳤다. 중심이 무너지고 있는 얼간이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새어 나 왔다. "앗!" "쿠당탕!" 바닥에 쓰러진 채로 주원을 멀거니 올려다 보는 청년에게 주원 이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모두걸이`라는 거야. 얼른 고기 구어 먹고 공공팔에 가서 써 먹어. 알아 들었지?" "네에! 넷..." 떠듬거리며 대답하며 일어난 얼간이가 다시 자리에 앉고 우리 는 소주 두 병을 시켰다. 옆 자리에서는 고기 씹는 소리 정도 외에는 더 이상 잡음이 들 려오지 않았다. 소주잔이 서 너잔 기울었다고 여겨질 즈음, 옆 자리에서 아가 씨 하나가 맥주병을 들고 주원에게 눈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제 동생이 죄송하다고 드시래요." 주원은 사양을 했지만, 이건이 받아 챙기면서 잔까지 요구했 다. "어! 뭘 이런 걸! 근데 잔이 없네..." 잔까지 받쳐 들고와 주원의 옆자리에 앉은 얼간이의 누나는, 반달같은 이마를 스프레이 뿌려진 앞 머리로 새초롬하게 가리고, 눈썹이 몽땅빠진 눈자위에 가느스름하게 그려 놓은 눈썹에 신세 대 아가씨의 야한 멋을 담아 놓은 아가씨였다. "어! 이러면 내가 저쪽 친구들한테 너무 미안하잖아요." "괜찮아요. 제 동생 생일인데, 하도 사고뭉치라서 제가 따라 나왔어요. 그런데도 또 말썽을 피워서... 전 정미이라고 해요. 안 정미..." "난 주원이라고 해. 이렇게 대책없이 여자를 만나보기는 처음 이야. 한 잔 할래?" 어느새 존대말을 떼어내버린 주원이, 자신이 비운 빈잔에 서슴 없이 한 잔을 채워 주었다. 서 너 모금 꼴깍인 아가씨가 입가의 거품을 자주빛 루즈가 지 워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닦으며 말했다. "근데, 어쩌면 그렇게 싸움을 잘 하세요?" "큭큭큭!" "크크..." 이건과 내가 고개를 수그리며 웃고있는 동안 주원이 쑥스러운 지, 우리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잘하긴, 슬쩍 잡아당기면서 툭 치면 넘어가게 돼 있는거야. 아주 쉬워..." "그럼 저도 배울 수 있나요?" 주원이 뜨악한 목소리로 떨떠름 하게 얼버무리고 있었다. "으으응! 뭐! 배울수야 있겠지... 잘 써먹을 수 있을지는 보장 못하겠지만..." "아뭏튼 만나서 반가와요." 잔을 마저 비운 정미가 자리로 돌아갔다. 정미가 보내준 맥주가 바닥이 났을 즈음, 옆 좌석의 얼간이 떼 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고 있었다. 주섬주섬 일어나고 있는 무 리들 사이에서, 핸드백 끈을 짧게 접어 어깨에 메고 있는 정미의 모습도 들어왔다. 요즘 유행하는 자세를 갖추고 정미가 다가왔 다. 겨드랑이 사이에 짧막하게 메어진 핸드백 안에서 메모지를 꺼내며 그녀가 말했다. "펜 있나요? 주원씨?" "윽! 펜은 왜?" "제 전화번호 하고 삐삐번호 적어드릴려구요? 싫으세요?" "아니. 이건아 빨리 꺼내..." 이건이 꺼내기 전에 내가 먼저 건네 주었다. "고마와요. 아무때나 거셔도 좋은데 누군지는 꼭 밝히세요 알 겠죠?" 주원에게 메모지를 건네 주고 옆 좌석의 청년들과 식당을 나서 는 정미의 시원한 뒷 모습에서 샤넬 향기 19번이 느껴지고 있었 다. 안가의 갈색 가죽 소파에 다시 돌아와 앉은 우리 셋은, 허연 연기로 허공을 메우며, 주원에게 연락처를 주고간 정미가 뿌려 놓은 향수에 잠시 입맛을 다셨다. 포장된 비프 저키(BEEF JERKY:쇠고기 말린 육포) 세 봉지를 안 주 삼아, 담배로 깔깔해진 목을 캔 맥주로 적시며 우리는 농찌거 리를 마무리 했고, 이제 떨떠름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담배꽁초 수북한 재떨이와 캔 맥주, 그리고 수입딱지 붙은 비 프 저키가 우리들의 자세를 연하게 만들어 주고 널부러져 있었지 만, 우린 테이블 분위기와는 판이한 새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본 론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까, 이건이 너가 달콤하게 언급하길, 서로 너그럽게 양보할 수 있도록 사랑을 심는다고 했는데,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 론을 듣고 싶다. 그냥 말로나 끝날 구름잡는 이야기라면, 통일에 는 끌어다 부치지 말고, 여자 꼬실때나 써 먹든지 해라." 이건은 소파의 등받이에 파묻혀 있던 등을 빼내었다. 그리곤 물고 있던 88담배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진지하게 말문 을 열었다. "너희들도 알지 모르겠지만, 88서울 올림픽이 건진 수확 중에 안기부 입장에서 가장 컸던 것은, 러시아와 중국에 살고 있던 우 리 교포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서울 올림픽에서 치러진 경기를 보았고, 더불어 올림픽이 유치된 서울이 어떤 도시쯤 되는가도 화면을 통해서 어느만큼 알게 되었다. 통일작업은, 보통, 정치적, 경제적, 심리적 통일 작업으로 분 류되어지는데, 이중 통일의 시작과 마무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심리적 통일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중국 교포들이 우리나라를 왕래하고, 북한을 오가며, 북 한 사람은 중국 연변을 출입하고 있다. 러시아의 원동지역에 거 주하는 교포 역시 우리나라와 북한을 동시에 오가고 있고, 북한 사람 역시 원동을 다녀가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누구를 통해서, 남한 사람이 부유하기 도 하지만, 착한 사람들이란 것을 북한 동포에게 알려야 할 지는 명백하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중국이나 러시아에, 없어도 있는 체를 해 야할 때가 있어야 했고, 그래서 가끔 쥐뿔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있는체 했다고 세금 낸 사람들에게 욕도 먹어야 했다. 못한다고 계속 욕만 먹는 아이보다는 가끔씩 칭찬도 들을 때가 있는 아이들이 공부도 더 잘한다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고맙겠 다. 제길... 우리가 동정을 표시하는 러시아 벌목공 탈출자나 중국을 통해 탈출해 오는 북한 사람들이, 발각되면 총살을 당하는 상황을 무 릅쓰고 어째서 넘어온다고 생각하나? 그들이 살기 어렵고 죄를 지어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 이겠지 만, 도피처로 남한을 생각하고 건너오는 것은, 누가 뭐래도 베를 린 장벽을 뛰어넘은 동독사람들과 다를 것이 거의 없다. 내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남한이 북한보다 잘사 니, 북한 동포여 넘어오란 식의 유치한 심리적 통일 작업을 언급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심리적 통일 작업이란, 우리 남한 사람들이 북한동포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북한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데 그 목표를 두고있다. 우리 체제대로 북한을 흡 수하기 위한 간교한 수법으로서의 심리적 작업이 아니고, 오랫동 안 멀리 떨어져 호흡을 같이 할 수 없어 애가 타는, 그래서 더욱 보고 싶고 자유로이 만나 더불어 살고 싶어하는, 민족애를 북한 동포들에게 심어주고자 하는 것이 안기부의 심리적 통일 작업이 추구하고 있는 본질이다." 이건이의 진심어린 음성이 께름찍하게 들려왔다. 사탕발림에 조예가 깊었던 이건이를 되새겨 보며, 어설프게 넘어가는 풋나기 아가씨와는 분명히 구별을 둘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런 소리는 남쪽 사람들도 믿기 어려울텐데, 북쪽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냐?" 비아냥 거리는 내 목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이건이가 여전히 진지하게 이어갔다. "지금 당장, 북쪽 사람들에게 안기부가 이렇게 착하게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을 믿게 할 자신은 물론 없다. 그래서, 우리 안기 부는 우리 남한 사람들부터, 우리의 이런 진실한 의도를 믿게 하 고자 한다. 남쪽 사람들이 믿어주면 북쪽 사람들 중에서도 믿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고, 북쪽 사람들도, 남한의 악질적인 안기부 가 북쪽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노심초사한다는 것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북쪽 사람들이 남쪽을 바라보는 시각에 많은 차이가 생 길꺼다. 여기서 북쪽 사람들이란 북쪽의 핵심 지도층까지 포함해 서다. 아니, 포함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런 계층에게 우리 는 우리의 의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건의 황당한 소리를 듣고 있자니,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국민학교 바른 생활 책에서나 어울릴 내용 가지고 나에게 떠들 정도로, 이건이 한심한 녀석은 아니었다. 너무 가당치 않아서 오히려 오락가락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건의 말에는 허술한 구석이 충분히 있었으므로, 그런 점을 집어내기로 했다. "말인 즉슨 듣기에 좋은데, 북쪽 사람, 더구나, 핵심 지도 계 층에게 안기부가 북쪽사람들을 위해서도 일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게 하려구? 아니, 그보다 우선, 도대체 그런 황당한 구상을 안기부가 했긴 했니? 아니면 그냥 너 생각이니?" 찝찝해 하는 내모습을, 이건 자신도 이해하는 듯 했다. 고개를 펴고 주원을 쳐다보는 이건의 눈빛에는 도움을 구하고 있는 듯 했다. 주원이 이건의 요청을 알아들었는지 입을 열고 있었다. "이건의 말이 어이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일 꺼다. 약 석달 전 쯤, 안기부장과 제 2특보 그리고 2차장을 축으로 해서 중대사안을 다루는 1급 비상 회의가 소집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대공수사국과 해외정보국의 장들과, 그리고 이례적으로 국방보좌 관과 군정보분석 담당과장까지 참여한 회의였는데..." 주원의 말허리를 자르며 나는 궁금증 한가지를 표시했다. "국방 보좌관이라면?" 주원의 설명이 곧바로 이어졌다 "안기부의 국방보좌관실은 84년 8월 중국 해군 항공대의 경폭 격기가 전북 이리에 불시착한 사건을 계기로 설치되어진 것인데, 당시, 중국 군용기의 귀순으로 우리 방공체계의 허술과 각 군과 정보기관 사이의 공조체제가 전무한 상태라는 문제점이 지적 되 어서였다. 그래서, 군에서 안기부에 준장급으로 연락관을 두겠다하여 안 기부내에 국방보좌관직이 생겼다." 다시 주원의 말에 끼어들었다. "거기까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인데, 군정보분석 담당과장 이라고 했는데, 국방보좌관실에 그런 과도 있나? 내가 알고 있기 론 군에 관계된 것으론 군사과 정도로 알고 있는데, 군정보분석 과라니?" "지난 3월 신설된 안기부내의 군정보관련 부서다. 현재는 준장 급도 아닌 이 한수 육군소장이 국방보좌관실을 맡고있다." "안기부내의 정치, 경제, 언론 등 주요분야에 대한 담당부서가 모두 1개과로 편제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군 문제 전담에 2개 과라면, 거의 국에 가까운 것이네. 그 쪽에다 신경 많이 쓰네... 그건 그렇고, 아뭏튼 그런 안기부 고위층들이 모여서 무슨 논 의를 어떻게 했길래, 이건이에게 말도 안되는 사안이 떨어졌나?" 주원 대신 이건에게 고개를 돌려 궁금증을 표시하자, 이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키를 두어번 돌리는 것으로 보 아 이중 잠금 처리가 된 서랍에서 노트 한 권을 들고 왔다. "현 시점에서 대한민국 내의 가장 큰 기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꺼다." 말과 함께 들이미는 노트를 받아들고 중얼거렸다. "그런 대단한 것이, 이런 허술한 곳에서 너 정도의 쫄따구에 의해서 보관되고 있니?" 이건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펴 보면 안다." 푸른 색 표지를 한 장 넘겨보니, 검은 글씨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한반도의 21세기를 대비한 국제 전략 기획안- 글씨는 손으로 씌여져 있었고, 또 한 장을 넘겨보니, 확실하게 이건의 글씨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트 안의 내용은 모두 손으로 쓰여진 것이었다. "네가 쓴 것이 분명하네. 너 혼자서 이런 걸 남길 수는 없을텐 데..." 이건이 말했다. "물론이다. 난 단지 이 일에 관여한 한 명의 실무자일 뿐이다. 우리 팀은, 판단국에 수집된 국내외의 정보자료와, 각종 연구소 의 많은 자료들을 육개월이상 분석해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구상을 윗 대가리에게 올렸고, 그것이 꼭대기까지 올라가 무언의 승락을 얻었던 것 같다. 그 후, 비상소집 회의가 열렸던 것이지. 주원이가 언급한 그 회의에 난 실제 입안자로서의 자격으로 브리 핑을 했고, 그곳에서 몇 가지 지적을 받았었다. 지적받은 것들에 관한 검토를 지난 달에 끝냈고 결재까지 끝난 최종기획안이다." 약 삼십 페이지에 달하는 이건의 기획안을 꼼꼼하게 들여다 보 았다. 남, 북 관계에서 출발한 기획안은 통일 전략의 범위를 넘어서 는 것으로, 향후, 지구촌 역학의 정립구도를 그려놓고 줄거리를 짜맞춘 것으로 전반부를 채웠고, 후반부는 뭉퉁그려 놓은 정립구 도를 대비하기 위한 너 댓가지의 시나리오로, 지금의 현실상황에 서 유추해낼 수 있는 공작구상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노트를 덮으며 나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흐유! 이 줄거리대로 소설을 쓰면 책이 얼마나 팔릴까? 한 번 써 보지 그러니?" 옆에서 주원이가 대신 받았다. "아서라. 이건이 공중분해 된다." "허긴, 이대로 그냥 썼다간 도망가도 숨을 데가 없겠다. 오대 양 육대주에서 다 잡아잡수실려고 할텐데... 도대체, 이 기획안에 대해 몇 사람이나 알고 있니?" 이건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 기획안을 준비하는 과정에 참여한 국내외 연구소나 연구원 들은 셀 수 없이 많겠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우리팀이 요구한 정 보 자료와 참고자료를 준비해준 정도이고, 그들의 자료가 안기부 에서 쓰여진 것조차 모른다. 결국, 이 기획안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회의에 참여한 여덟 명과 너희 둘 정도가 있겠다. 그리고, 이 기획안을 짜맞춘 우리 팀 다섯 명이 전부다. 대통령에게 보고 형식으로 올릴 수도 없는 성질 이어서 공식적으론 대통령도 모르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 만, 후반부에 언급해 놓은 시나리오의 배경들 중, 어느 하나라도 현실 상황에서 깔리게 되면, 꼭대기 역시 시나리오 속의 한 캐릭 터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을, 이 기획안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건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너희 팀이라고 표현한 입안자들의 신분은 확실하니? 또 이런 입안이 기껏해서 너 같은 쫄따구 레벧에서 결판지어 지는 것을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는데?" "나를 포함한 우리 팀 여섯은, 삼십대 둘 사십대 둘 오십대 둘 로 구성되어져 있다. 그 여섯명은 국내파 셋 해외파 셋으로 분류 되어질 수도 있으며, 현장 정보 업무와 사기공작 부문에 있어 안 기부가 꼽아준 요원 둘과, 군사관계 전문가 둘, 글고 두 분야의 지독한 먹물 둘로도 나뉘어 질 수 있다. 우리나라 정보기관 사상 이렇게 완벽한 팀은 없었다고 말해줄 사람은 없지만, 이 기획안에 관련된 사람은 그렇게 알고 있을꺼 다. 어차피 이런 기획안은 소수에 의해 만들어 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 팀은 숫자를 카버할 수 있는 충분한 조화를 이루었 다고 생각한다. 뒷 탈이 있을 만한 사람은 기획안의 국제 역학 구도에 애쓴 먹 물 둘 정도인데, 그들은 후반부의 사기 공작 시나리오에 대해서 는 아는 바가 없고, 이 기획안을 그저 하나의 참고자료 정도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들 자신이 안기부의 방향을 잡아주는 데 커 다란 역할을 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을꺼다. 물론, 그렇게 알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 또한 입을 열어서는 안된다는 사실 쯤은 분명하게 알만한 사람들이고 주지시켜 놓았다." "그렇다 치고, 뒤쪽의 사기공작에 날 가져다 써 먹을 모양인 것 같은데 사기 수법이 나하고 맞지 않는 부분에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건 전적으로 너에 의해 수정 가능하다. 아직 안기부 내에는 프린세스 낙랑의 고명한 수법을 따라잡을 만한 인재는 없을 테니 까..." "그럼그럼..." 말을 얼버무리던 이건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내 태도에 밸이 뒤틀렸는지, 뒷 말을 씨부렁거리고 있었다. "내 참 드러워서..." 역시 한국말은 뒷 말이 중요하다고 느끼며, 이건의 칭찬을 무 시 하기로 했다. "상황이 괴로워져서, 총잡이들까지 요구 되어진다면, 어디 애 들을 준비해 놓을 수 있나?" 이건이 고개를 들어 잠시 염두를 굴리는 듯하다 대답했다. "다 쓸 수 있겠지만, 따로 준비 시켜야 할 상황이 온다면, 우 리로서 가장 편한 것은 서울 경찰청 특공대일 꺼다." "거긴 안된다." "어째서? 모두 군 특수부대 출신들이고, 훈련도 받을만큼 받았 다고 하더구만..." "거긴 델타포스하고 교류해서, 재수없으면 내가 들통나는 수가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안돼." 이건이 물었다. "그럼 어디를?" 한 군데 떠오르는 곳이 있어서 대답했다. "707을 쓸 수 있니?" "육군 특전사 707대대 말하는 거야?" "응. 거기가 정성이 제일 많이 들어갔고 셋 업이 가장 잘 되었 다던데..." "노른 자위는 기가막히게 집어내는구만... 알았다. 준비할 상 황이 도래하면 거길 엮어보지." 거침없이 대답하는 이건에게서 주원에게로 눈을 돌리며 말했 다. "근데, 정보사는 왜 개입된거니?" 주원이 자신의 새로운 변화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했다. "정보사가 개입된 것이 아니라, 내가 개입된 거다. 지난 삼월 정보분석 담당과가 신설되어 지면서, 나를 포함한 정보사 요원 네 명이 안기부 내의 군정보분석 담당과로 전출되었다. 아마도 이건이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 같다." 이건이 엄살을 떨었다. "어어! 나 그런 힘 없다. 그건 우연이야. 우연..." 워낙 뻔뻔스런 놈이라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하고, 대신, 나 는 요구할 것을 요구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별로 기대는 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 너 힘 없는 건 알아. 우연이라고 하고, 제일 중요한 것 이 빠졌는데, 월급은 얼마나 챙겨줄껀데?" 이건이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반문했다. "너한테 월급도 줘야해?" "이런! 그럼 무보수로 해달라는 거니?" "물론이지. 네 자자손손을 위해서 당연히 할 짓을 하라는 것인 데, 월급 줄꺼면 미쳤다고, 내가 너 비위 맞추면서 해달라고 했 겠어? 그냥 하라는거야. 그냥... 더군다나, 상황이 아다리가 될 지 안 될지도 아직 모르는데, 월급을 왜 벌써 줘? 천천히, 인간사 추이를 지켜보다가, 만약 일이 벌어진다 싶어 지면, 그 때는 반창고 값 정도 보태줄 수 있겠지. 그러니, 잠자 코 기다리고 있어. 국민들 피같은 세금 함부로 쓸 수 있겠어..." "기다려도 네 시나리오 들어맞는 상황이 안 터지면 어쩌니?" "그럼 오늘 일은 그냥 잊어 버리면 되는 것이겠지만, 아마 빗 나가는 일은 없을꺼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서 세금 관리에 알뜰한 척 하는 공무원과 전직 정보사 요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래. 두고 보겠다. 안 볼 동안 잘먹고 잘살게나... 주원인 미정이하고 잘 해보고, 궁둥이가 예쁘게 생겼던데..." 문으로 걸어 나가는 동안 주원의 군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뒤통 수를 건드리고 있었다. "이쁜 궁뎅이지, 치마속에 빵꾸난 흉터만 없으면..." `end` `end` (6) 과외선생과 제자들... 관세청 맞은 편에 낮게 가라앉아 있는 동현 아파트 3동 앞에 에스페로를 주차시켰다. 육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눈에 익숙한 십자가가 문에 붙어 있었다. "딩동! 딩동!" "누구세요?" 성일이었다. 지금부터 두 시간 동안은 난 성일이의 수학 과외 선생이겠다. 나는 긴 책상의 왼 편에 앉아 성일이가 표시한 문제들을 하나 하나 풀어주기 시작했다. 풀이법이 금방 생각이 나지 않는 것도 보통 두어 개 정도 표시되어 있곤 한다. 그럴때면, 난 즉시 해답 집을 펴라고 하고, 성일이 대신 답을 보고 빨리 풀어준다. 물론 곰곰히 생각해 보면 풀 수 있는 것들이겠지만, 제한된 시 간에 질문이 많은 편인 성일이에게 표시한 문제들을 다 풀어주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쓴다. 또 한가지 이유는, 보통 두 시간 가르 치는 동안, 질문과 진도 나갈 만큼의 설명을 한 시간 안에 다 설 명해 주고, 나만의 사고의 시간을 빨리 갖고 싶은 때문이기도 하 다. 보통 한 시간 가량 지속되는 설명을 끝내고 나면, 내가 풀어준 모든 문제를 학생으로 하여금 다시 풀게 시킨다. 성일이의 경우 보통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다시 풀어 놓곤 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성일이의 풀이과정을 지켜 보았다. 성일이가 마지막 문제의 마무리를 할 즈음, 문득 어린 고교생 과 수학과는 관계없는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남한이 좋은 나라니? 북한이 좋은 나라니?" 마지막 문제에서 볼펜을 돌리고 있던 성일이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우리나라라고 대답해야죠. 근데, 그런 질문은 좀 유치하지 않나요?" 다시 물었다. "내 질문이 유치했니?" "그럼요. 요즘은 국민학생도 그런 질문 유치하다고 생각할 껄 요. 저를 어찌 보시고..." "근데 왜 유치하니?" "하나마나한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은 유치한 거잖아요." "똑똑하다.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니? 아니면 이대로가 좋겠 니?" "통일은 우리민족이라면 누구나 염원하는 것이니, 되야죠." "우리민족 이라면 누구나 염원하는 통일이라고 했는데, 네가 통일을 그렇게 염원하는 이유는 뭐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일이 성의껏 대답했다. "우선 통일이 되면, 같은 민족끼리 헐뜯고 싸우는 추한 모습이 없어질 테고, 경제적으로도, 북한의 자원과 노동력 그리고 남한 의 자본과 기술이 결합되면 더욱 잘 살 수 있을 것이고, 정치,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남 북한 온 민족이 한데 뭉쳐서 강대국으 로 뻗어나갈 수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꼴 보기 싫은 일본 애들 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고 두려워 할 것이고... 좋잖아요." "통일이 되면 잘 살아서 좋고, 강대국이 되어서 좋고, 그리되 면 일본 애들 겁줄 수 있어서 좋고... 그거니? 통일이 되면 좋은 이유가?" "뭐! 대충 그렇잖아요." "잘 살아서 좋고, 강대국이 되어서 좋고, 거기까지는 수긍이 가는데, 일본 애들 겁 줘서 좋을 건 뭐니?" "일본 놈들은 툭 하면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우리 조상님들을 괴롭혔잖아요. 그리고,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이 강제 징용해서 끌어간 우리 동포들에게 지문날인 따위나 시키고, 심심하면 장관 타이틀 단 새끼가 나와서 주절거리는 것이, 대동아 전쟁은 침략 이 아니었다는 둥, 독도는 지네 꺼라는 둥, 얄미운 소리나 내밸 고, 그 새끼들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 때가 많잖아요. 그게 다 우 리를 얕보고 하는 수작인데, 우리가 강대국이 되면 그 놈들이 그 렇게 까불겠어요?" "그래. 우리 현실에서 일본을 용서할 수는 없지."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뭘?" "방금 일본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우리 현실에선 그렇다고 그랬지. 하지만, 내 말은 네가 생각 하고 있는 것 하고는 약간 다를 지도 몰라." "어떻게요?" "일본만 우리나라를 침략하진 않았잖아. 몽고도 우리나라를 침 략했고, 풍습까지 그네들 것을 강요하기도 했으며, 처녀들을 공 물로 요구했어. 일본 정벌을 위해, 우리군사까지 끌어들인 적도 있었고... 하지만, 우리나라를 침략했다고 해서 몽고리안들을 욕하고 있 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현재는 거의 없다. 용서한 것이지. 이유야 많겠지만, 가장 또렷한 이유는 몽골은 현재 약소국이거 든. 그래서 용서 한거야. 우리나라에 위협도 안되니까, 경계할 필요도 없어 졌고... 그에 비해, 일본은 세계에서 꼽아주는 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 고, 우리가 용서하기에는 너무 부자가 되어버렸지. 약자의 용서 는 용서라기 보다는 비굴로 보여지기 십상이라, 우린 함부로 일 본을 용서 할 수도 없는 입장이란 것이지. 강자만이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강자의 용서가 아니라면, 용서 답지 못해 보이거든. 그리고, 일본은 아직도 우리에게 위협적인 존재야. 그 래서,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잠자코 듣고 있던 성일이가 끼어들었다. "일본 애들이 부자지만, 군사력은 별로 잖아요. 자위대 20몇 만 정도 밖에 없다던데... 물론 돈이 많으니, 무기는 좋겠지만." "그래 개네들 자위대는 숫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적어. 하지만, 일본 자위대의 80퍼센트가 장교야. 직업 군인이라는 이야기지. 전시에 일반 사병은 얼마든지 모집이 가능한 것이지만, 장교는 그렇지 않거든.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일본은 숫적으로나, 질적 으로나, 우리에게 군사력이 떨어지지는 않아. 이 구석 저 구석을 더듬어 봐도, 우리가 일본 애들보다 강력하 다고 여겨지는 것을 찾아 보기가 어려우니까, 일본 애들이 더욱 괘씸해지고 용서하기 어려워 지는 것이지? 안 그러니?" "그것도 그렇지만, 그놈들 하는 짓들이 괘씸한 짓꺼리들이 많 잖아요." "그래 그래. 네 말이 옳아. 그래서 우리 아저씨들은 일본을 용 서하지 못 할지도 몰라. 하지만, 너는 일본을 반드시 용서해야 해. 상대가 못 된 놈일수록 용서의 가치는 그만큼 보태지는 거니 까, 지금 자라나는 너는, 마음을 항상 넓게 갖고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어. 반드시, 일본 정도는 거뜬히 용서할 수 있는 떳떳한 강자로 만들어 줄테니까... 그런데, 너한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뭔데요?" "남쪽이든 북쪽이든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통일을 원한다 면, 그렇게 된다. 따라서 우리도 통일이 될꺼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시점인데... 우리가 서두르면, 당장 통일이 가능한 시점에 와 있다고 가정 하서 생각해 보자. 만일, 단일 국가로 통일된 상태에서 보다 한 민족 두 국가의 상태 하에서, 남,북 모두가, 훨씬 빨리 잘 살고 강력해질 수 있 는 길이 있다면, 너는 어느 쪽을 원하겠니? 당장 통일이니? 아니면,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 남 북의 은밀한 합의하에서, 통일을 수단으로써 이용할 때까지 이용하고 통일을 하는 것이 낫 겠니?" "글쎄요? 그렇게 물어보니깐 잘 모르겠어요. 제 생각으론, 그 럴수만 있다면, 후자쪽이 나은 것 같은데, 제가 아직 머리가 여 물지 않아서 좀 자신이 없네요..." 말끝을 흐리는 성일을 지켜보며, 위로를 해 주었다. "네 머리가 여물어도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일꺼야. 나도 마찬 가지니까..." 이건이 보여준 기획안의 내용에 골몰하면서, 기회가 있을 적마 다,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생각을 엿보곤 했다. 그러나, 어떤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기획안의 후반부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내가 어떤 결론에 도달해 있든지, 나는 그 일을 수행하게 될 것 같다. 이건이 믿음직한 친구여서도 아니고, 민족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이 치밀어서도 아닐 것이다. 물론 돈 때문일 리도 없다. 우스운 것은, 어째서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민족이 개입된 일에 한 번 끼어들어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하 고, 그동안 갈고 닦은 전사의 기량을 나라 안의 몇몇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인 것 같기도 하고, 이건의 시나리오의 마무리가 이건의 계산대로 결말 지어질지 궁금해서일 것 같기도 하고, 어 린 고교생의 마음처럼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은 민족이기주의가 삐져나와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에 이유를 끌어다 붙이려는 것은 언제부 터인가 내 몸에 배인 습관 중의 하나였지만, 꼭 집어서 `이거 다.`에 도달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건의 제안에 순순히 응한 것도, 이번 일에는 그럴 듯한 이유를 매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르겠 다. 하지만 이번일도 `혹시` 정도에 그치고, `역시`로 이어지게 될 것 같은 느낌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애착이 없고 동기 유발이 없다는 것은, 다른 직종에는 어떨런 지 몰라도, 전사란 직종에는 나쁜 것으로 평가 받지는 않는 것들 이다. 어쨋거나, 타민족들과 우리민족 사이에서 벌어질 아귀다툼의 현장속에서, 내가 어떤 일을 수행하건, 현재의 내 마음속의 자리 매김은 장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장난의 범주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고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 서글픔 같은 것이 배어오 는 느낌이, 또 다시 허무의 쓴맛을 보태주고 있는 듯 했다. 가로수에는 잎이 남아 있지 않았고, 바닥의 낙엽도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바람만 휑하니 부는 겨울의 문턱에서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 끝났고, 원서접수 마감을 한 주일 앞 둔 일요일이었 다. 오늘은 대입시를 치른 세 제자의 집을 돌기 위해 일찍 집을 나 섰다. 일찍 이라야, 남들에겐 점심 시간 정도였겠지만, 어쨋든 오랜만에 차가운 햇살이나마 몸에 쪼여볼 수 있었다. 올빼미가 되어 밤길에만 쏘다니다 보니, 햇살을 구경할 기회가 별로 없었 다. 차 창을 통해 들어오는 얄팍한 햇살이 반가왔다. 첫 번째 집은 신 현대 아파트였다. 균오네 집이었다. 거실 벽에 붙은 소파에서 균오의 아버지가 앉은채로 인사를 했 다. "어서 오세요. 좀 앉으시죠." 이천 오백만원을 들여 구조 변경되어진 거실이었다. 베란다를 몽땅 밀어 붙이고 베란다의 난간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색유리를 끼운 탓에 한강의 풍경이 그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맞은 편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이미 놓여진, 신문지 만한 대학별 예상점수 기준표를 들여다 보았다. 방에 있던 균오가 불려 나왔고, 균오의 어머니도 테이블 옆에 붙어 앉았다. "균오가 갈만한 데가 있겠어요?" 까무잡잡한 얼굴에 퉁명스런 균오의 아버지 목소리에는, 기대 에 훨씬 못 믿친 아들의 대수능 점수에 대한 힐책도 낮게 깔려 있는 듯했다. 균오의 아버지는, 일류 대학의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건설 현 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현장 소장을 거치고 현재는 H건설의 이사 로 있는 사람이었다. 괄괄한 목소리와 퉁명스런 기질의 반쯤은 현장 노가다의 씩씩 함이 배인 탓이기도 한 것 같았다. "인(IN) 서울은 어렵겠는데요." 대답과 동시에 나는 대학별 예상점수 기준표를 뒤집었다. 뒷 면은 지방대였다. 지방의 K대와 C대를 짚었다. "여기나 이 정도가 어떻세요?" 아버지의 시큰둥한 눈초리가 옆에 앉아 있는 균오를 어렵게 하 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 나와서 뭘 할려구... 거기 말고 딴데는 없수?" "대충 요칸에서 고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말과 함께 나는 가로로 길게 줄을 그었다. 6등급에 115 점 라 인이었다. "이만해도 보통은 되는 겁니다." 내 말이 얄밉게 균오의 아버지에게 파고들었는지, 대꾸가 없었 다. 옆에 앉아 있던 균오의 어머니가 물었다. "과는 어떤 과가 좋을까요?" "과도 별 수 없이 이 칸 정도에서 골라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떤 과가 균오에게 맞을 것 같나요? 선생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과외선생입장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균오의 합격에 전력을 다하시라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 균오가 가장 붙을 확률이 높다고 여겨지는 방법 은, 우선 몇 군데 대학만 선택해 놓으시고, 마지막 날 아침에 경 쟁율을 알아보시고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옆에서 균오의 아버지가 칭얼거렸다. "마지막날까지 눈치를 보라는건데, 사내 녀석에게는 소신을 심 어줘야 해요. 균오 너는 재수 하더라도, 지방이나 분교는 쓰지 마라." 어머니는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과는요?" "마지막 날 아침에 대학을 결정하시고, 고등학교에 가셔서 균 오의 담임선생님에게 과를 쓰는 난을 비워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대학에 가셔서 오후 세 시나 네시에 발표된 각 학과의 경쟁율을 보세요. 다섯시나 여섯 시에도 발표가 있지만, 그건 보 실 필요 없어요. 세 시나 네 시 것이 가장 정확해요. 거기서 경 쟁율이 높으면, 그 해의 그 학과는 커트라인이 거의 예외없이 높 아져요. 다섯시나 여섯 시는 눈치보면서 모여든 경쟁율이라서 부 정확하니까,그걸 참고 하시면 안돼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마지막 날 세 시나 네시의 학과 경쟁율이 낮은 곳으로 써 넣으세요. 물론 경쟁률만 보시고 넣으시라는 것은 아니고, 여기 대학별 점수 기준표 상에서 균오의 점수대에 맞을 만한 곳의 한 칸 위 정도와 한 칸 아래 정도의 범위에서 경쟁율이 낮은 학과를 고르 셔야 해요. 그러면 붙을 가능성이 확실히 높아져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균오의 합격을 바라는 과외선생의 입 장에서 입니다. 그리고, 잘 하는 학생이나 못 하는 학생이나 구분할 것 없이, 대입시 때마다 불안해 하시는 학부모님들을 뵐 때면, 이런 설명 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저 자신도 괴롭습니다. 좀 더 잘 가르치지 못한 부끄러움도 있고, 마지막 날 눈치 보 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어쩐지 찝찝하기만 하게 느껴 지거든요. 그러나, 아이들의 일년 고생을 지켜 본 저로서는, 조금이라도 붙을 확률이 높은 곳으로 제가 가르친 아이들을 인도할 수 밖에 없읍니다. 물론 학생들 중에, 실력에 비해서 형편없이 점수가 나왔거나, 유난히 성실해서 재수한다면, 충분한 성취를 기대해 볼 수 있는 자질있는 아이들에게는 눈치 작전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네 소신껏 지원해 보라는 말 따위도 하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고교생 몇몇을 제외해 놓고, 대부분의 고교생들은 그들이 미래에 대해 대단히 무식합니다. 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고, 되기 만 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평범한 고삼들이 대부분 이지요. 혹자는 그런 학생들에게 소신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 선 생이 할 일이 아니냐고 따질 지 모르겠읍니다만, 그 많은 학생들 에게 누구의 소신을 넣어 주라는 말씀인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읍니다. 선생 한 사람의 소신을 모든 학생에게 똑같이 닮으 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또, 어쩌다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소신이란 것이 자리 잡힌 특 별한 고삼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소신에 걸맞는 길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도 못 합니다. 어떤 고삼생이 `난 신문기자가 되고 싶은데, 그래서 꼭 신문학 과를 가려합니다. 그런데, 저 엉터리 대학 입시 기준표에 신문학 과가 커트라인이 너무 높아서 저는 재수를 해서라도 신문학과 아 니면 안가겠습니다. 그게 제 소신입니다.` 이렇고 있을 때, `그 래 네 소신껏 모자른 점수 가지고 거기다 한 번 우겨넣어 봐라.` 이렇시겠읍니까? 대부분의 고 삼생의 소신이란 것은, 무식하기 짝이 없읍니다. 신문기자는 신문학과 출신이어야 하는 겁니까?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학과 출신이어야 합니까? 판 검사는 법대 출신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까? 대통령은 대통령학과를 나와야 합니까? 아마, 의 사 하나 정도가 의대를 나오지 않으면, 되기 어려운 코스일 것입 니다. 그 외에 나머지는, 거의 예외없이,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를 들어갔던, 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만 있다면, 어떤 길이던 똑바 로 걸어갈 수 있을 겁니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 세상을 좀 더 체 험하고 소신을 비로서 세운 후, 소신에 맞는 길을 찾아 가면 안 되는 것입니까? 보다 확실한 사례를 들어보기 위해서 제가 다닌 전자 공학과만 언급해 보겠읍니다. 화학과를 졸업하고 전자 공학도가 된 동기가 있었읍니다. 또, 법학을 전공하다 길을 바꿔서 전자 공학도가 된 사람도, 역시 제 가 대학에 다닐 때 있었어요. 또 반대로, 전자공학과를 졸업해 놓고 경제학과 교수가 된 선배도 있어요. 또 이것도 확실한 사례 라서 예를 들어 보겠는데, 제 친구 중에 어떤 녀석은 자원공학과 를 졸업해서, 미국에서 MBA(경영학 석사 과정 정도)코스를 밟고 뉴욕 증권 회사의 매니져가 되어 있어요. 연봉 십만불 정도를 받 고 있읍니다. 소신이라는 낱말 뜻은 좋지만, 소신이 뭔지도 모르는 대부분의 고삼 입시생에게 소신껏 하라고 하는 부모님들은, 자식에 대한 무성의에다가 소신이란 껍데기를 씌우고 멋만 부리는 것은 아닌 지 한 번 쯤 되집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균오 아버지의 각이 져서 강팍해 보이는 턱이 움찔거렸다. 조 금은 잔잔해진 음성이 새어 나왔지만, 내용은 별로 수그러든 것 같지 않았다. "균오야. 너무 얼지말고 집어넣고, 떨어지면 재수해. 재수가 안되면 유학보내줄께." 균오 아버지는 고집스럽고 힘있는 아버지였다. 아내와 아들을 사랑하되 군림하는 가장이었다. 두 번째 고삼집은 경숙이네 집이었다. 경숙이는 가르치진 않았 지만, 오빠와 그녀의 언니를 가르친 적이 있었고, 당시의 대학입 시에서, 오빠와 언니 모두를 대학에 합격시켰다. 여기서 합격시 켰다는 표현이 어울릴 지는 모르겠지만, 경숙의 오빠가 고집을 부렸던 학과를 피해서 다른 과를 집어넣었던 것이 합격의 이유였 기 때문에, 경숙의 부모님들은 나에게 대단한 신뢰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막내 딸의 눈치작전에도 도움을 요청한 것이 었다. 논현동 주택가의 높은 담벼락을 따라 커대란 집 벽에 주차를 끝냈다. 밸을 누르고 `찡`하는 음향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현관 앞에 물레방아가 돌면서 조그만 연못위 에 물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졸졸졸- 평소에는 물을 돌리지 않고 귀한 손님이 온다 싶으면 돌려놓곤 한다. 아마, 난 지금 이 집의 귀한손님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 았다. "아유! 어서와요." "어서오게나..." 간들거리는 경숙의 어머니와 대머리 벗겨진 경숙의 아버지가 희죽거리며 반겨 주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하자, 좀 전에는 존대말로 인사했던 경숙의 어머 니가 이내 반말로 돌아섰다. "안녕하긴... 이 계집애 때문에 안녕 못해. 공부를 여간 안 했 어야지." 옆에서 빼꼼히 서 있던 경숙이 눈인사를 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빠!" "너가 경숙이니? 하도 오년 만에 보니까 전혀 못 알아보겠다. 완전히 아가씨네..." "히히..." 어렸을 때도 웃음이 헤프더니, 여전히 그 버릇은 남아 있었다. 하얀 색 양털이 곱게 깔린 소파에 푹신하게 파고드니, 이층에 서 경아가 내려와 인사했다. 경숙이의 언니였다. 중앙대를 들어 가서, 벌써 대학원에 재학중이었다. 사실 따지 고 보면, 오늘 이 집에 불려온 것은, 경아 때문이었다. 보름전 쯤 압구정동의 `고센`이란 까페에서 앉아있다가 경아에게 우연히 들키고 말았었다. "오빠는 어쩜 그렇게 연락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 보름전 고센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하는 경아였다. 나는 똑같 이 얼버무려야 했다. "응. 여기저기 좀 쏘다니느라고 그랬어. 연락 못해서 미안하 다." "어딜 쏘다녔는데..." "그냥 바람따라 구름따라겠지 뭐. 자세히 묻지마..." 경아답게 동생 대입시보다는 내 신변문제를 집중탐구했다. "오빤 왜 장가 안가?" "못 가는 거지." "아직도 그 언니들 생각하는구나? 그치?" "아니야. 경아가 빨리 컸으면 하고 있을 뿐이야." "나 다 컸는데..." "음 글쿠나."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경아 어머니가 불안해졌는지 소리를 질렀다. "이년아! 네 동생 대입시 때문에 불러온 오빠한테 무슨 수작이 야. 얼른 꺼지지 못해!" "잉 그래도 나 때문에 우리집에 오게 된건데..." 경아를 떠밀고 되돌아 온 이 큰집의 주인 아줌마와 아저씨가 경숙의 대학입시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왔다. "우리 막내, 어떻게 해. 눈치 좀 봐줘 봐." 대머리 벗겨진 험상궂은 아저씨도 아줌마 못지 않았다. "예전처럼 마지막 날 오전에 핸드 폰들고 학교 몇 군데 알아보 고 오후 세 시 발표 보고 넣으면 되겠지?" "네. 그러면 가능성이 높아 지겠죠." "얘 들어갈 만한 곳에 밑줄 좀 그어 줘 봐." 인상과는 달리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부탁하는 이 자상한 아버 지는 호텔 카지노를 운영하는 깡패 두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 앞으로는 재산이 없고, 몽땅 아줌마 이름으로 재산 관리 가 되어지는 집인만큼, 평소에는 아줌마의 입김이 센 집이다. 하지만, 아저씨도 깡패 두목답게, 화나면 몽땅 때려 부술 줄도 아는 가장이다.물건만 때려 부시면 괜찮은데, 열 받으면 자식들 도 골프채로 두둘겨 패는 아버지여서 가끔 흉터를 남긴다. 옛날에 경아도 얼굴에 시퍼런 멍자국을 계란으로 비벼대며 나 에게 과외수업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일년에 한두번 정도 터지 는 이 아저씨의 폭발은 주로 자식에 대한 지나친 애정에 그 원인 이 있다고 여겨진다. 가사 아저씨도 있었지만, 이 험상궂은 아저씨는 매일 아침 자 식 셋을 모두 학교까지 자신이 직접 운전해서 등교시키곤 했다. 하교 길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아저씨를 통해서 호텔 카지노 사장은 백수에 가까울 정도로 대단히 시간 여유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 만, 자식을 몸으로 사랑하는 부정도 직접 볼 수 있었다. 점심 안가져갔다고 직접 도시락 챙겨서 자식에게 가져다 주는 아버지는, 아마, 이 험상궂은 아저씨 외에 찾아보기 힘들 것이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학원 선생들 몽땅 불러다 전과목 과외시키는 아버지는, 아마, 이 아저씨 말고는 내 생전에 다시 보기 어려울 것 같다. 바로 그 지나친 정성이 실망으로 폭발할 때가 문제인데, 집안 의 유리창이 다 날라가고 골프채가 부러지는 것은 그렇다쳐도, 자식을 개패듯이 두둘겨 패는 것은, 무식한 깡패근성으로 돌려져 벌점의 대상이 되곤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사고를 치고나면 예외없이, 자식 들에게 정성껏 빌곤 하던 아저씨의 귀여움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저씨의 돌발적인 발작이 가정불화로까지 번지는 경우는 한 번 도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나 아줌마나 이 험상궂은 아저씨의 사랑을 잘 알고 있 는 것 같았다. 망나니같은 아버지였지만 친구같은 가장이기도 했 다. 방문한 대가로 푸짐하게 차린 정성어린 저녁을 얻어먹고 나는 세 번째 집인 은주네 집으로 향했다. 집에는 Y대 의대 교수님과 E대 자연대 교수님이 계셨고, 두 분 의 따님인 가장 귀여운 제자, 은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선생님." 언제나 밝게 웃으며 현관문을 열어 주었던 은주가 오늘은 풀이 많이 죽어 있었다. 두 분 교수님과 식탁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문과는 안될까요?" 지긋한 의대 교수님에게 새파란 삼십인 나로서는 존대말을 들 을만한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식의 선생님이란 고전적인 전통이 이 집에서는 살아있는 터라, 나는 별로 어색하지 않게 존 대말 대접에 익숙해져 있었다. "네. 영문과는 안됩니다. 은주가 끝끝내 영문과를 고집한다면 학교를 바꿔야 합니다." 자연대 교수님이 얼른 끼어들었다. "아니예요. 영문과 아니더라도 은주는 E대를 가야해요." 울상을 짓고 있는 은주가 샐쭉꺼리며 말했다. "엄마는 그저 E대 뿐이지." E 대에서 청춘을 보냈고, 또 그 대학에서 십여년을 더 보내고 있는 은주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E대에 보내고야 말겠다는 요 지부동의 자세를 내내 고수해 왔던 터라, 삐죽거리고 있는 은주 였지만, 어머니의 집념을 거스를 엄두는 내지못했다. 내가 이 집에 처음 발을 디딘 날부터 지금까지 은주는 E 대였 다. 따라서, 내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은 학과뿐이었다. "영문과는 안되고, 사실 다른 과도 만만치는 않아요. E 대 커 트라인이 평소보다 높아진다면 위험할 수도 있죠. 은주도 마지막 날 눈치를 봐야해요." 다시 한 번 나는 눈치 보는 법을 두 교수님에게 강의해야 했 고, 두 분 모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다만, 영문과의 꿈이 좌절 된 은주가 눈물을 식탁위에 뚝뚝 흘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나를 약간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이었지만 서글 서글한 잔주름으로 늘 웃음을 보 이며 자상한 인상을 보여주었던 Y대 교수님이, 웃음까지는 아니 더라도, 부드러운 얼굴로 은주를 위로했다. "은주야. 괜찮아. 영문과 아니더라도 E 대는 너끈히 바라볼 수 있잖아. 아빤 지금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지 몰라. 우리 딸이 이렇게 건강하고 이쁘게 자라준 것만해도 고마운데, 영특하 기까지 해서 E 대를 무난하게 바라볼 수 있기 까지 하니, 아빤 너에게 정말 고맙다고 느껴지기까지 해. 그러니, 울지 마라." 의대 교수님의 자상한 설득이 오히려 은주를 더 서럽게 자극했 는지, 은주가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E 대 교수님도 은주 방문을 향해 한 마디 소리쳤다. "아무도 너 못했다고 하지 않으니까 그만 울어라. 응..." 아버지는 어머니 보다 약한 것인지, 난 의외의 상황에 약간 당 황해야 했다. 마주 앉아 있는 은주 아버지의 부리부리한 눈이 벌겋게 물들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강한 것인지, 아직도 부군의 변화를 알아 채지 못한 E 대 교수님이 짖궂은 미소까지 보이며 쫑알거리셨다. "쟤는 E 대가 아무나 들어가는 덴 줄 아나? 영문과 아니만 어 때서 울고불고 난리를 피는지 원..." 지저귀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대조가 되고 있는, 부리부리한 눈 망울에 고이고 있는, 아버지의 고요한 눈물의 정체가 나는 궁금 했다. 처음에는 은주의 영문과의 꿈이 좌절된 것이 못내 아쉬어서 일 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나는 그 생각을 곧바로 수정해야만 했다. 고여드는 습기로 뿌여 졌을 아버지의 검은 눈동자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식탁위에 방울져 있던, 사랑하는 맏딸이 흘리고 간 눈물이었다. 약간 난처해진 나는 은주 방문을 두드릴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 들어가도 되니?" "들어오지 마세요. 이잉..." 은주는, 내가 보아온 어떤 아이들보다, 가장 훌륭한 울타리 안 에서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방문을 계속 두드렸다. "열어 봐." "시러요. 이잉.." (7) 하이재킹 사랑했던 여인들과 더불어 지내던 시절의 연민이, 과외선생질 속에는 담겨져 있었다. 고교생들에게 문제를 풀어주고, 다시 제 자들에게 반복을 시키는 동안, 나는 허연 담배 연기 속에 빠져들 곤 했다. 두 여인과 함께 했던 지난 날의 추억을 연기 속에서나 마 잠시라도 그려보는 것은 나에게 무척 소중한 것이었다. 킥킥거리며 혼자 웃을 때, 문제를 풀던 아이들이 질문으로 나 의 상념에 제동을 걸어주면, 그날은 나에게 행복한 날이었고, 핑 도는 아픔에 허전함만으로 꽁초를 비벼끌 때까지 나를 내버려 두 면 그날은 우울한 날이 되었다. 틈 있으면 빠져들곤 하던 나만의 공간을 굳이 과외질 안에 만 들어 두었던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녀들과 함께 생활하던 대학시절에, 과외는 나의 생업이랄 수 있었고, 어머니는 물론이었지만, 두 여인을 먹여살리는 가장으로 서의 자부심 깃든 직업이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과외속 에서는 그녀들이 한층 또렷하게 보였다. 또한, 과외라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 빠져드는 상념이라, 한 없는 칙칙함 속으로 무리하 게 빠져들지 않을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한가한 시간을 두려워 해 본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한가한 시간에 밑도 끝도 없는 슬픔에 잠겨 본 사람이라면, 한가한 시간 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가한 시간을 지우는 방법이야 여러가지가 있었겠지만, 나에 게 습관성이 되다시피한 것이 바로 과외였다. 재미있게 보내는 시간은 결코 아니었으나, 고교 수학을 통해 수식과 논리 그 자체 들로 머리속의 때를 주기적으로 벗길 수 있었다는 것이 가벼운 훈련도 되었고, 더욱 좋았던 것은 생각나는 여인들을 안전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과외가 없었더라면, 나는 보내기 갑갑한 시간들을, 친구들과 만나서 술 잔을 기울이거나, 여자들을 만나서 유쾌한 희롱을 하 거나, 아니면 지난날의 추억 속에 왕창 빠진채 질척거리며 보내 는 데, 보태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어쩌면 과외보다는 재미있 게 시간을 때운 것이 되겠고, 더 진한 슬픔 속에서 허우적 거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겠다. 그러나, 재미있는 유혹의 끄트머리를 알고, 돌이킬 수 없는 과 거에 무기력해져 본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이 과외보다 형편없이 못 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과외는 두 여인들을 되새기기에 나에게 늘 적당한 시공이 되어 주었지만, 94년 대학입시를 끝으로 나는 과외선생으로서의 나를 일단 마감하여야 했다. 떼어버리기엔 아쉬움이 남아있는 과외선 생질이었다. 그러나, 전사로서 자리를 잡은 나에게 예전보다 잦 아지는 출장은, 과외선생이란 업을 더 이상 병행하지 못하게 만 들었다. 중동의 본사에서 바쁘게 날아오는 우편물들은 알제리에 관계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회교원리주의 회교 구국전선(FIS) 산하 무장단체인 회교 구호 군(AIS)의 기관지 (`엘-페트, 엘-무바인(압승)`) 에 집중된 우편 물의 내용은, 알제리 국민은 프랑스와 이 나라를 지원하는 모든 세력들과 직접적인 분쟁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미 외국인 추방에 강제력을 동원해왔던 이들 단체의 테러로 이미 적지않은 외국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알제리의 회교 원리 주의자들은 국민투표에 승리한 바 있었으 나, 군부의 쿠데타로 밀려나자, 군부의 지지를 받는 알제리 현정 권의 타도를 외치며, 프랑스가 현 정권을 지지하고 있는데 대해 강력하게 비난해 오고 있었다.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 있었던 알제리였으나, 1962년 프랑스 로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130년간 식민통치를 받기도 했다. 공업국으로 발돋음 하려는, 이슬람이 국교인 알제리의 얼룩진 역사를 군부 쿠데타가 또 한차례 어수선하게 만들었고, 설상가상 으로 회교원리주의자들의 테러대응방식으로 어두운 음영만 더욱 짙어져 가고 있는 알제리였다. 출장이었다. 국내의 시니어들과는 별도로 이곳에서는 나혼자 차출되었다.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중동 본사에서 나온 시니어들과 공작 경로와 행동지침에 대한 연구를 끝내고, 폭발전문가 다얀과 한 조가 되어 임무 수행에 들어 가기로 했다. 청부는 회교 원리주의 무장단체 회교 구국 전선(GIS) 에서 들 어왔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알제리의 급진 회교 무장 단체(GIA) 소속 테러 대원 4명 을, 소총과 다이너마이트 20키로로 무장시켜, 파리발 에어 프랑 스 소속 8969편에 태울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둘째, GIA 단체 소속 대원들은 경험이 미숙한 아마츄어들인 관 계로, 이들을 관리할 비행기 납치에 경험있는 전문가를 요구했 다. 여기에서 관리란, GIA대원들과 행동을 같이하며 지시와 간섭 을 하는 관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재킹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불의의 사태에 대한 견제를 의미하는 것을 말한 다. 즉 경험이 미숙한 GIA대원들의 성급한 판단으로 극심한 지탄 을 초래할 지도 모르는 상황을 우려한 GIS에서, 대비책을 부탁하 는 것이다. 세째, 이들의 하이재킹이 실패로 끝날 경우, 자신의 대원들을 포로로 만들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청부의 의미는 하이 재킹이 실패로 돌아가, 자신의 대원들이 포로로 잡힐 경우, 하이 재킹에 관여했던 GIA단체 전체에 번질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고육지책이기도 한 것이었다. 본사에서는 이들의 청부에 긍정적인 의사표시를 했고, 구체적 인 논의를 위해 GIS의 연락관과 접촉을 가졌다. 사막의 막사안에는 공작경로와 행동지침에 대한 실무자인 하임 과 임무를 맡게 될 다얀과 내가 GIS의 연락관 두 명을 맞았다. 작은 키의 곱슬머리인 압둘 알 하임은 갈색 눈을 가졌다. 하임이 핫산이라고 소개한 구렛나루가 멋있게 자란 GIS의 연락 관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다이너마이트 20키로에 대해서는, 기내로 운반할 수는 있겠지 만 실제로 터뜨리는 사태까지 간다면 우리로서는 사건 발발 규모 를 책임지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저희 회사에서는 이 부분에 대 한 요구를 백퍼센트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입니다." GIS 연락관은 그 부분에 대한 우리측 입장을 이미 예견하고 있 는 듯 했다. 사실 비행기 하이제킹에 다이너 마이트를 사용했던 선례는 지 금까지 한 번도 없었고, 그 여파의 잔인함을 감당하기엔 GIS 역 시 고민이 컸던 것 같았다. 핫산은 우리측이 난색을 표시한 문제에 대해, 미리 준비를 했 던 것 같았다. "회교 구국 전선은 다이너마이트의 용도를 위협용으로 적재하 고자 하는 것일 뿐, 어떠한 사태가 발발해도 실제로 터뜨리는 사 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겠읍니다. 그러니, 일단 적재 를 도와 주십시오." 하임이 다시 핫산에게 다이너마이트 통제에 대한 분명한 관리 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말했다. "본사에서는 다이너마이트와 총기류를 비행기내로 운반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지만, 우리측 폭발전문가가 다이너 마이트 를 관리할 수있도록 하겠다는 점에 대해, GIS측에서 확실한 동의 를 해주어야만 하겠읍니다." 핫산이 턱밑의 구렛나루를 매만지며 물었다. "귀사의 폭발전문가가 다이너마이트를 통제하시겠다면, 우리로 서는 오히려 부담을 더는 것이 되겠지요. 사실 우리 행동요원들 은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 불안한 면이 없질 않아요. 그런데, 걱정스러운 점은, 귀사의 전문가가 하이재킹 중에 총 을 들고 있는 우리 GIA대원들을 통제하겠다는 것인데, 현장상황 에서 그게 가능하겠읍니까? 잘 아시겠지만, 기내에서는 총 든자 가 곧 법이 아닙니까?" 핫산의 우려에 하임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우리로선 그 부분에 대 한 충분한 자신이 있읍니다. 다만 하이재킹에 들어가기 전 작전에 참여할 GIA대원들에게 다 이너 마이트를 관리할 수 있는 독자적인 권한이 그들에게는 없다 는 점을 분명히 인지시켜 주시고, 우리측 전문가의 통제를 받아 야 한다는 점을 언급해 해주십시오. 단 우리측 전문가는 다이너 마이트만을 관리할 수 있고 제반 하이재킹에 관계된 어떤 문제에 도 간섭하지 않을 것도 아울러 설명해 주시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저희가 감당하도록 하겠읍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서구화된 지역이라 할 수 있는 해안 지대와 아직도 전통 문화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남부가 공존하는 알제리 에 입성한지도 일주일이 흘렀다. 알제리 남부의 오아시스 마을인 가르디아 언덕의 민가에서 다 얀과 함께 다시 한번 작전에 대한 검토를 숙의했다. 모스크라 불리우는 언덕위의 황토색 탑 주변으로 빛 바랜 상아 색 민가들이 사방으로 들어서 있는 이곳에선, 민가의 집앞에 모 래색 천을 뒤집어 쓰고 힘없이 앉아있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눈빛은 대체로 흐렸고 어딘가 힘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삶의 추구하는 바가 궁금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의 눈빛은 이곳에 서도 총기가 흘러 보였고 또렷해 보였다. 남루한 빛바랜 남색 천 으로 둘렀지만, 귀여운 얼굴에서 흐르는 어린아이의 맑은 기운이 어쩐지 사막의 오아시스를 보고 있는 듯 했다. 하시메사우드의 풍부한 유전지대에서 산출되는 석유 수출로 상 당한 외화를 벌어 들이고 있음에도 식량부족과 경제 개발 계획에 필요한 생산재를 수입하기 때문에 빈곤에서 허덕이고 있는 알제 리였다. 연안이 좁은 평야와 아틀라스 산맥, 남쪽으로 펼쳐진 사하라의 알제리...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틀라스 산맥의 이북의 연안부에 모여 살고 있다. 지중해성 기후의 연안에는 프랑스에서 이민온 사람들이 만든 포도와 오렌지 농원이 많다. 가난한 농촌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모여들면서 공업 화를 지향하던 알제리였지만, 쿠데타 정권과 회교원리주와의 극 심한 충돌이 알제리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다얀은 알제리의 우아리 부멘 공항근처의 염색 시장안의 한 허 름한 창고에서 GIA대원 네 명과 회합을 가졌다. GIA대원들의 리더격인 압둘 압달라 야히아와 사막의 전사로 유 명한 베르베르 인의 일파인 투알레크 족 출신인 오하마드에게, 다얀은 준비한 길쭉한 통조림통 4개를 보여 주었다. 통조림 통에 는 자동소총이 분해 되어 담겨져 있는 것으로, 우아리 부멘 공항 의 검색을 피하기 위해 회사에서 준비한 것이었다. 중동의 본사에서 기내의 식료품을 운반하는 차량에 똑같은 통 조림통을 적재해 두었고, 그 트럭이 있는 장소를 야히아와 모하 마드에게 설명해 주었다. 또한 다얀은 항공 정비 요원으로 우아 리 부멘 공항에 스며들게 될 야히아와 오하마드에게 통조림 통에 서 분해된 자동소총을 공구통에 담아 에어 프랑스기에 접근하는 경로를 자세히 반복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이름을 밝히길 꺼려하는 나머지 두 대원과 야히아와 오 하마드의 상의를 모두 벗기고, 네 명의 등짝에 다이너 마이트 20 키로를 나누어 테이프로 붙여주었다. 우아리 부멘 공항에 도착한 다얀은 3번 매표구 앞에서 서성거 리며 준비가 완료 되었다는 사인을 나에게 보내왔다. 길쭉한 숄더 백을 메고 있는 다얀이 매표구 옆에서 숄더백을 풀었다가 다시 묶는 것으로 나에게 준비되었음을 알려왔다. 다얀의 숄더백에는 보석상자로 위장된 특수합금 처리가 된 두 개의 상자가 담겨져 있는데, 그것은 기내에서 다이너 마이트를 담아둘 상자였다. 자물쇠 역시 마레이징 강으로 만들어져 일반 총기류로 부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파리발 에어 프랑스 소속 8969편에 탑승을 위해 공항 검 색대 앞에 줄을 섰다. 내 신발은 겉에서 보면 약 삼센티 두께의 검정 고무가 밑창으 로 달라붙어 있는 세무 신발이었지만, 신발 안쪽을 들여다 보면 양쪽 신발 고무는 파여져 있어서, 마가로프 9미리와 탄창과 총에 부착할 수 있는 적외선 조준경 그리고 소음기까지 잔뜩 집어 넣 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공항경찰이 금속 탐지 스캔으로 무릎아래까지 내 몸을 더듬었 지만, 신발바닥에 깔려있는 금속은 탐지될 수 없었다. 검색대를 통과해서 8969편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둥그런 창으 로 비행기 날개를 볼 수 있는 오른쪽 뒷 자리였다. 자리에 앉기 전에 화장실에 먼저 들러 신발속의 총을 꺼내어 점검해야 했다. 적외선 조준경을 밀어 붙이고 소음기를 총구에 돌려 죄어 놓고 탄창을 올려 끼웠다. 안전 장치를 내리고 조준을 해보았다. 손가 락의 감각이 신선한 컨디션을 전달해 주고 있는 듯 했다. 여섯 줄 앞쪽의 왼편에 다얀의 자리하고 있었다. 숄더 백은 보 이지 않았다. 뒤 쪽 빈좌석 짐칸에 따로 넣어두었을 것이다. 자리에 앉아 다얀과 의사소통을 위해 준비한 새끼 손톱만한 고 성능 도청기를 오른쪽 귀에다 꼽았다. 다얀의 헛기침 소리가 들 렸다. 나도 역시 헛기침으로 인사를 했다. 좀처럼 구름을 보기 어려운 푸른 하늘에 몇 마리 새가 떠다니 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번에도 나는 사람을 죽이게 될 것 같 다. 인명을 살상하는 것에 대한 당연한 가책이 떠올라야 하는데, 더듬어 떠올려 보려 했지만 이번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나이퍼란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동 료 신참 저격수가 살인에 대한 자책을 토로하며 괴롭다고 버둥거 릴 때, 주인공 저격수는 `더욱 괴로운 것은 그러한 가책조차 떠 오르지 않는 것이야.`라고 대답하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궁금했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가 단순히 만들어 낸 대사라고 하기엔 지금의 나에게 그 장면이 너무 절실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만 일, 어떤 저격수로부터 듣고서 그런 대화를 마련했다면, 그런 이 야기를 시나리오 작가에게 해준 저격수는 많은 사람을 죽여본 저 격수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사람을 한 번 만나 보 고 싶었다. 대부분의 자리들이 채워지고 이륙 이 삼분 전 쯤에 앞 쪽에서 소음이 시작되었다.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압둘 압달라 야히아와 오하마드가 뛰어들 어 조종석을 장악했다. 앞쪽 어림에 앉아있던 두 명의 앳된 청년 둘이 오하마드가 건 네 준 소총을 받아들고 출구를 봉쇄했다. 하이재킹은 이렇게 쉬운 것이다. 대량의 인질 확보, 어디로든 날아 도망갈 수 있는 이동의 편의 성, 그리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고도의 광고효과, 이런 것들이 테러범들로 하여금 비행기 하이재킹에 관심을 기울 이게 만들곤 한다. 얼굴빛이 창백한 테러범 한 명이 다얀이 기내로 운반한 상자에 자신들의 등짝에 감춰 온 다이너마이트를 채워넣었다. 아직 자물 쇠는 잠그지 않은 상태였다. 조종석을 장악한 야히아가 준비해둔 납치 연설문을 기내 방송 을 통해 짤막하게 흘리고 있었다. 어수룩한 불어였다. "여러분은 급진 회교 무장 단체(GIA)의 손님이 되셨읍니다. 우 리는 이슬람 구국전선(FIS)의 지도자 2명의 석방과 우리의 안전 한 탈출을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의 요구대로라면 여러분들의 안 전을 책임져 드릴 수 있겠지만,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응분의 보복이 시작되지 않을 수 없읍니다. 현재 기내에는 다이너 마이트 두 상자가 실려있읍니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했고, 여러분의 생명을 담보로 하고 있읍니다. 여러 분의 생명은 우리의 재산인만치 우리도 함부로 관리하지는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우리 동지들의 통제에 맞서지 마시고 차분하 게 순응해 주시는 것만이 여러분의 안전에 보탬이 된다는 사실을 주지하시고 동요없이 지시에 따라줄 것을 부탁합니다." 조종실의 야히야가 걸어나오자, 여기저기 웅성거리며 울부짖는 여인들의 음성과 기도하는 소리들로 시끄럽던 기내가, 훌쩍거림 정도로 잦아 들었다. 야히아가 팔뚝에 전갈무늬가 있는 GIA대원에게 무언가 속삭이 자, 기내의 안내원들이 승객들에게 스카프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 다. 이슬람의 회교 율법은 하이재킹안에서도 철저히 지켜지고 있 는 듯 싶었다. 여인들이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는 동안, 전갈무늬가 승객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도록 두리번 거리며 다얀 근처로 다가갔다. 도청기 안에 두런거리는 아랍방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위 의 승객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지역방언으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다얀의 음성이었다. "어서 다이너마이트 상자의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가져다 주 시오." 전갈무늬가 야히아쪽을 바라보았다. 야히아가 전갈무늬 대신 다얀에게 다가왔다. 반면에 전갈무늬는 기내의 앞 쪽으로 이동했 다. 기내의 주방옆에 기대어 선 전갈무늬는 경계를 서려는 듯 자 동소총을 늘어뜨린 채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야히아에게 다얀이 똑같은 요구를 하자, 야히아가 대답했다. "다이너마이트는 현재 우리 손에 있고 우리가 관리하겠읍니다. 터뜨리는 불의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얀이 말했다. "핫산에게서 다이너마이트 관리를 우리가 맡기로 한 것을 듣지 못했소?" 야히아의 조롱하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이재킹시에 모든 권한은 총부리에서 나오지요. 그걸 모르지 는 않을텐데요?" 다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쿨록!" 나는 품에서 마가로프 9미리를 가만히 꺼내어 스카프로 가렸 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고개를 깊숙히 숙이고 있었고 얼굴이 시 커만 옆 좌석의 알제리 노인과 나 또한 그러했다. 나는 고개를 약간 올리고 앞좌석의 등 받이 사이로 조준을 시 작했다. 대상은 주방옆의 전갈 무늬였다. 마침 전갈무늬는 주방의 커튼 을 제치고 카트에서 파인 애플 한조각을 꺼내어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퓨슝! 프흠!" 옆자리의 노인이 소음에 연연하지 않도록 사격과 동시에 헛기 침을 했다. 스카프 밑의 마가로프를 허벅지 아래에 슬며시 찔러 넣을 동안, 옆 자리의 노인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앞 쪽에서 전갈무늬의 짤막한 탄성이 일었다. "헛!" 박살난 과일조각의 부스러기를 쥐고있는 전갈무늬의 팔목이 부 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얀이 야히아에게 전하는 음성이 도청기를 통해 들려왔다. "총은 자네들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야. 기내에는 우리 요원도 타고 있어. 그러니, 서로 충돌은 피하세. 우리가 요구하는 것 은..." 다얀의 말이 이어지고 있을 때, 앞 쪽의 전갈무늬가 야히아에 게 다가와 다얀의 말을 끊고 떠벌렸다. "총알이 틀림없어요. 들고 있던 과일이 박살났어요. 어디선가 절 노리고 날아온 것 같아요." 앉아 있던 다얀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주위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아랍방언이었지만, 야히아와 전갈무늬는 알아듣 고 있는 듯 했다. "자넬 노린 것이 아니고 그 과일을 노린 것이네." 전갈무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짓말, 이런 상황에서 누가 움직이는 과일조각을 내 입 앞에 서 맞출 수 있겠어. 그 놈은 날 노린거야. 당신도 한패겠지." 흥분한 전갈무늬가 자신이 들고 있던 총을 다얀에게 건네며 자 신이 겁먹고 있지 않음을 과시 하려는 듯 했다. "자 어디 이 총으로 날 쏘아보라구! 다이너마이트는 우리 손에 있으니 어서 쏘란말야!" 다얀이 다시 쿨럭거렸다. 그리고, 총을 전갈무늬에게 다시 건 네 주며 조그맣게 말했다. "난 여기서 자넬 쏠 수 없네. 난 자네의 인질일 뿐이고, 주위 에 앉아 있는 프랑스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을꺼야. 나는 자네들 의 인질일 뿐이고 자네들은 인질중에 하나인 나를 희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해. 그래야, 자네들에게 일을 부탁한 사람이 안전 해지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네. 불어 통역을 시키는 척하며 날 끌 고 다니게, 그리고 분명한 것은 나는 다이너마이트가 내가 운반 해 온 상자에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해야 하고 자물쇠를 내 손으로 채워야 하네. 열쇠는 내가 갖고 다이너마이트는 자네들이 맡게. 그러면 서로 안전하지 않겠나. 그리고, 다이나마이트가 정 말 필요한 시점이 온다면 서로 의논해서 사용하면 되지 않겠나?" 다얀의 음성을 받은 것은 야히아였다. "당신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소.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서 총알 이 날라올 지 모르는 이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렵소. 그러 니, 보이지 않는 총잡이가 누구인지 알아야겠소." 다얀이 조금 매서워진 목소리로 야히아에게 속삭였다. "나는 지금 자네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일세. 당장이라도, 나는 자네들 모두를 사살하라는 메시지를 나의 친구에게 보낼 수 있네. 그럼 오늘의 하이재킹은 여기서 끝나고 만다네. 그럴텐가?" 전갈무늬가 대답했다. "믿을 수 없소?" 다얀은 주위를 한 번 둘러 보며 야히아에게 눈짓을 했다. 야히 아가 의도를 알아챘는지, 주위의 승객들의 고개를 더욱 깊숙이 파묻게 했다. 다얀은 담배 한 개피를 전갈무늬에게 건네주며 말 했다. "그런가? 그러면 자네 이 담배 한 개피를 피워보겠나?" 전갈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깊숙히 연기를 빨아 내뿜고 있었지만, 담배를 쥔 손 끝이 조금 씩 떨리고 있었다. 연기는 두 어번 더 뱉어졌고, 담배는 점점 꽁초가 되어져 갔 다. 끄트머리의 떨림이 없어진 꽁초가 마가로프의 조준경안에 걸려 들었다. "퓨슝! 푸흠!" 스카프속의 마가로프가 다시 조그만 소음을 만들었고, 나는 소 음과 화약냄새를 지우기 위해 사격과 동시에 잔기침을 내보냈다. 기도문 비슷한 것을 웅얼거리며 고개를 쳐 박고 있는 노인은 여 전히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전갈 무늬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꽁초가 이번에도 그의 입술 어림에서 몽땅 잘려나갔다. "흐윽!" 부들부들 떨리는 전갈 무늬의 팔뚝이 마치 경련을 일으키는 것 처럼 보였다. 이런 일에 종사하기에는 아직 어린 테러범이란 생 각이 들었다. 다얀의 침착한 음성이 들렸다. "이젠 믿겠는가?" 야히아의 떨리는 음성이 이어졌다. "이름만이라도 알고 싶소. 도대체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읍니 까?" 다얀이 대답하고 있었다. "우린 그를 `프린세스 낙랑`이라고 부르고 있다네." 전갈무늬가 신음처럼 떠듬거리며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들은 적이 있어요... 프린세스 낙랑... 이 세상 끝에 서 저 세상 끝까지 쏘아 맞춘다는... 바벧탑의 저격수..." 전갈무늬의 떨리는 신음을 야히아의 차분한 음성이 이었다. "시야에 걸리면 피할 수 없고, 그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지옥 뿐이라는... 그사람 이었군요. 그가 우리를 겨누고 있는 것 이로군요." 다얀이 가만히 대답했다. "그는 자네들의 뒤를 보아주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네. 자 네들을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닐세. 너무 오래 내 옆에 있으면 사람들이 의심하니 나를 데리고 조 종실로 들어가게." 야히아가 대답했다. "알겠읍니다." 조종실에서 조종석 무전기로 여객기는 납치되었고 이슬람 구국 전선(FIS) 지도자 2명을 석방하고 안전한 탈출을 보장하라는 야 히아의 요구와 그것을 불어로 통역해 요구하는 다얀의 음성이 귀 의 도청기를 통해 들려왔다. 관제탑에서는, 압델라만 세리프 알제리 국방장관이 나와 설득 을 시도했다. 야히아의 어머니까지 동원시켜 알제리 정부는 설득 에 나섰으나, 여의치 않은 사태만 만들고 있었다. 나나 다얀이 개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어서 가만히 두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알제리 기내 보안 요원과 베트남 대사관 통상담당 참사관 비 지앙 토(48)가 사살되어 기체 밖으로 던져졌다. 흥분된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다얀은 네 명의 테러범에게 부녀자와 어린이를 풀어 주자고 제의했다. 테러범들은 12명의 승무원과 2백 27명의 승객 중 부녀자와 어 린이 63명을 풀어 주었다. 아울러 25일 하오 9시까지 요구에 불 응할 때는 인질의 추가살인을 통보했다. 상황을 두 가지로 예측해 볼 수 있었다. 포로 석방 아니면, 충돌이었다. 포로 석방쪽으로 무난히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회사측에서는 판단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돌아가는 낌새가 포로 석방 쪽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FIS 지도자 두 명은 이미 사살되었거 나, 석방할 수 없는 특별한 조건에 처해진 것이 분명했다. 시간을 오래 끈다는 것 자체가 하이재킹에서는 협상결렬을 의 미하는 것이었다. 포로를 석방하겠다면 지구촌의 매스콤을 타기 전에 석방이나 요구조건의 수용으로 해결이 되어지기 마련이었다. 비행사 측이 나 공항관리 측면에서의 손실과 불명예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빠 른 시간내에 해결하고 세상의 전파를 타지 않도록 덮어두려는 것 이 관례다. 그래서 사실, 하이재킹의 성공사례는 세상에 잘 드러 나지 않는다. 조종실에서 관제탑과 마무리만 잘 되면 탑승객은 자신이 타고 있는 비행기가 하이제킹의 대상이었던 것도 모른채 끝나기도 한다. 어쨋든, 요구는 거부되고 있는 쪽으로 흐르고 있음이 명백해지 고 있다고 여겨졌다. 충돌 사태가 발발한다면, 알제리 최정예 부대인 `닌자`부대가 배치되었을 것이다. 다얀은 이런 점을 야히아에게 설명했고, 장소를 이동해 프랑스 쪽에 압력을 넣어 보기로 했다. 25일 하오 9시에 알제리 주재 프랑스 대사관 요리사 야니크 베 네를 추가로 살해하고 납치된 항공기는 우아리 부멘 공항을 이륙 했다. 알제를 떠난 8969 에어 버스 300편은 마르세이유에서 북쪽으로 40키로미터 떨어진 마리난 공항에 프랑스 시각으로 26일 오전에 착륙했다. 프랑스 정부 대표로 이 지역 주지사와 알제리 영사관 관리들이 활주로에 착륙해 있는 비행기와 무선으로 접촉하며 협상을 시작 했지만 역시 여의치 않았다. FIS 지도자 두명은 석방될 수 없는 여건에 처해있음이 틀림 없 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얀은 아랍국이나 제 삼 세계권으로의 탈출을 제의했지만, 어 린 테러범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비행기를 파리로 몰고가서 세계의 이목을 더욱 집중시 키며 화려한 협박으로 목표를 달성할 것을 고집했다. 상황은 점점 어려워 가고 있는 듯 했다. 조종실에 인질로 위장 된 채 테러대원들을 관리하고 있는 다얀 덕분에 도청기로 조종실 의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비행기는 약 170명의 승객을 태우고 알제의 우아리 부멘 공항 을 떠나 오전 11시 14분경 마리난 공항에 착륙했으며, 다른 비행 기의 이착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공항 터미날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고립지역에 착륙되어....." 조종실의 라디오에서는 프랑스 엥포라디오가 보도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하이재킹은 벌써부터 매스콤을 타고 있는 듯 했다. 사태는 피를 부르고 있는 쪽으로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게 느껴졌 다. 피랍기가 기착해 있는 동안, 승객들에게 제공할 식사와 음료를 공항측에서 제의해 왔다. 음식물의 운반을 위해 비행기의 앞 뒤쪽 두 군데 출입문에 트 랩이 설치되었다. 이제 상황은 거의 끝나간다고 판단되었다. 음식물을 운반하기 위해 들어온 항공사 직원과, 공항 식당 종 업원들은 대단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네 명의 어린 테러 대원들의 눈에 틀림없는 식당 종업원이나 항공사 직원으로 보이 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에 숙달된 다얀이나 나에게 그들은 그렇게 보 이질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식당종업원이었고 항공사 직원 이었다. 흘깃 흘깃 스쳐보는 그들의 눈매에는 테러리스트들의 면 면과 위치가 파악되고 있었고 좌석을 슬금슬금 스치며 음성탐지 기와 열감응 추적장치를 붙여놓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얀은 테러범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본래의 좌석에 앉았다. 테 러범들에게 더 붙어 다니다가는 테러리스트로 간주될 수 있기 때 문이었다. 식당 종업원으로 가장한 프랑스의 특수부대 요원들이 어디엔가 붙여 놓았을 열감응 추적장치는 기내 밖에서 움직이는 뮬체를 체 크할 수 있는 것으로 움직이고 있다가는 테러 대원으로 여겨지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파리로 가서 계속적으로 협박을 고집하는 네 명의 어린 소년들 을 만류할 길은 없었고, 프랑스 대테러 특수부대를 막을 길도 이 젠 없었다. 소년들은 파리로 갈 수 있도록 연료 공급을 요구했다. 사태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던 네 명의 어린 청년들은 요구 제한 시각 오후 다섯시에 가까와 오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자, 돌변한 위기 감에 제어하기 어려운 흥분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야히아가 다얀에게 다가와 다이너마이트를 요구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우린 죽음을 각오했어요. 다이너마이트를 조종실로 운반해야 겠어요." 다얀은 가만히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리고 나직한 음성으로 어 린 소년의 흥분을 달래주었다. "별 것 아니야, 좀 더 너희들을 초초하게 만들고 약이 오르게 한 다음 지나친 요구를 하지 못하게 할 속셈이야. 저들도 이미 이곳에 다이너 마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있을텐데, 절대 함부로 들어오지는 못해. 침착하게 기다려. 다이너 마이트는 조종석에 옮겨놓고 좀 더 기다려 보도록 해. 하지만 아직 열쇠를 내 줄 순 없네. 우린 좀 더 기다려야만 해." 제한 시각 오후 다섯시가 지나자, 조종석의 테러범 중 누군가 가 총질을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끝장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소년들이 아직까지 다얀에게 열쇠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소년들은 열쇠 대신 인질 몇 명을 조종석 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인질들로 버티며 저항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 같았다. 이제 곧 프랑스 특수부대, 아마도 국립 헌병대(GIGN)가 들이닥 칠 것이다. 인질 살상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조종석의 총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기내는 거센 아우성이 시작 되었다. 긴 탄성과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기도소리, 주책없이 흐느끼는 서양 남정네들... 그들 사이를 지나, 나는 조종석쪽을 살필 수 있는 앞 좌석으로 이동해 갔다. 내 이동이 어쩌면 기체 밖의 대테러 담당요원들에게, 네 명의 테러범을 다섯 명으로 오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지만, 그러지 않도록, 한 승무원이 자리에 주저앉은 상황을 이용 해 움직였다. 테러범 외에도 승무원은 오가고 있는 상황을 활용 한 것이었다. 자리를 새로 잡은지 일분도 안되어서 앞 쪽과 뒤 쪽의 출입문 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문 잠금장치가 떨어져 나가자마자, 검은 복장의 특수 부대원들이 앞 뒤쪽에서 들이 닥치고 있었다. 비행 기 양쪽 옆의 비상 탈출 슈트가 내려지고 승객들은 특수부대원들 의 안내를 무시한채, 탈출 슈트로 몰려들었다. 마그네슘 섬광탄이 조종석에서 터지자 기내의 전기가 모조리 나갔다. 빛이 들어오고 있는 비상탈출구로 승객달은 떠밀려 지고 있는 듯했다. 시끄러운 울부짖음, 조종석의 교전이 만드는 수십 발의 자동화기 발사음등이 기내를 더욱 난장판으로 몰아가고 있 었다. 조종실 문은 방탄이라 네 명의 소년들은 문을 여닫으며 총질로 맞서고 있었다. 조종석 쪽으로 나있는 좁은 통로로 밀려 들어온 특수부대원들이 방탄문을 향해 응사를 하고 있었지만, 신통해 보 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행기 바깥 쪽에서 조종적에 던져진 마 그네슘 섬광탄이 조종석쪽에서 다시 한 번 번쩍이자, 조종실문은 닫혀졌다. 마그네슘 섬광탄은 폭팔시 파편으로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는 아니다. 폭팔시의 강력한 빛이 한동안 시력을 마비시키는 폭탄이 다. 따라서, 인질들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특수 부대원들이 비행기 바깥 쪽에서 조종석 유리창을 깨뜨리고 마그네슘 섬광탄 을 던져넣고 있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섬광탄으로 잠잠해진 조종석 출입문의 손잡이에 검은 복장의 특수부대원 한 명이 달라 붙어 부수고 있었다. 비행기 안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매캐한 연기와 아우성치 는 울부짖음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펑!" 조종석의 잠금장치가 폭발음에 날아가고 문 근처의 테러 요원 한 명이 공중으로 떴다가 좌석 뒤 쪽으로 곤두박질 쳐졌다. 왼쪽 팔뚝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시력이 마비된 소년들은 조종실 안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두어 줄 앞 쪽에서 한 아랍인 승객이 총에 맞은 듯 의자 뒤에서 복도 쪽으로 비스듬이 쓰러졌다. 시선이 마비 된 테러범들의 무차별 사격은 그들의 적이랄 수 있는 프랑스 대테러 특공대원과 승객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한 듯 했다. 반면에 좌석 곳곳에 자리잡은 저격수 들은 조종석 방탄문이 제 거된 탓에 정조준을 하기 시작했고, 소년들은 한 명씩 사살 되어 지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의 소년이 가장 먼저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졌 고, 조종석의 좌측 두 번째 의자에 기댄 채 널부러지고 있는 앳 된 테러범의 최후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몹시 거북해짐이 느 껴지고 있었다. 곧이어 오하마드가 쓰러졌고 야히아도 오른쪽 끄트머리의 의자 에서 튀어나오다 즉사했다. 마지막 남은 전갈무늬가 총을 던지며 손을 치켜 들고 일어나며 투항의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회사의 고객인 회교구국전선(GIS)은 관련자들의 보호 차원에서 포로를 만들지 말 것을 강조했다. 투항의사를 밝히자마자 마지막 소년의 이마에는 총알이 박혔고 즉사했다. 전갈 무늬의 이마에 박힌 마지막 총알은 마가로프 9미 리에서 발사된 것이었고, 내가 쏘았다. 직업이니까... 나는 여전히 좌석에서 꼼짝않고 고개를 숙인채, 스카프로 총을 닦아내었다. 의자 아래에서 총을 다른 곳으로 밀어 보내고, 눈물 이 찔끔거리도록 헛구역질을 몇 번했다. 주위에는 자동소총의 소음과 매캐한 연기에 주눅 들어 꼼짝 못 하고 있는 몇몇 승객들이 나와 비슷한 자세로 움추리고 앉아 있 었다.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어야 했다. 스무살도 안된 소년의 이마에 총알을 쑤셔박아야 하는 내 처지 가 매우 더럽게 느껴졌다. 한 특공요원의 불어 목소리가 암흑 속에서 고요한 빛처럼 잔잔 에게 들려왔다. "납치범들은 모두 사살되었읍니다.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상황이 종료 되었다는 특공대원의 멘트가 있자, 기내는 더욱 소란해졌고, 안전을 확인한 사람들은 더욱 서둘러 비상슈트 쪽으 로 밀려 나갔다. 나와 다얀 역시 그들 틈에 끼어져 주홍색 비상 슈트로 미끄럼을 타고 빠져 나왔다. 비행기 밖의 많은 의료진들과 취재진들이 꾸역거리며 모여들었 다. 다얀은 테러대원의 통역을 맡으며 이리저리 끌려다녔다는 이유 로 매스콤의 취재대상이 되어 세계로 전파를 타는 처지가 되었 다. "그들은 나에게 총을 건네주며 쏴 보라고 조롱하며 웃고 떠들 곤 했읍..." 잔뜩 겁 먹은 표정으로 인터뷰를 하는 다얀의 얼굴 모습을 공 항 대기실에서 보고 있노라니 실소가 흘렀다. `야마가따 사이찌`란 위조 여권은 대단히 완벽한 것이어서 나 는 별다른 의심없이 다음날 파리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기내에서 신문을 펼치니, 어제 있었던 하이재킹에서의 프랑스 국립 헌병대 개입부대(GIGN)의 무용담이 실려져 있었다. 음식물 수송을 위해 설치되었던 비행기 트랩과 당시의 비행기 바깥 상황 을 찍은 몇 장의 사진들이 함께 실려져 있었다. 트랩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놓아 둔 것은 다얀의 작품이었다. 만일 트랩이 설치 되어 있지 않다면, 국립 헌병대는 헬기로 조 종석 앞 유리창을 깨고 침투해야만 하였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량 살상사태를 피하기 어렵다는 설득과, 인질관리와 음식물 수 송과 협상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모르는 시점에서, 트랩을 치웠 다가 설치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기내의 상황을 자꾸 노출시킬 수 있다는 말로, 노련한 다얀은 트랩을 치우려 하는 어린 야히아 를 만류할 수 있었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총을 쏘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그래 서, 인명을 인질로 하는 하이재킹을 이용해서도 돈을 버는데, 별 로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에서 이 일을 맡은 것은 돈이 이유의 전부는 단연 코 아니었다. 우리 회사가 이 일에 개입을 거부했어도 이번 하이 재킹은 어떤 경로로든 피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총을 쏘아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인명을 경시한다고 욕을 먹어 마땅하고 그런 욕을 지당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 니컬 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총을 많이 쏘아본 총잡이일수 록, 인명을 다치지 않는다. 총잡이들에게 존경받는 전사는 주어진 상황에서 살상을 최소화 하고 자신에게 할당된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총을 들고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그러려 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마음일 뿐이고, 경험과 실력이 따라 주지 못하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차피 일어날 하이재킹이라면, 노련한 전사가 개입된 하이재 킹이 사람을 덜 다치게 한다. 그래서, 중동의 본사는 지금도 세 계 곳곳에서 필요악으로 군림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신문의 여기저기에서 GIGN 특공대의 무용담을 칭송하는 기사들 을 읽으며, 네 명의 어린 테러범들을 떠올렸다. 스무살 인생의 꽃망울에 총을 쥐어야 했던 그들은 왜 그래야 했을까? 그들에게 는 사연이 없을까? 일본인 장성들의 파티에 폭탄을 던진 우리 조 상을 우리는 선열로 칭송한다. 이들이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세 력의 후손들로부터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들의 피지도 못한 청춘을 바쳤을까? 스무살의 객기라고 돌려 버리기에는 너무 미안 하게 여겨졌다. 더우기, 기사에는 그들이 무차별하게 승객들에게 총질을 했고, 수류탄을 터뜨렸다고 죽은 그들의 영혼을 난도질 했다. 그들이 수류탄이 있었다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조종석 의자 밑에 있었던 두 상자의 다이너마이트는 비행기 앞 대가리 정도는 거뜬히 날려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류탄을 갖고 있지도 않았으며, 기내에서 터진 것은 GIGN 특공대가 사용한 마그네슘 섬광탄 밖에 없었다. 세계 유수의 통신사들이 어째서 아무런 근거도 해명도 없이 이 런 기사를 세계로 뿌리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계 구석구석에서는 가지각색의 분쟁으로 각종 테러가 무수하 게 일어난다. 그 중 매스콤을 타는 것은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그런 많고 많은 테러들 대부분은, 세계는 하나란 견지에서는 일어나지 않아야 마땅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테러라도 반드 시 저질러야 잠을 잘 수 있는 소수의 무리들이 없진 않다. 그들 을 말끔히 청소할 수 있다면 청소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고한 인명을 사제폭탄으로 앗아가는 그들의 파렴치한 테러행 위는 세계인의 눈에 악랄하게 비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세계 인의 눈이 갖는 맹점은, 그 보다 더 악랄한 행위에 무감각하고 무식하다는 것이 문제다. 지배를 위해 민족을 가리지 않고 학살한다거나, 사제 폭탄이 아닌 비행기로 폭격을 해서 사람들을 죽이면, 이상하게도, 세계 인의 눈엔 테러처럼 비쳐지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그런 보도를 접하는 제 삼자들은 한 귀로 듣고 흘리고 마는 것이 보통인 것 같다. 그런데, 비행기를 동원할 수 없는 약자가 사제폭탄을 터뜨려 사람을 죽인 기사에는 어째서 눈들이 그렇게 쏠려야 하는지... 아마도, 영화나 소설속의 스릴 비슷한 것 때문에, 비행기 폭격 보다는 각종 테러에 세계인들의 관심이 더 기울어지는 지도 모르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욕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욕할 대상을 분명히 골라 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시대의 매스콤이란 것은, 어떤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 그것 은 대중에게 가장 가까이 붙어서 대중의 사고와 언행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매스콤 을 다루는 사람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대 중의 흐름을 선도하는 입장에 서고만다. 그런만큼 책임과 사명의 식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다수인 대중은 대부분의 정보를 매스 콤에 의지하고 있다. 그들에게 욕할 대상과 상 받을 대상을 옳바 르게 가르쳐 주는 것이 매스콤을 다루는 사람들의 사명중에 하나 일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8) 앙코르, 카오마의 람바다 파리 노보텔에 머물면서 아침식사는 주로 일층의 부페를 이용 했다. 식사를 끝내면 파리 시내를 구경하기도 하고 교외로 빠져 나가 파리 시외를 둘러 보는 것으로 소일했다. 숙소를 노보텔로 잡은 것은 이 호텔이 대한항공 승무원들이 머 무는 호텔이어서 였다. 휴가라면 휴가랄 수 있는 한가한 나날들 을 나는 한 여인을 기다리며 보내고 있었다. 단발머리의 최 현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초에 승무원이 된 그녀에게는 이번 비행이 파리의 초행길 일테고, 이곳에서 나는 그녀와 좀 더 가까와 질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이 일고 있었다. 현 주는 아름다운 여인이어서 취하고 싶고, 속이 곱고 부드러워 보 여 사랑도 나누고 싶은 여인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이빨 빠진 늑대였다. 가슴 밑바닥에 메마르게 갈 라진 상처들이 너무 크게 찢어져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킬러란 푸르스름한 직업이 전염시킨 인간애에 대한 허허로운 열등감이 여인에게 감정을 구할 용기를 언제나 냉각시켜 놓곤 했다.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아버지가 어렸을 때 실종되었고, 스 무살 청춘에 내 몸보다 사랑했던 여인들을 이십대에 모두 잃었 다. 그래서 나는 실연이 무척 아픈 것이란 것을 진하게 배웠고, 또 그래서, 사랑이 무서워졌다. 삼십대를 시작하고 있는 나에게 가진 것이 있다면 총잡이란 직 업 뿐인데, 내가 걷고 있는 전사의 길이란, 총을 쏘며 다니는 길 이기도 하지만, 총을 맞을 수도 있는 길이다. 따라서,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새사랑`을 시작할 배짱이 없었다. 나는 총을 쏘는 것을 아직 두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것은 내가 총에 맞는 것이 그다지 겁나지 않아서인 것같다. 아마 도 삶에 애착을 갖을 적당한 이유가 나에게 없는 것이 나로 하여 금 확실한 총잡이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 에 무지개같은 여인의 사랑이 가슴에 꽂힌다면 나는 총잡이로서 의 기능도 잃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슴에 `새사랑`을 담 기를 꺼려해야 했다. 단발머리 최 현주에게는 다른 여인들과 구별되는 모호한 감정 의 여운이 돌고 있는 것 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 다고 그녀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이국 의 땅에서 같이 식사하고 구경하며 그녀의 발랄한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정도라면, 나는 파리의 휴일을 대단히 성공적으로 보내 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여인을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어째서 여인들의 꽁무니를 쫓느 냐?`고 어떤 이가 물을 수도 있겠다. `새사랑`에 빠져들 지는 못할 지라도, 세월따라 희미해져 가는 `헌사랑`이나마 새로 암기라도 하고 싶어서, 나는 여인들을 열심 히 따라다녔고 다니고 있다. 현주의 일정은 이곳에서 삼박 사일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 고 첫날과 마지막 날은 도착과 출발 준비로 여행에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두 째날 하루 정도가 그녀와 파리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하룻 동안의 그녀와의 관광을 위해서 나는 파리와 파리 교외의 이구석 저구석을 둘러보며 그녀와 가까와 질 수 있을만한 그럴듯 한 장소의 물색에 시간을 소비했다. 파리 중심의 시테 섬에는 유명한 노트르담 사원이 있다. 사원 안의 스테인드 그래스에 반사되는 촛불속에서 미사를 보았다. 물 론 신자는 아니었기에 관광이었을 뿐이었다. 에펠 탑의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사진찍기를 빼놓지 않는다. 에 펠 탑을 등지고 전방 백미터 쯤 앞에서 찍으면 전신과 에펠탑 꼭 대기까지 모두 사진안에 넣을 수 있어서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콩코드 광장에서 개선문으로 향하는 가로수 많은 대로가 샹젤 리제 거리다. 거리에는 피가로 신문사가 있고 푸조 자동차 회사 도 있지만, 사치스럽고 거만한 아름다움을 치마 아래로 뿌리고 다니는 여인들을 오가게 만드는 것은, 많은 의상실과 극장들 그 리고 나이트 크럽인 것 같았다. 샤를 쥬르당, 랑셀, 피에르 가르 뎅,롱셀, 마린 그리고 나이트 리도 등등... 이 거리의 포흐에트란 까페에서 65프랑을 내고 나폴레옹이란 이름의 케이크와 카페오레를 시켜먹었다. 먹을만 했다. 많은 비둘기 떼를 볼 수 있는 오페라 하우스의 대각선 맞은 편 에 우리나라의 삼풍 백화점과 내부가 흡사해 보이는 쁘렝땅 백화 점이 있다. 3층의 여성의류 매장에는 매장마다 두 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자신은 모델이라고 유창한 영어로 소개 를 했다. 모델이 왜 이런데서 물건을 파느냐고 하자, 그 아가씨 가 말하길, 파리는 패션의 도시고, 이 쁘렝땅 백화점에서는 2주 에 한 번씩 패션쇼가 열린다며, 그래서 모델이 많다고 한다. 쁘 렝땅의 모든 여성의류 매장에는 자기 뿐 아니라, 모델이 한 명씩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사실인지는 장담 못하겠다. 교외로 빠져 파리 근교의 사람사는 사는 모습들과 베르사이유, 샹티이, 퐁텐블로 등의 고성을 둘러보는 것으로 현주를 대접할 준비를 끝냈다. 삼월의 첫날이 시작되는 이제, 곧 들이닥칠 대한항공 떼꺼지 여인네들을 기다리며 호텔 앞에서 어정거리고 있었다. 호텔 정면 의 지하도 근처를 오가며 호텔 모퉁이의 과일 좌판대에서 쌀쌀한 아침 공기를 호흡하고 있을 즈음, 허연 색 20인승 픽업 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마다 묵직한 트렁크를 가녀리게 들고 선 푸른색 제복 의 여인들을 바라보는 것이 파리에서의 가장 큰 낙이라면 낙이었 다. 고향의 여인들이 주는 향수라고 하기에는 지금의 나에게는 어색하겠지만, 그 비슷한 어쩔 수 없는 짜릿함이 아침마다 이곳 을 서성이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고 있었다. 고향의 여인들이 호텔 정문을 밀치고 오른쪽 로비에서 첵크 인을 끝내고 정면의 부페 식당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나는 여인들의 꽁무니를 배회 하며 그녀들이 공중을 스치며 남겨 놓은 오묘한 향수 냄새를 들 어 마시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래선 안될 것 같았다. 푸른 제복 사이로 현주 가 보였다. 푸른 소매 깃 아래 약간 노출된 새하얀 손목과 검정 구두위의 매끄럽게 뻗은 종아리로 큰짐을 나긋하게 운반하는 이 창공의 선녀에게 나는 잠시 넋을 빼앗겼다. 검정색 더블마이 속의 넥타이를 바로 잡으며 나는 먼저 부페 식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이미 그녀들이 앉을 장소를 알고 있었고, 현주를 아는 척해야 할 적당한 시점에 다다 를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염두를 굴렸다. 섬세한 향수 냄새가 코 끝을 자극하면서 여인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앉았다. 그녀들은 나에게 있어 무대위의 여우들이었지만, 나 또한 그녀들의 무대위에 늑대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고향의 남자니까... 나는 고개를 들고 현주와 눈을 맞추었다. 나는,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잔잔한 시선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붙잡아 두었고, 그 녀는 어이없고 진기한 표정이 되어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 다. 주섬주섬 일어나, 현주 주위의 여인들에게 희죽여주면서 현주 옆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친한 척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반말로 밀고 나갔다. "이런데서 볼 줄은 몰랐다. 무척 반갑다." 현주의 볼에서는 쌀쌀한 반가움이 보이는 듯했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놀러왔어..." 빈들거리며 서 있는 내 모습이 조금 안 쓰러웠는지, 현주 옆에 앉아 있던 길쭉한 스튜어디스양이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여기 앉으세요." "고맙습니다." 앞 쪽의 사무장이 약간 거슬렸지만, 비쩍 마른 얼굴에 인상좋 은 미소를 보여주고 있어 상황이 그런대로 순탄해 보였다. 동료들 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현주는 별로 쑥스러워 하 지 않는 듯 했다. 너무 먼 곳에서 나타난 고국의 사내였기 때문 인 것 같았다. "혼자 놀러 오셨어요?" "응." "혹시 신혼여행 오신 것 아니세요?" "이런... 아니야. 혼자왔어." "난 2층에 묶고 있는데, 현주는?" "저도 2층이예요." "음 확실히 너하고 나는 인연이 있나보다. 사촌 동생 이름이 은영이었던가?" "네." "그날 은영이네 집에서 포카칠 적에 내 손바닥 안에 쥐어져 있 던 히든 카드가 행운의 하트 에이스 였지. 오늘 그 덕을 보는 것 같다. 이따가 시내 구경 시켜줄께." "여기지리 잘 아세요." "온지 며칠 돼서, 그런대로..." "이따가 언니들하고 나갈건데요." "내가 안내해주지, 머... 이런데서 나긋나긋한 동네 아가씨들 안내야, 돈주고도 못 하는 거잖아." "아직도, 그 늑대 근성은 여전하시군요." 테이블위에 셋 업된 칼이며 포크를 내려다 보고 말했다. "뭐 좋아해. 내가 집어다 줄께." "아니예요. 제가 다녀올꺼예요." 고운 여체를 뽑아 세우며 몸을 일으키는 현주에게 제안을 했 다. "내 자리에 가서 먹자? 다른 아가씨들도 봐 줄꺼야. 여긴 이국 의 정취가 물씬 거리는 파리잖아. 그리고 우린 사이좋은 남녀 고..." 고개를 든 현주는, 서늘하지만 산뜻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 보 았다. 어쩌면 성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 만 빗나갔다. "꿈 깨세요." 빙그레 웃으며 돌아서는 현주의 등을 뒤따라 붙으며, 접시 테 이블을 지나친 현주를 위해서 재빠르게 접시를 집어주고 다시 소 곤거렸다. "이따가 시내 구경한 다음에 저녁도 같이 먹자. 상젤리제 거리 의 노오란 가로등 불빛은 어머니의 살결처럼 포근하게 느껴지던 데... 혼자 나오기 껄끄러우면 언니들하고 같이 나와도 괜찮아. 물론, 난, 현주 혼자 나오는 것이 훨씬 좋겠지만 말야... 룸 넘 버 좀 갈켜 줘." 집게로 튀김 새우를 접시에 옮겨 놓던 현주가 조그맣게 대답해 주었다. "207호예요." 서울에서 부터 12시간 동안 날아온 현주가 낮잠으로 피로를 풀 수 있도록, 배려해야 했다. "오후 네 시에 방문을 두드릴께. 시계는 잘 맞췄지?" 현주는 `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네." 오전내내 노보텔 꼭대기 층에서 수영을 했다. 늘씬하기도 하고 뚱뚱하기도 한 서양여인들과 가슴 팍에 누런 털들이 보송거리는 서양 남정네들 사이에서 물을 가르기도 하고 수면에 드러누워 둥 글게 보이는 천장도 바라보았다. 물길을 타고 나가며 폼을 잡을 땐 역시 버터 플라이였다. 호기심 깃는 노란머리 아가씨가 내 몸을 흘깃거리는 것이 심상 치 않아 보였지만, 이번엔 참기로 했다. 조금 이따 만날 고국의 여인을 위한 배려라고나 할까... 룸으로 돌아와 욕조에 더운 물을 받아넣고 두 어시간 동안 땀 을 뽑아냈다. 손바닥이 쭈글거리며 불어 있었다. 다시 찬물로 샤 워를 하며, 노곤해진 육체에 생기를 넣었다. 머리가 맑아오고 몸 속의 찌꺼기를 몽땅 배출한 신선함이 느껴졌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드라이로 머리를 매만졌 다.왼쪽에 가름마를 가르고 비스듬한 물결을 잡았다. 손가락으로 앞 머리 한 귀퉁이를 잡아내려 오른쪽 이마를 비스듬이 가리고 앞머리의 군데군데를 삐쭉거리게 했다. 앞이 터지지 않은 초록색 삼각 팬티로 수북한 곳을 깔끔하게 가리고,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상체에 곤색 실크 와이를 입었 다. 축축하게 젖은 몸에 덮여지는 실크의 감각을 나는 좋아한다. 검정 바지를 피에르 가르뎅 혁띠로 채우고 무늬 없는 상아색 타 이를 매었다. 에메랄드가 박힌 던힐 타이 핀으로 넥타이를 고정 시키고 런던 버버리에서 주문 제작된 식스버튼 더블 마이의 단추 를 채우자, 던힐 타이핀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웬지, 오늘 은 예뻐 보인다는 생각에 실소가 흘러 나왔다. 검정색 세무신발 을 신고 거울앞에 다시 똑바로 섰다. 빠진 것은 없었다. 다만 입술이 약간 메말라 보이는 것이 만족 스럽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꺼낸 백포도주 무스카테파프로 입술 을 적셨다. 이제 다 되었고 오후 네 시였다. 붉은 색 카페트가 깔린 복도를 따라 207호를 두드렸다. 아침 부페에서 자리를 양보해 준 길쭉한 아가씨가 현주대신 문을 빼꼼 이 열어 주었다. "아! 오셨군요. 오분만 기다리시겠어요. 현주가 약간 준비가 덜 되었나봐요." 문틈으로 왱왱거리는 드리이기의 소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지요. 근데, 같이 안나가시나요?" "아뇨. 전 되었어요. 괜히 끼어들어서 눈총받고 싶지 않아요." "저런 같이 나오셔도 되는데... 하지만, 잘 생각하셨네요." 길쭉한 아가씨의 눈썹이 약간 모아지며 샐쭉거렸다. "그렇게 얄밉게 말씀하시면 따라 나가는 수가 있어요." "얄밉다니요? 나오지 않으시면, 도라야 살롱의 과자를 사다드 릴 생각이었거든요." "도라야 살롱의 과자요? 그게 먼가요?" "일본과자인데, 맛이 아주 그만이죠." "따라가서 얻어먹으면 안되나요?" "따라 오시면 거기 안가죠." "그럼 어디가는데요?" "히흐마에 데리고 가죠." "거긴 뭐하는 곳인데요?" "오페라 극장 근처에 있는 라면가게죠." "키키... 따라가지 않기로 한 것이 정말 잘 생각한거로군요." "그럴껍니다." "현주 나오네요." 발목으로 좁아지는 코코아색 면바지에 바둑 무늬의 버버리 구 두가 구색을 맞추고 있었지만 진짜일 것 같지는 않았다. 초록색 폴로티 그리고, 수수한 멸치색 잠바차림였다. 유행에 그런대로 들어 맞고 있는 것은 짤막하게 줄이 접힌 검정색 샤넬가방이었지 만, 금빛으로 코팅된 구슬이 사각으로 군데군데 박힌 것으로 미 루어 역시 오리지널은 아닌 듯 싶었다. 그녀를 둘러 싼 천들의 고향은 남싸롱(남대문 시장)이나 동싸롱(동대문 시장)이 틀림없 을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주는 파리에서 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와 보였 다. 계단을 내려가서 호텔문을 열고 나갈때까지, 나는 우쭐한 만 족감에 빠질 수 있었다. 더블마이 안쪽의 에메랄드 넥타이 핀보 다 옆에서 나란히 걸어주고 있는 현주의 메루치색 잠바가 날 기 분좋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남성이 바라보는 여인의 아름다움은, 천의 질이나 바느질 솜씨 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여인 그 자체에서 우러 나온다는 사실 을, 옆에서 걷고 있는 여인을 통해 또 한 번 경험하고 있는 듯 했다. 22프랑을 내고 개선문에 오르는 에리베이터를 태워 주었고, 상 제라아 거리를 따라내려오다 좌측으로 꺽어 오페라광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현주를 쁘렝땅 백화점으로 데려갔다. 옷을 사주기 위해 3층으로 데려갔으나, 현주는 갖고 싶어하긴 했지만, 내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층에서 보라색 머리 띠 하나만을 간신히 사줄수 있었다. "왜 여권을 확인 시키지 않았죠?" 벼룩 시장으로 옮겨가면서 현주가 따졌다. "120프랑짜리 머리핀 하나 사면서 면세 하겠다고 하면 매장 아 가씨 한테 염치가 없잖아." "그래두..." 현주는, 벼룩 시장에 들리기 전에 쁘렝땅 맞은 편의 루비똥에 들려 친구의 심부름이라며 지갑을 샀고, 벼룩시장에서 레코드 판 두어 개를 샀다. 역시 나는 돈을 내주지 못했다. 쇼핑을 마치고, 시내를 돌다가 정통 프랑스 식당 줄리앙에 들 어갔다. 벽난로가 설치된 사방의 돌벽에는 커다란 그림들이 걸려져 있 었고, 둥글게 휘어진 창밖으로는 연못으로 떨어지는 이단 폭포가 고급스런 분위기를 자아내 주고 있었다. 깨끗한 테이블 보가 덮 여진 둥근 테이블과 등받이가 호리병 모양으로 요란하게 휘어진 둥근의자가 요소요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좌석마다 다른 각도에 서 실내, 외의 화려함을 음미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얼떨떨해 하는 현주에게 의자를 뽑아주며 말했다. "앉아." "여긴 무지 비싸겠어요." "별로 비싸지 않아." 때마침 다가온 정장차림의 나비넥타이에게 `쎄`코스를 주문했 다. 식사 전에 나온 와인을 코 끝으로 음미하자, 현주가 따라했지 만 어색했다. "크크크..." "왜 웃어요?" "아니야 현주가 너무 이뻐서 좋아서 그래." "치! 그래요. 난 이런데 못 와봤어요." "나도 여긴 처음이야. 여기가 좋다고 하는 말을 호텔 지배인에 게 들어서 이리로 와 봤어. 나까지 기죽으면 다른 테이블에서 깔 볼까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이런데선 폼 잡다가 실수하는 사람은 흉보지만, 막 먹는 사람에게는 흉보 지 않아. 그러니 음식 나오면 씩씩하게 먹어." 현주를 안심시키긴 했지만, 걱정은 좀 되었다. 애피타이져(식사전 입 맛을 돋구기 위해 나오는 간단한 음식) 로 에스카고(달팽이)와 딱딱하게 구운 소다빵이 나왔다. 식탁에 놓인 에스카고 홀더(달팽이집을 집는 집게)를 집어들 고, 현주가 잘 볼 수 있도록 천천히 달팽이를 집고 속살을 파내 어 현주의 입에 넣어 주었다. 충동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한 현주 의 입술이 벌어졌고 달팽이 살은 현주의 입속에서 오물거려졌다. "맛있는데요." 아직도 홀더에 잡혀있는 달팽이 집을 마른 소다 빵위에 가져다 놓고, 달팽이 집 속의 국물을 빵위에 흘렸다. 다시 현주의 입술이 열려지고 빵 한조각이 그녀의 입속으로 사 라졌다. "이것도 맛있어요. 오빠는 직업이 요리사이신가 봐요. 아니면, 이런 식당 지배인이거나..." 그냥 웃었다. "크크크... 아무렇게나 생각해라. 이번에는 네가 집어줘 봐." "난 잘 못할 것 같아요. 오빠가 한 번만 더 시범을 보여 주세 요." 삐딱하게 뽑아낸 달팽이 살 한조각을 간신히 얻어먹고, 주식으 로 나온 오리고기는 마구잡이로 찢어 먹었다. 입가의 기름기를 무릎위에 얹어놓았던 행주로 닦으며 현주에게 물었다. "한 군데 더 데리고 가고 싶은데..." "그러세요." 고국에서 받았던 가정교육과 염치없는 유혹에 대한 경고를 이 국의 하늘 밑에서 만난 고향의 사내앞에서는 지키기 어려웠을 것 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분고분하게 대답해 주는 현주에게서 부드 럽고 따뜻한 동포애를 느끼고 있다면 거짓말 같을까? 콩코르드 광장 근처의 잔다르크 상을 지나니, 젊은이들의 행렬 이 늘어져 있었다. 유럽 최대의 디스코 테크 `라 스칼라`로 들어 가는 행렬이었다. 새치기를 하지 않고 입장을 했다. 1층에는 커다란 비데오 스크린이 있고, 3층까지 되어 있는데, 2층에는 스테이지와는 별도로 무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가는 날 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라 스칼라`의 개관 기념일이었나 보다. 연중 행사로 치러지는 개관 기념 스페셜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 고 있었다. 1, 3층에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북적거리는 관계로 2 층의 기념 스페셜을 보아야 했다. 특별히 좌석이 정리된 이곳은 평소와는 다르게 비싼 술만을 팔고 있는 덕에 괜찮은 자리에 앉 을 수 있었다. 이태리인 사회자가 나와 워커힐 쇼 비슷한 무희들의 춤을 소개 했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희극배우들이 요란한 음악에 맞추어 걸 레같은 몸트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도 나가서 추자." 스테이지에 나가 현주와 마주 본 채로 춤을 추었다. 한국의 나이트에서 추던, 팔다리를 근소하게 움직이며 꼬물거 리고 추는, 분위기만 잡는 제비춤을 추었다. 현주 역시, 이쁘게 만 보이려는 몸짓으로 동양여자의 얌전한 맛만을 간직하고 추었 다. 요란한 음악 때문에 현주의 귀에 입술을 대다시피 하고 말했 다. "현주 춤 이쁘게 추네." 현주도 비슷한 자세로 대답해 주었다. "오빤 멋있게 추는데요." 나 혼자서 중얼거렸다. "멋있기도 하겠다..." 갑자기 음악이 중단되어 스테이지에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 앉 았다. 이태리인 사회자가 나와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소개한다고 했다. 불어로 주절거리는 개관 기념 하이라이트는, 한 무용수와 춤을 가장 멋있게 추는 손님에게 만달러의 상금을 주겠다는 것이 었다. 조명이 스테이지 위에 쏟아지면서 스테이지위로 무용수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발목에는 금발찌를 채웠고, 매끈하고 까무잡잡하게 쭉 뻗은 하 체에는 붉은색 주름 똥고 치마만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엉덩이 를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상의는 가슴이 파인 노란색 나시 배꼽 티를 입고 있었다. 팔목에는 발목의 발찌와 비슷한 팔찌를 하고 있었다. 목에도 역시 목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금목걸이가 아닌 이빨 모양의 상아색 뼈가 매달린 목거리였다. 허리의 붉은 색 치마끈 한 가닥이 여인의 움직임에 따라 바깥 쪽 허벅지를 스치며 흔들리는 모습이 매우 선정적이었다. 서양여인에 비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탄력이 흐르는 그녀의 쵸코렛 색 피부와 어우러져, 남미 혈통의 미인임을 보여주고 있 었다. 스테이지 옆에 마련된 심사위원 석에서 몇 사람이 일어났다가 앉으며 이태리인 사회자를 통해 소개 되었다. 마지막으로 스테이 지 위의 무용수를 소개했다. 이태리인 사회자는 그녀의 이름을 `루지아나`라고 소개했다. 음악은 카오마의 람바다였다. "따~ 다~다 다다다 다다다다다. 둥두두둥두 둥두두둥두" 몇 사람의 지원자가 여인에게 매달리려고만 하다가 시작과 동 시에 실격 당하곤 했다. 음악은 여러번 반복되고 있었지만, 곡이 끝날 때까지 실격 되 지 않은 사람은 두어 명밖에 없었다. "오빠도 한 번 추어 보지 그러세요?" 골똘하게 람바다의 여자 무용수를 쳐다보고 있는 내 모습이 언 짢았는지, 현주가 거듭 쑤석거렸다. "그렇게 뜸어져라 쳐다보는 것보다는 나가서 한 번 안고 돌아 보는 것이 낫지 않나요?" 이건 정말 우연이었다. 스테이지 위에서 춤을 추고있는 여인의 이름은 루지아나가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사벧 토바리나` 였다. 파나마인 남자와 호주 부시우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 다. 슬럼브흐란 다국적 기업의 엔지니어로 호주 정글에 가서 석 유를 파고 있었을 당시, 그녀와 나는 상당히 친밀한 사이였다. "현주야, 내가 나가면 몇 등쯤 하겠니?" "글쎄요. 실격만 안 당해도 대단한 것이겠는데요. 한번 나가 보실려구요? 오빠 춤 잘 춘다는 소린 들은 적 있어요. 박 현주 한테서..." "일등하면 현주가 뽀뽀해주겠다고 약속하면, 나가지." "일등하면요?" "응. 이등 말고 일등." 잠시 망설이던 현주가 와인 몇잔에 용기를 얻었는지 승락했다. "좋아요." 스테이지 위에서 또 한 명의 실격자가 내려왔을 때, 나는 스테 이지 위로 걸어 나갔다. 기실, 나는 람바다를 이 여인에게 배웠다. 토바리나가 스테이지위에 올라가기도 전에 내 모습을 알아 보 았다. "꾸시(다정한 친구란 의미의 부시어), 칸(`한` 발음을 `칸`에 가깝게 발음한다.)..." "꾸시, 토바리나..." 검정 더블마이를 벗어놓고 실크 와이의 팔목 단추를 풀러 옷깃 을 팔굼치 위로 바짝 걷어올렸다. 검정색 실크 와이의 중심에서 에메랄드 타이핀이 조명에 반짝 이고 있었다. 심사 위원석에서 준비한 푸른색 띠를 허리에 둘렀고, 이마엔 붉은 띠를 매었다. 토바리나의 오른 팔목을 왼손으로 올려 잡고 오른 손을 그녀의 왼쪽 허리에 가만하게 얹어놓았다." "둥두두둥두,,따~ 다~ 다다다..." 음악이 흐르고 몸에 흐름이 젖어 들었다. 양쪽 엄지 발가락을 안쪽으로 번갈아 찍어 대었다. 무릎과 허리는 엄지 발가락이 인도하는 흐름에 따라 활처럼 휘 어지며 유연한 곡선을 만든다. 똑바로 곧추선 뱀이 허공에서 흐느적거리 듯, 부드러운 곡선을 흐트러뜨리지 않은채 여인은 전진만을 사내는 후진만을 하면서 돌아야 `람바다`다. 여인의 공격적인 허벅지가 가랭이 사이로 쳐올라 오고 있었다. 붉은 색 주름치마가 펼쳐지고 휘돌며 흘깃흘깃 드러나는 여인 의 엉덩이에서 사내의 복부는 원초적인 충동이 솟구치지만, 여인 의 매끄러운 부위들을 아슬아슬하게 비끼며 후퇴와 회전만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인내한다. 밀착되어 오는 여인의 물결치는 가슴에서 아찔함을 보았지만 사내는 여전히 물러난다. 여인은 계속적으로 부대껴 오고 달콤한 숨결로 사내를 어지럽 히지만, 사내는 용케도 간신히 간신히 피하고 있다. 탄력이 흐르며 흐느적거리는 여인의 길고 가녀린 팔에서, 다리 에서 가슴에서 정열이 흐르고 있고, 사내의 콧날과 근육과 유연 한 율동에 욕망이 진득하게 배어 있지만, 뜨거운 정열과 치솟는 욕구를 안타까운 숨결 하나로 달랜다. 스테이지 위에서는 오리지널 람바다가 춤을 추고 있었다. 한쪽 팔목과 허리 위에 얹어 놓은 손길만이 접촉의 전부여야 하며 오로지 몸에서 발산되는 열기와 숨결만으로 아슬아슬한 정 을 통하는 오리지널 람바다의 진수였다. 더티댄싱의 더티한 면이 보이질 않고 플래쉬 댄스의 허전함이 없는 절정의 율동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춤을 예전에도 춘 적이 있었다. 음악은 지금과 똑같은 카오마의 람바다였고, 공격해 오던 여인 도 지금의 이사벧 토바리나 였다. 다만, 여인은 붉은색 주름치마 대신 풀잎으로 만든 똥꼬치마를 입었고, 금발찌 금팔찌 대신 조개로 만든 발찌와 팔찌를 차고 있 었다. 사내도 차림새는 달랐다. 검정 실크 와이 대신 겨드랑이 까지 푹 파이는 하얀 티를 입었고, 검정바지 대신, 하얀 바지에 가죽 신을 신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여인의 목에 걸린 악어 이빨 목걸이였다. 서퍼스 파라다이스, 호주의 황금빛 동해안에서, 석양이 만드는 노을 아래서, 우린 춤을 추었다. 넘실 거리는 금빛 물결과, 금빛 모래, 그리고 초록색 야자수 아래에서, 우린 람바다를 추었었다. 음악이 끝나자, 정적과 바로 이어진 요란한 박수소리가 홀 전 체를 메웠다.. 더 이상의 지원자는 없었다. 대신, 앵콜 `카오마 의 람바다`가 다시 한번 `라 스칼라`의 스테이지를 누볐을 뿐이 었다. 테이블에 돌아와 앉자, 현주가 빈잔에 와인을 한가득 채워주며 말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춤이었어요. 아니, 영화에서도 그런 것은 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너무 멋있었어요. 그런 춤은 어디 에서 배웠나요?" 현주의 칭찬을 들으며 꼬우레헤(프랑스 담배이름) 한 개피를 뽑아 허공에 연기를 만들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쓸어내고 대답했다. "현주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땀 흘린 보람이 있네. 거울 앞에 서 음악 틀어 놓고 배웠지." 현주가 약간 풀이 죽은 목소리로 씁쓰레한 여운을 남기며 다시 물었다. "참 부럽군요. 인생을 재미있게만 사시는 것 같아요. 파리에도 놀러 오신 것이라고 하셨죠? " "응." 현주와 두런 거리는 동안, 무대뒤로 들어갔던 토바리나가 까운 을 걸치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인사해. 토바리나, 여긴 최 현주라고 해. 고향의 여인이지." 토바리나가 현주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하이!" 현주도 따라서 간단한 영어 인사말을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토바리나." 토바리나는 외항선박 일등 항해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까지 오게 되었다고 설명했고, 현주가 애인인지 궁금해했다. "아직 애인은 아니고 애인으로 만들려고 열심히 따라다니는 중 이야." 호주 정글속의 토바리나는 부시맨 중에 영어를 알던 몇 안 되 는 여인이었고, 그 곳에서 리깅(천연가스를 뽑기 위해 구멍파는 작업)작업을 하던 나와 친숙해 졌었다. 숲 속에서 그녀와 금지된 사냥을 하면서 고기를 구워 먹었고, 해변가에서 춤을 추었다. 둘 사이에 감정의 씨앗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하긴 어렵겠지만, 몇 년 세월은 상대방을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칸(한)`의 나라 여인들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예요. 정말 아름답군요. 당신네 나라 남성들은 모두 행복하실 것 같아 요. 그렇죠?" 토바리나가 현주를 흘깃거리며 영어로 쑥덕이자, 잘 알아듣지 못하는 현주가 물었다. "뭐라고 이야기 하는 건가요?" "현주보고 미인이라고 하면서, 우리나라 여인들은 모두 현주처 럼 아름답게 생겼냐고 물었어." 현주가 고개를 조금 숙이며 토바리나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며 나를 다그쳤다. "어서 그렇다고 대답하세요." 나는 약간의 실소와 더불어 토바리나에게 대답해 주었다. "크크...맞아. 토바리나, 우리나라 남성들은 모두 행복해." 토바리나와의 우연한 만남을 잔잔한 아쉬움으로 마감하고, 현 주를 데리고 `라 스칼라`를 빠져 나왔다. 노보텔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현주에게 내일의 관광도 허락 받 을 수 있었다. (9) 베르사이유의 호숫가. 룸에 들어서자 마자, 호텔 프런트에서 넘겨받은 메모대로 다이 알을 돌렸다. - xxx-02-6519800 - 중동 제다의 하야트 레이젼시 호텔이었다. "403 호실 연결을 부탁합니다." 잠시 후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로우..."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기석입니다. 호텔에 메모를 남겨 두셨더군요." "그래. 파리에선 잘 지내니?" "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읍니다만." 일에 관계 된 일을 아버지가 직접 연락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 던 일이라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발생했읍니까? 직접 연락을 하시고..." 내 목소리에 담긴 긴장감을 눈치채었는지, 아버지가 김 빼는 웃음을 흘리면서 편안한 분위기로 몰고갔다. "헛헛헛! 아니다. 별 일은 아니야. 그냥, 조금 한가해져서, 작 년에 고향에 다녀왔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연락한 거야." "고향이라면 예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하! 그래. 예산에도 다녀왔고, 여기저기 둘러보며 어렸을 때 가까왔던 사람도 몇 명 만나고 왔었다." 아버지의 고향 방문을 들으며,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 의 나이가 떠올랐다. 거칠고 험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고향 을 언급할 때 대부분 그렇하듯, 아버지의 음성에는 말년의 고향 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담고 있는 듯 했다. "선산의 나무들이 많이 베어져 있더구나. 웅덩이 물도 옛날 같 이 맑지가 않아서인지, 그동안 흐른 세월이 혼탁하게만 느껴지더 구나." "그건 세월이 혼탁하게 흘러서가 아니고 작은 아버지가 농장을 해서 그래요. 언제 기회가 되면 나무를 갖다 심겠읍니다." "굳이 그럴 것은 없고... 참 영숙이 아버지도 만나 보았다. 나 에겐 외삼촌 뻘이지만, 어린 시절에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 지..." 영숙이란 이름에서 심난한 감정이 일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 었다. "건강하시던가요?" "그래. 건강한 것 같더라. 영숙이가 딸을 낳았다고 하더구나." "저도 알고 있읍니다." "그래. 네가 영숙이 일을 모를 리는 없겠지." "아닙니다. 일부러 안 것은 아니었고, 우연한 기회에 영숙이 친구에게서 들었읍니다." 잠시 말을 멈춘 아버지가 약간 추스린 목소리로 말했다. "작년에 고향에 다녀 오면서, 네 일을 도와줄 사람을 한 명 구 했다. 몇 가지 기초 훈련을 시켰고, 지금 파리에 머물고 있다." "제 일을 도와줄 사람이요? 저는 지금 있는 동료들로 충분합니 다만..." "아니야. 그 쪽 바람도 잔바람으로 무시만 하기에는 심상치 않 아. 어려운 일에 둘러 쌓여 있을 때, 적절히 몸을 빼낼 수 있도 록,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겠어." "제가 자란 곳인데, 급하면 어디로든 빠져나가지 못하겠읍니 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니야. 도움 받을 수 있는 곳은 많을수록 좋아. 더우기, 너 를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조력자는, 평생동안, 몇 명 만나기가 힘들단다. 너나 네 동료들이 위급할 때 도피처를 마련 해 줄 것이고, 부상당했을 경우 치료도 맡아줄 수 있는 사람이니 까, 무조건 내 말대로 따르거라. 명령이다." "알겠읍니다. 따르기는 하겠읍니다만, 그 사람에게 어떤 대접 을 해주어야 합니까?" "시니어 급으로 대우해 주거라." 나는 잠시 기가 막혔다. "네에? 쥬니어도 아니고 시니어라면 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 지 않습니까?" 회사의 시니어급이란 비록 내가 명령은 할 수 있어도, 나에겐 과외선생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거취를 함부로 할 수 없고, 그들의 조언이나 잔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고, 그들의 배치나 대 우는 중동의 본사에서 결정한다. "많지도 않은 시니어를 저 있는 곳으로 너무 꾸역꾸역 보내시 는 것 아닙니까? 저 있는 곳보다는 아버지 계신 곳에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일텐데요?" "허허! 아까도 언급했지만, 중동의 시니어가 아니라 고향에 다 녀 오면서 남한에서 구한 사람이야. 나이도 너보다 어리고 여자 야." 한동안 어이가 없어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시니어란 일반 기업으로 말하자면 이사급이나 마찬가지 였다. 아니 오히려, 그 보다 조건이 훨씬 까다로운 지위였다. 설사 아버지라고 해도, 고 향에서 만난 인연 정도 가지고, 이런 일에 익숙치 않은 사람을 시니어란 위치에 가져다 앉힐 수는 없었다. 아들인 나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현장업무를 치르고 나서야 겨우 인정받은 자리였 다. 게다가 나보다 나이어린 여자 시니어란 상상하기에도 어려운 사건이었다. "중동의 아저씨들이 인정했을 리가 없을텐데요." "이쪽 사람들은 이미 인정했다." "도대체 누가 그런 황당한 대접을 받게 되는 겁니까? 혹시 저 몰래 숨겨놓은 딸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버지가 대답했다. "딸은 아니고... 어쩽든, 너나 그곳의 동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아가씨야. 그 아이를 시니어로 추천했던 이유는 누구 보다도 믿을 수 있는 아이고, 차기에 회사를 이끌어 갈 너를 헌 신적으로 보살필 수 있는 여자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지." "단지 저와 이곳 동료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필 수 있다는 이유 만으로 중동의 아저씨들이 나이어린 여자를 시니어로 인정했을 리는 없잖읍니까?" "글쎄... 그것으로 추천을 해 볼 수는 있었지. 그 아이는 의과 대학을 졸업했고 의사자격증을 땄어. 인턴 일년 레지던트 일년을 거친 외과의사였지.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그 아이를 시니어로 인정한 것은, 그 아이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남자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훈련에서 끔찍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의지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야. 여자 아이라서, 전사로서의 자질을 기대할 수 는 없었지만, 성적이 나쁘진 않았다. 제 몸 하나는 어디에서든 지킬 수 있는 아이야." "제 몸 하나 지킬 수 있다고 시니어 대접을 해주라는 것은 납 득이 가질 않습니다." "그 아이의 역할은 전사로서의 역할이 아니야. 차기 보스인 널 돌보고 다스리는 역할이야. 그래서 시니어야." "절 다스리는 시니어라니, 제일 무서운 시니어겠군요. 어떤 아 가씨인지 한 번 보고싶습니다." "내일은 뭐 할 생각이냐?" "관광을 할 생각입니다. 베리사이유 궁전을 돌아볼까 합니다." "혼자서?" "아닙니다. 동행이 있읍니다." "여자냐?" "네. 아주 예쁜 여자입니다. 대한항공 스튜어디스인데, 고향의 여자죠." "그거 아주 잘 되었구나. 내일 베르사이유 호숫가에서 그 아이 를 만나거라. 그 아이도 고향의 여자니까, 잘 하면 여복이 터지 겠구나." "그래도 될까요?" "너하기 나름이지. 근데, 대한항공 아가씨는 누구니?" "최 현주라고 합니다. 예전의 현주하고 많이 닮았읍니다." "서로 깊이 빠져 있는 사이냐?" "그렇진 않습니다. 제가 따라다니고 있은데, 약간 고전하고 있 읍니다." 가벼운 대화가 이어지던 중, 아버지가 뒤통수에 쇠망치가 떨어 지는 소리를 했다. "영옥이가 쉽지는 않겠구나..." "영옥이라뇨? 영숙이 동생 영옥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그럼 저를 다스릴 시니어로 온다는 계집애가 바로 영옥이었읍 니까?" "그렇다." 영숙이 동생 영옥이... 현주와 영숙사이를 낱낱히 적어 영숙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고, 깨알같이 적은 그녀의 다섯 장의 편 지가 현주와 영숙을 데리고 중동으로 나르려는 내 꿈을 조각낸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편지질을 현주가 보낸 것으로 오해했던 나는 현주를 냉대했었고, 급기야는 냉대로 괴로워진 현 주는 그녀의 천주님에게로 영원히 가버렸다. 아버지의 돌발적인 짓에 나는 분노에 가까운 것이 치밀어 오르 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부자간이고, 아버지의 지시대로 움직이 고 있는 나였지만,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영옥이는 안됩니다. 저는 그녀에게 다시 보지 않겠다고 이야 기 한 적이 있읍니다." 잔뜩 부어오른 내 목소리에 아버지의 음성도 약간 가라앉았다. "영옥이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입에서 뱉은 말을 다 지키고 사는 사람은 없다. 네가 한 말에 너무 연연하지 말거라." "제가 뱉은 말이 문제가 아니라, 제 마음이 문제입니다. 저는 영옥이를 곁에 두고 일을 할 수는 없읍니다. 영숙이 동생만 아니 면, 전 쏠 수도 있읍니다." "영옥이는 영숙이 동생이기도 하지만 내 이종사촌이기도 하다. 너에게는 고모 뻘이지. 말을 함부로 하지마라. 그리고, 영옥이가 보낸 편지 몇 장으로 네가 네 인생을 그르쳤 다고 생각한다면 넌 그릇이 작은 놈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세상 에서 살아가다보면 본의 아니게 꼬이고 꼬여서, 뜻대로 일이 않 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날벼락 같은 일도 당할 수 있다. 그런 경 우에, 일이 잘못된 탓을 특정인에게 돌리는 것은 대단히 야비한 짓이다. 영숙이와 현주를 간수하지 못했던 것은 영옥의 편지질 때문이 이 아니라 너의 실책이었다. 네가 두 여인 사이에서 조금 더 조 심했더라면, 영숙은 지금쯤 네 아이를 낳았을 것이고, 현주 역시 네 곁에서 네 아이들을 돌보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영옥을 데려오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작 년에 리베라 호텔 객실에서 영옥의 아버지와 만났는데, 그 아이 가 따라나왔더구나. 너에 대한 거취를 집요하게 물었지. 그래서, 대충 중동의 엔지니어로 가 있다고 대답해 주었는데, 자신도 따 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려서 데려왔다." "따라오겠다고 한다고 이런 바닥에 여자아이를 끌어들이는 것 은 아버지답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안된다고 했고, 그래도 따라온다고 해서, 어림 없는 일이라고 영옥이 아버지와 함께 나무랬지. 그랬더니, 영옥 이가 천천히 일어나 8층객실 창문을 열고 창가에서 뛰어내리더구 나. 내가 달려가서 떨어지는 그 아이의 머리채를 휘어잡지 않았 으면, 그녀는 지금 온몸이 부서진 채로 땅속에 파 묻혀 있었을 거야. 다시, 영옥이에게 네가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해주며 설득해 보 았지만, 영옥이는 막무가내였다. 네가 무슨 일을 하던 옆에서 지 켜보며 돌볼 수 있게 해달라고 난리를 떠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레지던트 일년차였던 그 아이를 회사로 데리고 왔다. 무작정 데리고 온 것은 아니었고, 훈련을 감내할 수 있다면 너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고, 배겨내지 못하면, 너를 잊고 조용히 살 아야 하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나는 그녀의 훈련과정에 일절 개입하지 않은 채 지켜보기만 했 고, 시니어들이 맡아서 했는데, 그녀는 악착같이 달라붙어 웬만 한 주니어급 이상의 평가를 받았다. 그녀의 침대 곁에는 너와 영 숙과 현주 셋이서 찍은 사진이 있었고, 그녀의 품속에도 있었다. 아마,너희들, 특히 현주에게 대단한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내들도 버티기 힘든 체력 훈련에서 그녀는 낙오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훈련을 맡았던 시니어들도 그 녀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녀를 시니어로 인정하는 데 아무 도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시니어로 인정 받는데는 부족 함이 없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이 시니어들에 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이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여기는 중동이다. 영옥이는 너에게 고모뻘이고 나에 게는 이종사촌이지만, 나는 그애를 며느리로 생각할 수도 있는 곳이지. 뒷 일은 너에게 맡긴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잊혀지지 않는 영옥이긴 했지만, 떠올릴 때마다 싸늘한 괘씸함만이 치솟곤 했다. 물론, 내가 영옥을 곱게 보지 못하는 것은 영옥의 편지질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말 한마디면 풀릴 수 있는 오해로 현주를 끝까 지 못 살게 굴다가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 죄의식은, 나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그 죄의식을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전가 시키고 싶어, 영옥의 편지질에 갖다 부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나 자 신이 야비하게 느껴지곤 했지만, 그렇게라도 갖다 부쳐야 견딜 수가 있었다. "영옥이는 지금 어디에 있읍니까?" 껄끄로운 감정을 실어 묻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가 대답해 주 었다. 연륜이 배어 있는 듯한 낮고 거친 음성이었지만, 그 속에 서 아버지의 자상함도 느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영옥이는 파리 하야트에 머물고 있어. 내일 오전에 베르사이 유 궁전으로 보내겠다. 낮 12시쯤 프티 트리아농 정원에 있는 사 랑의 신전 앞에 가 보거라. 모쪼록 그 아이에게 잘 대해주기를 바란다." 아버지의 배려가 곤란하게만 여겨지고 있던 나로서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내일 낮 열두시에 신전 앞으로 가겠읍니다. 영옥이에게도 가 급적 잘 대해주겠읍니다. 저와 동료를 보살피는 시니어로서, 그 리고 아버지의 이종사촌으로서의 영옥이에게 섭섭함이 없도록 성 의껏 정성을 다해보겠읍니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것을 기대하 지는 마십시오. 더 당부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그만 들어가 보겠 읍니다." 아버지의 넉넉한 대답이 넉살처럼 귓 속을 파고 들었다. "그래. 인연이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 도, 나는 기대를 해 볼 것이고 너에게 영옥이를 부탁한다." "안녕히 계십쇼." 베르사이유, 마리 앙뜨와네트를 사랑했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만든 궁전, 호화로운 궁전 곳곳에 배인 화려함은 헐벗고 굻주린 서민들의 기름이 짜여져 문질러진 것이 었을테고, 잘 다듬어진 정원의 잔디는 고달픈 백성들의 눈물이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요염한 베르사이유였지만, 역사의 기록이 되어 후세 에 아름다운 유혹과 따끔한 충고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듯 했 다. 아지랭이가 봄 꿈을 피어올리는 푸른 잔디위에서는 아기가 뒹 굴고 있었고, 황금색 빛줄기가 나무사이로 쏘아져 내리며, 고동 색 나무 기둥 여기저기에서 싹터오르기 시작하는 잎새들을 비추 어 주고 있었다. 트리아농 숲 속의 곳곳에 오가는 자전거 하이킹 족들이 그들의 즐거운 젊음을 분수처럼 뿌리며 인생의 무지개를 펼쳐보이는 듯 했다. 그들은 이제 막 시작되려는 산뜻한 신록의 맑은 기운을 만끽하면서 쭉 뻗은 숲길을 따라 응달속으로 사라지 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저 나무위의 살찐 다람쥐 좀 보세요. 우릴 보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옆에서 지저귀는 현주가, 이제 막 옆에 내려앉아 모이를 쪼고 있는 하얀 비둘기 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다람쥐의 깨끗한 눈망 울이 때묻어 더러워진 가슴 속을 훔쳐보는 듯해서 고개가 돌려졌 다. 무성한 나무 아래서, 시리도록 푸른 풀밭에서, 손을 맞잡고 껴 앉는 다른 쌍쌍들에게도, 내가 그들만큼 예쁘게 보일 수 있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저 퐁퐁 솟아나는 샘을 좀 보세요." 아폴론의 샘을 가르키며 고개를 돌린 현주가 무척 아름답게 보 였다. 그녀의 섬세한 쌈사라 향수 냄새까지 감돌자, 나는 별안간 솟구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입술을 맞 추고 말았다. 아폴론의 샘물보다 달콤한 액체가 입술에서 혀에서 젖어 들었 다. 가슴팍을 밀어내는 현주의 저항을 나는 한동안 무시하고 그 녀의 입술을 계속 탐했다. 현주의 저항이 무너지고 그녀의 부드 러운 가슴을, 가슴으로 음미할 수 있었다. 한동안 그녀를 맛 본 후, 그녀를 놓아 주었다. 사내의 침으로 잔뜩 더러워진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현주 가 쌀쌀하게 말했다. "오빠는 차림새는 신사였지만, 속은 거지였군요." 싸늘한 표정으로 쏘아보는 현주를 마주보면서, 그녀가 귀족의 딸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녀가 매정하게 등을 돌리자, 마음 속에 서 이상하게 적적해 오는 슬픔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제와 오늘 나는 현주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백화점에서 비싼 여자 옷들을 구경 시켰고, 분위기 그럴싸한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서 희귀한 만찬으 로 그녀를 어색하게 했으며, 유럽 제일의 나이트에 데리고 가서 그녀 앞에서 람바다를 추었다. 그리고, 오늘 마리앙뜨와네트의 화려 뻑뻑한 숲길에 데리고 왔다. 이 모든 것은 고의였다. 현주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는 고의가 아니라 사로잡지 않으려 는 고의였다. 사실, 여자가 분위기에 약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그것은 평소의 분위기보다, 조금 더 그윽하 고 약간 더 화려한 분위기면 족할 것이다. 지나치게 화려한 무대 는 여인을 잠시 들뜨게 할 수는 있어도, 여인을 사로잡을 수는 없는 무대가 되고 만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보통의 현명한 여 인이라면, 잠깐 동안의 호화로움에 들뜨기는 하겠지만, 조만간 마음을 가라앉히게 되고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곤, 자신과 상대를 돌아보며 이질적인 거부감에 엉뚱한 반발을 하게 되거나, 의심스런 유혹에 겁을 집어 먹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 인에게서 진정을 빼내오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설사, 빼낸다 해도 신통한 진정(眞情)은 결코 되지 못할 것이란 것이 내 생각 이었고 경험이었다. 나는 현주를 꼬시겠다는 의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그녀의 아름 다움에 취해 미련한 짓을 저지르고 만 것 같다. 어쩐 일인지 최 현주에게는 계속 빗나가는 일만 저지르는 나 자신을, 이해하기 괴로웠다. 그녀에게 부담없고 재미만 있는 존재로서, 그녀의 한 때를 즐 겁게 해주고자 하는 생각이, 자꾸 마음에서 어긋나고 있었다. 마 음에서 불끈불끈 솟아나는 욕심이 나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녀 를 갖고 싶은 염치없는 충동이 지난 날의 사랑을 괴롭히며 나를 좀먹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렇게 약하지는 않았다. 단발머리 최 현주와 사랑을 나누려 했다면, 나는 소박하게 그 녀에게 다가가서, 얌전하고 다정한 호소로, 거짓말을 했어야 했 다. 떨릴 듯한 음성으로 조금씩 진정을 내비치며, 수줍지만, 약 하지 않은 사랑을 겸손하게 그녀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젊은 처 녀는 낯설고 위험스럽게 여겨지는 사랑을 도리질 할 것이고, 나 는 정직하고 순진한 떠듬거림으로 꾸준히 진정을 호소하면서, 그 녀의 미래를 약속하는 여운을 만들어가며 그녀의 두려움을 없앴 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직 옛 사랑이 나를 움직이고 있음은 분명했다. 냉랭하게 앞 서가는 현주를 따라붙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 다. 더 이상 지저귀지를 않는 현주의 눈치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난 미안해하는 표시를 얼굴에 잔뜩 담고 있었다. "미안해. 용서해 줘.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간 탓도 있었지만, 그건 너가 너무 예쁘게 보여서 그런거야. 그러니까, 나도 잘 못 했지만, 그렇게 대책없이 예쁜 너 한테도 책임이 있는거야." 은근히 추켜올린 아부가 그녀를 누그러뜨렸는지, 아니면 화를 내기에는 베르사이유 궁전이 너무 아름다왔는지, 한동안 말없이 걷고만 있던 현주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며 입을 떼었다. "한번만 더 그러시면, 다시는 안 볼꺼예요." 안그럴 자신이 또렷하게 서지 않아서 슬그머니 비껴가는 대답 으로 대신했다. "용서해 줘서 고마워..." 현주의 눈꼬리가 상큼하게 치켜 올라가며 적당히 넘어가 주질 않았다. "언제 용서한다고 그랬나요? 다시 또 그러시면 안볼거라구요, 알았나요?" 나는 현주의 눈을 깊숙히 응시하는 것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요번 것은 성공한 듯 싶었다. 쏟아지는 눈길을 맞받기 어려워진 듯, 현주는 시선을 내리 깔았고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역시, ` 여인에게는 입보다 눈이 강하다`는 제비철학을 또 한번 실습하는 순간었다. 아폴론의 샘에서 십자형으로 만들어진 호수를 따라 오른 쪽으 로 꺽어 올라갔다. 호수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측 갈래 길을 따라 프티 트리아농 정원으로 들어섰다. 사랑의 신전 앞에는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으나, 영옥을 알아보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백옥같이 하얗던 영옥의 얼굴은 중동에서 겪은 모진 훈련 때문 인지, 까무잡잡해져 있었다. 영숙을 닮은 커다란 눈망울과 긴 속 눈썹이 칠 팔 미터의 떨어진 거리에서도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오똑한 콧날이 만만치 않은 여인의 자존심을 뽐내고 있는 듯 했 지만, 성숙한 진홍의 루주 빛에, 애잔한 사랑을 겪고 있는 여인 의 한숨같은 것이 묻어져 보이는 듯 했다. 양쪽 귀 아래에서 흔 들거리는 삼각형 귀거리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고, 감색 투피스 정장이 매끄러운 차림새를 보여주고 있었다. 영옥과 시선을 맞추었지만, 나도 영옥도 상대방을 쳐다보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영옥의 어깨너머로 올려다 보이는 사랑의 신전 이란 푯말이 어색해서 나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프티 트 리아농 정원을 벗어나 호수를 따라 내려가는 동안, 현주는 영옥 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채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고, 영 옥은 7-8미터 떨어진 채로 따라오고 있었다. 검정 모자를 쓴 마부가 끄는 마차에는 신혼 부부인 듯한 남녀 가 깔깔거리고 있었고, 호수위에는 보우트 족들이 느긋하게 노를 저으며 한가한 정오의 햇살을 받고 있었다. 로맨틱한 주변의 오두막 집들과 주변 경치에 두리번 거리며 걷 고 있던 현주가 시장기를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저 목이 좀 말라요." "저 앞에 까페가 있으니까 거기가서 뭐 좀 먹자." 호수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서 호수 옆의 실내와 실외를 겸용 하는 노천까페에 자리를 잡았다. 흰색 테이블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는 이유로 나는 옆 자리의 의자를 조금 밀어 넣고 앉아야 했다. 현주가 메뉴판에서 알아본 유일한 음식이, 어제 줄리앙에서 먹 었던 달팽이 요리인지라, 다시, 달팽이를 시켜 주었고, 사과꼬냑 깔바도스를 추가시킬 때였다. 내가 의자를 밀어 넣은 옆 테이블로, 뒤 따라오던 영옥이 슬며 시 앉고 있었다. 가끔씩 현주의 모습을 훔쳐보며 내 눈치를 살피 는 그녀가 약간 안스럽기도 했지만, 여전히 토라져 있는 마음의 고삐는 전혀 늦추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에서 영숙과 지난날 의 현주의 영상이 문득문득 떠오르자, 오히려 그녀를 냉대하고 싶은 충동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나는 지능적이고 악마적인 방 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수선하게 두리번 거리던 현주가 옆 테이블의 동양계 아가씨 에게 비로소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는지, 고개를 가까이하고 나에 게 속삭였다. "오빠! 저 여자 분위기있죠? 너무 멋있어 보여요. 그런데, 꼭 한국여자 같아요. 그렇죠?" 나는 옆 테이블에 충분히 들릴만한 소리로 대답했다. "멋은 무슨... 화장은 촌스럽고, 옷도 너무 딱딱한 정장이라, 베르사이유에는 전혀 안 어울리는 차림이야." 현주가 고개를 바짝 들이밀며 다시 소곤거렸다. "그래요? 그래도 쪽지어 올린 헤어스타일이 너무 근사해 보이 는데요." 다시 영옥이 충분히 들을 수 있을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근사하기는... 이런데서 유부녀 티 내는 것도 아니구... 현주 처럼 목이 하얗면 또 몰라도, 목덜미는 거무튀튀해가지고, 머린 왜 올려. 현주 단발머리가 훨씬 근사해." 현주가 여전히 고개를 기울이고 말했다. "그렇게 크게 말하면 어떻게 해요. 알아들으면 어쩔려구..." 다시 작지않은 소리로 대답했다. "저렇게 못 생긴 한국여자 봤어? 염려마 못 알아들어. 그러니, 너도 안심하고 말해도 돼. 알아들었으면 벌써 달려들었지..." 현주가 허리를 쭉 피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서 제일 눈에 뜨이는 데요." "못 생긴 여자도 눈에 잘 뜨이는 법이야. 내 눈에는 현주만 보 여." 내가 내 뱉은 `현주`란 단어가 영옥을 자극했는지, 영옥은 좀 전보다 현주를 더욱 힐긋거리고 있었다. "저 여자가 자꾸 절 쳐다보는 것 같아요." "거봐. 저 여자도 사람보는 눈은 있어서, 현주가 예쁘니까 더 욱 자주보는 거야." `현주`란 단어에 악센트를 주어 말하고 나서, 나는 다시 `대한 항공 스튜어디스`에 힘을 주어 가며 말했다. "근데, 현주는 왜 대한항공 스튜어디스가 되었지?" 현주가 약간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냥... 그렇게 되었어요. 학교 떨어지고 후기도 떨어지고 그 렇다 보니, 제일 눈에 띄는 것이 항공운항과였어요. 여행도 많이 할 수 있고, 일찍 취업해서 돈도 벌고... 그래서 되었겠죠." 옆 테이블에서 귀 기울이는 영옥의 눈빛이 약간 붉게 물들어 가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더욱 그녀를 괴롭히고 싶어졌다. "현주는 애인 없나?" "남자친구는 몇 명 있지만, 애인이랄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 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애인처럼 보이는 남자도 없어?" "호호. 글쎄요. 전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라서 저를 그렇게 자 세히 봐 줄 만한 남들이 별로 없어요." 나는 현주에게 비참하게 차이는 모습을 영옥에게 보여주고 싶 어졌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것 이 지금 처해진 여건에서 영옥을 가장 가혹하고 당혹스럽게 괴롭 힐 수 있는 짓 같았다. "난 현주의 남자가 되고 싶다. 언제 어디서라도 현주가 찾아만 주면 달려갈께. 연인이 되어다오." 뺀질거리는 미소를 얼굴에 약간 남긴 채, 나는 계속해서 주절 거렸다. "나는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를 어떤 못된 여자의 농간으로 잃 고, 여러 해를 외롭게 지냈어. 그 이후에 만난 여인들이 없진 않 았지만, 사랑을 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너에게 처음인 것이 나 마찬가지야. 불쌍한 인간 하나 구제해 준다는 심정으로 연인 이 되어다오." 현주가 차분하게 굳어진 얼굴로 그다지 진지해 보이지 않는 내 얼굴을 찬찬히 흘터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입술을 열 었다. "저는 아직까지 오빠 외에는 오빠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오빠를 만나기 전에는 오빠같은 사람이 있을거란 생각조차 해 본 적도 없어요. 오빠는, 저나 또 그외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마찬가 지 였겠지만, 확실히 신비스러운 점이 느껴졌던 사람이예요. 무 언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오빠에게서 흘러 나오는 모든 것들 은 막힘이 없는 듯 해보여요. 그런 것들이 오빠에 대한 호기심을 한층 유발시켜 주었어요. 전 오빠에 대해서 잘 몰라요. 아는 것이 거의 없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심지어 나이도 몰라요. 아 는 것이라곤 몇 번 되지도 않은 만남에서 얻은 얄팍한 것들이 고 작이죠. 시간이 많아 보이고 돈도 많아 보이고 여자를 밝히고, 물론 때론 멋도 있어 보여요. 하지만, 오빠에게 기댈만한 믿음은 전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박 현주에게서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옷 잘입고, 돈 많고, 춤 잘추며 잘 놀고, 여자한테 아부 잘하고 그런 것이 전부더군요. 그리고, 어제 오늘 오빠와 함께 다녀보 니, 현주말 그대로 였어요. 이곳이 이국 땅이 아니었고 서울의 어느 곳이었다면 전 오빠같 은 사람과 이렇게 앉아 있지는 않았을 꺼예요. 저는 그다지 부유 한 집에서 자라지 못했어요.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셨지만, 언제나 쪼들리셨고, 어머니는 보 험회사에 다니시면서 가계를 도우셨죠. 아버지는 잘 내색은 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나 저희들에게 충분히 베풀지 못하는 현실을 몹시 부끄러워 하시는 것 같았어요. 저희들이 어쩌다 잘못을 하 면, 따끔하게 나무라시지도 못하고 혼자 소수잔을 기울이는 모습 이, 참 초라해 보이시곤 했죠. 가장으로서의 자존심을 제대로 지 키지 못하는 것을 우울해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 아버지의 모 습을 볼 때마다 안되셨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 아버지가 좀 더 능력이 있으셨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지금까지 그런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죠. 하지만, 어머니나 저희들 모두는 저희 아버님을 사랑해요. 아버지는 우리에게 충분히 해주시지는 못했 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진실하게 느껴졌거든요. 눈물을 흘리시면 진짜 마음이 아파서 흘리는 눈물이셨고, 웃으실 때는 진짜 기뻐 서 웃는 웃음이었어요. 그리고, 눈물이든, 웃음이든 저희들과 관 계된 것이라면, 그 속에 담긴 아버지의 사랑을 늘 느낄 수 있었 어요. 아버지가 저희들을 위해 애쓰신 노고라든가, 애쓰고도 잘 해주지 못한 미안함이라든가, 저희 가족을 위해 인생 전부를 걸 고 고군분투하시는 위대한 전사의 모습도 느낄 수가 있었지요. 그래서, 전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해요. 그런 것이 오빠와 제가 연인이 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해요." 조용하고 또릿또릿하게 흘러나온 현주의 `노(NO)`에 대응할 만 한 염두를 굴리기가 난해했다. 현주가 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요즈음의 다른 보통의 젊은 아가씨들보다 유별나게 여겨 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로 젊은 아가씨들을 파고들어 가 보 면 거의가 다 착하다. 세상이 세월따라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한 세대가 가면 사고의 차이도 조금씩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를 않는 것 같다. 어느 시대건 누가 뭐래도 젊은 사람들의 생각이 보편적으로 제일 깨끗하다는 점은 대체로 부인하기 어려운 것 같다. 쉽게 흥분하고 단순하긴 하지만, 스무살짜리 아이들은 옳고 그 른 것에 일단 관심이 있고, 자신과 상대방의 옳고 그른 점들을 비교하며 판단하는 틀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자세를 벗어나지 못 한 상태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시비에 의해서 어떤 일에 대한 결 정이 내려지는 것에, 이권을 밝히는 구세대보다는, 확실히 긍정 적이라 할 수 있겠다. 과거에도 그랬고, 요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어른들이 젊은이들을 욕하는 버릇은 세대에서 세대로 유전되고 있는 것 같 다. 심심치않게 오르락 거리는 X 세대니, 신 세대니, 하는 말들 도 구 세대 중 누군가,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 짜맞춘 모델 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젊은 애들에 의해서 창조된 세태라고 느 껴지기에는, 10년 전과 특별이 구별되는 점을 체험한 바 없다고 여겨진다. 신라시대의 벽화에도 요즘 젊은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낙서가 되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굳이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과 애써 편가를 이유는 없다고 여겨진다. 어떤 세대건 생각이 건전한 그룹이 있고, 별로 그래 보이지 않 아도 건전한 그룹도 있다. 반대로 생각이 몰상식하고 주책없는 그룹도 있고, 겉은 건전해 보이는데, 속은 형편 없는 그룹도 있 겠다. 하지만 지나치게 누굴 욕하고 누굴 칭찬할 필요까지는 없 다고 생각된다. 악당이 있어야 정의의 용사가 광이 나는 거니까, 항상 정의의 용사만 되지 말고, 가끔씩은 악당도 되어 조연 구실 도 해 보면서, 악당이 되어야 하는 조연의 사정도 좀 배워보는 것이, 인생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현주의 노(NO)에 좀 더 어거지를 부려 보기로 했다. 옆 자리에서 듣고 있는 영옥에게서 좀 더 짜릿함을 얻어내기 위해서 라도... "현주 말은 나에게 진실성이 떨어진다는 말인데, 사람을 너무 단순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니? 난 보기보다 매우 진실한 사람이야." 현주가 깔바도스 한모금을 홀짝거리고 대답했다. "사람의 진실성은 입에서 흘러나온 말로 판단할 수 없어요. 그 사람의 행동에서 우러나는 거예요. 만난 지 몇 번 되지도 않는 여자 입술을 강제로 탐하고 연인이 되자고 하는 사람이 과연 진 실한 사람일까요?" 궁지에 몰리고는 있지만, 내 혓바닥이 죽어 지내지는 않고 있 었다. 물론 궁지를 모면할 만한 혓바닥 놀림과는 거리가 먼 것이 었지만... "유행가 가사에도 있잖아. 사랑은 은은하게 다가오기도 하지 만, 순간에도 느껴질 수 있는 거라구... 너처럼 예쁜 여자에게 사내라면 일단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이고, 또 너를 몇 번 보면서 너에게서 슬쩍슬쩍 흘러 나오는 우아한 품위가 나를 사로잡은 것 같아. 게다가, 조금 전에 너가 들려 준 아버지에 대한 너의 사 랑, 그리고 뭐랬더라, 그래, 그 진실성 말인데, 나에게 아주 감 명 깊더라구... 네 말에 느낀 바가 많아. 사실 나는 버티기 힘 들 정도로 외롭거든. 쓸쓸한 밤을 홀로 지새우고 아침에 눈을 떠 서 빈 옆자리를 보노라면 슬퍼져. 그러니, 불쌍한 인생에 돌을 던지려고만 하지말고, 좀 구제해 다오." 비릿비릿한 설득이 그녀에게 짜증같은 한숨을 유도했는지, 그 녀가 작지 않은 한숨을 내쉬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타일었다. "어휴! 이제 고만 하세요. 자꾸 이러시면 저 혼자 갈꺼예요. 사랑은 동정이 아니예요. 구걸을 해서 얻겠다는 발상자체가 마음 에 들지 않아요. 전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오빠같은 사람의 연인 이 될 수 없어요. 저는 오빠에게 맞지 않으니까 다른 여자를 찾 아보세요. 다시는 저에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한번만 더 그 런 소리 하시면 오빠를 싫어할 뿐더러, 아주 구질구질한 사람으 로 보게 될 것 같아요." 현주에게 묵사발이 되고 있었지만, 내 입술 가에는 아직도 미 소가 남아 있었다. 나는 패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마음속 의 사랑과 영옥에 대한 보복은 실패하지 않고 있는 듯 했다. 내가, 현주에게 구질구질한 인간이 되기위해서 마무리 입놀림 을 하려고 할 즈음였다. 옆 테이블의 영옥이 일어나서, 나와 현 주 사이로 다가왔다. 갑작스런 영옥의 등장에 현주가 의아한 눈 길로 영옥을 올려보고 있었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영옥은 나대신 현주에게 허락을 구했다. "어머! 한국 사람이셨군요. 네. 앉으세요." 현주 옆에 앉은 영옥이 맞은 편의 나를 쳐다보았다. 나 역시 영옥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고, 눈싸움에서 지지않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현주가 말했다.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영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나는 모른다고 했다. "모르는 여자야." 영옥은 얼굴 가득히 미소를 피우고 현주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전 김 영옥이라고 해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영옥의 미소가 현주를 편하게 해주었는지, 현주가 스스럼없이 주절거리고 있었다. "최 현주라고해요. 아까 부터 눈이 자꾸 그곳으로 가긴 했는 데, 같은 한국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반가와요." 영옥은 얼굴에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였고, 현주 역시 귀찮게 굴던 나보다 새로이 등장한 영옥과 이야기 하기 편했는 지, 둘 사이에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저분은 저를 모르신다지만, 저는 저 분을 잘 알아요." "어머! 그러셨군요. 어떻게 아시는 사이인가요?" "제 과외선생님이셨고, 언니의 연인이셨어요. 안지 무척 오래 되었지요. 아까, 저분이 말씀하시길 사랑하는 여인을 어떤 못 된 여자의 농간으로 잃었다고 하셨죠?" 현주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영옥은 얼굴에 미소를 피우려고 애를 쓰는 덕에 얼굴에는 미소 가 만들어져 있었지만, 눈망울에 물기가 방울방울 맺히고 있었 다. "제가 바로 그 못된 여자예요. 오빠와 언니들의 사랑을 망쳐 놓은 몹쓸 여자지요." 영옥의 눈물을 보노라니, 예전에도 보았던 그녀의 눈물이 생각 났다. 그녀의 아파트에서 본 적이 있었다. 죽이고 싶지만 영숙이 동생이라 죽이지 않는다고 내뱉고 돌아 나온 적이 있었다. 영옥 은 그 뒤에도 내 발자취를 더듬어 오곤했다. 중동에 있을적에는 LA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찾아 다니며 나를 찾았고, 중동에서 돌 아와 영숙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썼던 `서울대의 찌꺼기`가 천 리안에 오르고, 누군가에 의해서 하이텔까지 올랐을 때, 하이텔 담당자에게 거세게 항의하여 지울 것을 요구해서 기어코 지웠고, 천리안 컴퓨터 문단 담당자 이 광희씨에게도 전화를 걸어 내 연 락처와 지울 것을 요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이광희씨만 못 살게 굴었던 적이 있었다. 책이 출판되자 이번엔 출판사를 통해 나를 찾았지만, 그녀는 나를 찾을 수 없었다. 지금 흐르고 있는 영옥의 눈물엔 그런 발자취들도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테이블에 두 여인을 남겨둔 채, 베르사이유의 호숫가를 거닐었다. 아름다운 물, 예쁜 수차, 한가하게 노를 젓고 있는 보 우트 족들과 바쁘게 오가는 히이킹 족들, 봄꿈에 젖어있는 듯한 귀여운 연인들... 마리앙뜨와네트를 단두대의 이슬로 몰고 가게 한 베르사이유였 건만, 확실히 지금의 호숫가는 낭만이 넘치는 장소임에는 부정할 수 없었다. ----- 끝 -----